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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Yes -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거룩한 예스
스탠리 존스 지음, 배응준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주 복음을 전했다. 나 나름대로 강하게 말하였고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정작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실망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 내가 했구나. 내 말을 했구나. 아니 주님의 말이라도 내 힘, 내 혈기, 내 의지, 의사가 너무 강하게 작용했구나하고 알게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예스가 되어야 내가 제대로 쓰임 받을 수 있는데 아직 훈련이 덜 되었나보다. 아니 아직 부족한 게 당연할 것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예스가 되도록 해야겠다.
하나님의 예스는 1907년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67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가장 신뢰받는 선교학 전문가’,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선교사’등으로 존경받는 분이다. 1971년 12월 8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온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가 평생 전했던 말씀을 육성으로 써내려간 영적 유언장이 바로 이 책이다. 그 주제는 ‘하나님의 예스’이다. 즉 ‘하나님의 예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어떤 이론도, 학설도, 사람도, 능력도 아닌 그냥 예수 그리스도, 인격적이신 그 분이다. 그분이 답이다. 그분이 전부다. 그분만이 모든 것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일평생 알았고, 뇌졸중에 걸려서 모든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19)‘하나님의 예스’가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긍정하는 ‘예스’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모펫의 번역본)
스코틀랜드 성경학자 모펫의 번역본의 표현에 매료된 스탠리 존스는 이 구절을 기점으로 모든 것을 풀어나간다. 하나님의 예스이신 예수님의 ‘예스’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를 얻을 것이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복자와 승리자로 이 땅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예스라고 긍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자체가 죄임을 증명하는 것이요, 예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즉시 순종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예수님의 임재의 증거가 된다. 주님께 순종할 마음을 가져야할 것이며, 순종하면 임재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나는 오늘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된다. “예수님의 예스되심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내가 예수님의 예스됨으로 내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내일 치유수양회 가운데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전해져서 주님의 순종이 참여자 모든 사람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12가지 의문점들은 예수님의 예스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12가지는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실까?” “하나님은 공동체에도 나타내 보이실까?” “올바로 사는 법이 있을까?” “영적으로 굶주릴 때,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인생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임재는 지속성을 갖고 있을까?” “성령의 은사는 꼭 받아야 하는가?” “기독교 신앙은 믿을 만한 신앙인가?” “모든 질문에 ”하나님의 예스“가 답이 될까?” “고난의 돌파는 어떻게 하나?” 매우 포괄적이며 궁금한 질문들이다. 불신자나 신자들에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질문들이다. 스텐리 존스는 수많은 체험과 간증을 통해 증명해 주고 있다. 물론 논리적인 부분도 다소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음에 와 닫는 실증들이다.
몇 가지만 언급해 보면, 공동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설명할 때 “우리가 어떤 두드러진 인물이 되지 않더라도 예수님 안에 구체화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따르고, 전하고 선포하는 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말할 수 없이 귀한 가치를 지닌 매우 종요한 사람들이 된다”고 했다. 즉 공동체에서 주님의 따르는 삶을 살기만 하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올바로 사는 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리스도의 길이 어렵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 그리스도의 멍에가 당신의 열망이요, 짐이 당신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의 존재를 지배하는 법은 그리스도의 길의 법이다.“ 나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리고 고통이요,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도를 모시고 ‘예수님 예스”가 된다면 너무나 쉬운 일이다. 우리가 받는 훈련, 사명의 길은 쉬운 길이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요, 인간의 참된 본성이다. 그러나 죄가 인간을 부패시켰다. 죄는 인간이 형성한 습관일 뿐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인간의 본성에 침입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선설이 맞는가? 적어도 본래적인 관점에서는 그렇다. 그런 본래적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예수님 예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스텐리 존스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중풍병자인 나는 과연 불행할까?” 그는 대답한다. “나는 행복하다. 나의 행복이 외면적인 환경과 현상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원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예스”라고 말할 때, 우주 전체가 당신에게 “예스”라고 말할 것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국의 교계 지도자가 미국 교회에 멧시지를 전하러 왔다가 자신에게 들러 “저는 세계적인 영적 각성이 곡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비관적인 입장입니다. 그것이 그냥 말로만 끝나버릴까 적이 우려됩니다” 고 했을 때, 스텐리는 “아뇨,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교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세계적인 영적 각성 운동 그 이면에 세상의 움직임, 즉 이 세상의 절박함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영적 각성을 먼저 갖지 않으면,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낳을 수 있는 새로운 자녀들을 낳지 못하면 세상은 회복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운동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스탠리는 긍정적으로 보았고, 내가 먼저 “예수님의 예스”가 되면, 또 예수님의 예스의 사람을 낳으면 가능하다고 희망적으로 보았다. 그렇다. 긍정해야 긍정의 예수님이 역사하신다. 내가 긍정할 때 긍정의 영이신 예수님이 역사하신다. 나도 오래 전에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 시대의 절망적인 대답을 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젠 내가 먼저 “예수님의 예스”가 되기를 결심한다. 이 순간 내가 “예수님의 예스”가 된 줄 믿는다. 이미 내 안에 예수님의 예스의 영이 일하시기 시작했다. 치유수양회 가운데 1)예수님이 참석자 전원에게 임하신다. 2)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3)삶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4)스텝들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5)찬양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6)나눔을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 7)간식, 분위기를 통해 예수님의 예스가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