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이다 - 십 년의 난임, 세 번의 유산 우리가 마침내 아기를 갖기까지
박제균.김하경 지음 / 미래의창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가끔 우울하다. 나이가 오십 줄에 들어서니 갱년기도 오고, 일에 지쳐있는 것 같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니 아이들 셋이 벌써 20대에 들어 장성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 키우는 느낌이 별로 없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애기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도 생각이 된다. 손주를 봐야 할 나이가 되었나 보다. 나중에 손주를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내 느낌에는 거의 맞는 것 같다. 나는 애들이 셋이라 아이 소중한 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사실 돌아보면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결혼 후 6개월 만에 아내가 복통이 심해 병원에 갔더니 맹장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맹장 수술할 것을 권해 수술 동의서를 썼다. 그런데 맹장이 아니라 난소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이다. 난소가 둘 이나 하나를 떼어도 임신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오진에 억울한 마음이 있었지만 난소 하나를 떼어내고, 수술한 김에 맹장까지 수술을 했다. 난소가 하나 없어 임신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데 다행히 다음 해 임신을 해서 첫째 아이 딸을 낳았다. 둘째도 역시 딸을 낳았다. 셋째는 예상치 않은 임신이라 고민을 했다. 아내도 걱정을 했지만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절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믿음으로 낳았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딸일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낳아보니 아들이었다. 딸 둘에 아들 하나 그야말로 200점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벌써 다 자라 직장과 대학 3학년,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요즘 딩크족이 많다고 한다. 둘이 벌고, 아이는 없이 둘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는 것 같지만 자연의 순리인 생명을 이어가는 기쁨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가정에 아이가 10년 가까이 없을 때 겪는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두 부부가 겪는 아픔을 보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12번의 인공수정, 다섯 번의 시험관 아기, 세 번의 유산 모두 실패하면서 겪는 고통은 아무도 모른 것이다. 남편의 부담감, 아내와 이혼까지 생각하고, 결국 직장까지 그만두게 되는 아픈 일들을 겪었다. 아내의 아픔은 더 심했다. 시부모를 보기 민망한, 형제들과의 알 수 없는 서운함, 계속되는 수술의 육적, 심적 고통, 거기다가 경제적 부담까지, 집에 와서 손수 주사를 맞아야 하는 생활의 불편함 등은 보통 사람들로는 알 수도 업는 어려움들이었다. 그러나 이 부부가 잘 이겨낸 것 같다. 아니 버텨낸 것일 것이다. 두 부부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런 어려움 속에 얻은 아이라 남다름이 있었을 것이다. 10만 시간이라는 긴 시간의 기다림 후에 얻은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동화로 만들어 책을 냈고, 수많은 사람이 읽고 있다니 더불어 오는 복이라 생각된다. 고통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더 많은 축복으로 겸하여 온다는 것을 보게 된다.

 

두 부부의 경험을 볼 때 자연스러움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토록 노력을 했지만 임신이 안 되었다. 그러나 부담을 털고 여행을 했고, 여행 중, 혹은 여행 후 자연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임신했을 때 피검사, 양수 검사 등등 요란을 떨어 결국 염색체 이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아이를 떠나 보낸 경험을 한 그들이 자연 임신의 아이는 어쨌든 낳겠다는 마음으로 양수검사를 하지 않는 모습에서 자연적이라는 것, 그 소중함을 지켜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뭐든지 자연적인 것을 더 많이 찾아야 할 것 같다. 아마 이 부부도 직장생활하면서 많은 스트레스, 부담감, 생활에 찌들린 마음 등이 얽혀 난임이라는 결과가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생활에 묶여 있는 것들을 먼저 풀어내고 자연스럽게 접근하면 모든 것은 다 풀릴 것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수진이를 잘 키워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축복합니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두 부부의 집념에 이 시를 바친다.

 

헌시(獻詩)

 

이재선

 

수천리 먼 바다에서도

번식 주머니 강 언덕을 잊지 않고

갈키고, 찢기고, 뽑히고

폭포 거스리는 연어처럼

 

생명 줄 잇기 위해

맘고생, 몸은 만신창이,

따가운 눈총에 다 뜨지 못한 눈

부부 연 끊어낼 위기도 넉근히 이기고

언제 끝날 줄 모를 터널

십 만 시간 생명 해 뜨길 숨죽이고

한 생명의 비밀을 풀어낸

기적의 인연

 

조용히 날아온 꽃씨

인화(人花) 수진이

숨이 싹틔웠으니

대나무 자라듯

기쁨도, 행복도, 축복도

봄 벗 나뭇가지 수억 달리듯

수진 가정에 빼곡하여

죽음같이 인생을 얼게 한 겨울 이기고

당당히 피워낸 새싹처럼

보는 이들의 마음

소망의 꽃잎 나눔의 샘물 되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독교인 책에서 길을 묻다 - 참 믿음으로, 참 좋은 인생이 되는 길
김옥림 지음 / 북씽크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늦깍이 독서인으로서 “기독교인 책에서 길을 묻는다”하여 무척 기뻤다. 책에는 무한한 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독서가 의무로 여겨져 늘 수면제 역할 밖에 하지 못하던 나에게 독서가 취미를 넘어 나의 인생을 열어주는 특기가 되어주었다. 나에게 두 가지 중독된 것이 있다. 하나는 운동(베드민턴)이고, 다른 하나는 독서다. 독서가 중독이 되어 아내의 드라마, 자녀의 게임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 그래서 독서에 심취해 있다가 밥시간을 놓치거나 다른 일을 잊어버릴 때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독서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독서를 통해 시도 쓰게 되고, 등단까지 하는 영광을 얻었다. 또한 너무 좋은 길을 수도 없이 찾아가게 되어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말 궁금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인이 책에서 길을 묻고 가면 반드시 신실한 크리스천, 참된 성도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저자 또한 독서를 통해 많은 책을 쓰게 되고, 강연을 하고, 훌륭한 인물이 된 산 증인이라 생각된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기탄잘리>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감동을 주고 있다. 기탄잘리가 지금 한국에 나왔다면 평단이나 시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저자는 그의 평범한 글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시는 어렵고, 심오하고, 난해해야 주목을 받는다는 편견에 문제점을 지적한다. 얼마 전 발표된 조선일보 신춘문예나, 중앙일보 신인작가상을 보면 조금 같은 느낌을 받았다. 중앙일보에 기고를 해 본 경험자로서 공감이 된다. 어쨌든 기탄잘리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찬양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타고르가 하나님을 그냥 글 그대로 평범하게만 써 나갔다면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직접 느끼는 하나님에 대해 가감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썼기 때문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나도 기탄잘리에 도전을 받고 이제 내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찬미해 보려고 한다. 시로 적어보려고 한다. 날자별로 시를 적어가고 있는데 찬미시만 별도로 적어보고자 한다. 하나님! 영감을 주시옵소서!

 

탈무드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담은 책이다. 탈무드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공기인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참 의미 있는 말이다. 공기처럼 거저주고, 보이지도 않고, 공치사도 안하는 공기 같은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참 사람들은 별로 좋아 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말은 안 하지만 실제로 공기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즉각 공기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고, 언제든지, 돈도 안 주고 얻을 수 있는 공기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공기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런데 늘 있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없으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그런 꼭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공기 같은 사람! 멋진 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한 말 중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무관심하다고 불행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남의 마음을 읽으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읽어야할 것이다. 마음을 읽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따라가는 자세가 중요할 것 같다. 마음의 소리에 솔직해 지자. 공자는 열다섯에 사람의 마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서른 살이 되어서는 방향이 겨우 보이기 시작했고, 마흔 살쯤에는 인생의 목표가 확고해 감에 따라 망설임이 사라졌고, 쉰 살에는 ‘내 인생은 혼자만의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고, 예순이 되니 나와 다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도 ‘이런 삶의 방식도 있구나’라고 이해하며 반하지 않게 되었고, 일흔이 되자 나의 욕망이 타인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나도 쉰이 넘은 나이에 생각해 보니 공감이 된다. 요즘 타인을 위해 살려고 애를 쓴다. 습관에 젖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몸부림쳐본다. 예순, 일흔 계속 잘 배워가야 할 텐데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몇 일 전 이어령 박사님의 <생명이 자본이다>를 읽었다. 참으로 깊은 사색에서 나온 현대인들에게 주는 결론 같았다. 그런데 이어령 박사님이 자료로 제시하는 책들 중에 내가 읽은 책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니 심지어 알지도 못하는 책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보면서 침통했다. 나의 독서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정말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애들에게 책 읽으라고 늘 말해주는데 아직 말해줄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말에 아이들이 잘 안 들어주는 것을 보면 아직 말해줄 단계가 아님을 알고 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책에서 길을 묻고 답을 찾게 해 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더 깊이 우물을 파야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완성하는 미술관 - 10대의 정체성, 소통법, 진로, 가치관을 찾아가는 미술 에세이 사고뭉치 6
공주형 지음 / 탐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요즘 짬짬이 시를 지어 지인들에게 가끔 읽어준다. 듣는 이들의 반응이 늘 두렵지만 아! 하고 감탄을 하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해 줄 때 보람이 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다. 그 예술이 남들에게 크게 알려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크게 알려진 예술가들 대부분 살아 있을 때보다는 죽고 나서 알려진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알려지기 위한 방법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삶과 느낌, 고뇌, 경험 등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들이 후대에 알려지게 되는 것 같다. 화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그림을 통해서도 너무나 많은 것들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시를 읽어주면 그림을 전공한 제자는 “그림만 아름다운지 알았는데 글이 아름다운 것을 알았네요”한다. 이제 내가 고백하는 것은 “글만 아름다운지 알았는데 그림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를 이 책을 보면서 하게 된다.

 

나는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근현대미술100선을 다녀 왔다. 100점의 아름다운 작품 중 단연 박수근의 작품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가 주목받듯 집중 관심을 받고 있었다. 저자는 박수근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수근도 가난하지만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배후에는 끊임없는 아내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다. 훌륭한 작품의 뒷면에는 이런 주변의 도움과 무엇보다 본인들의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뒷받침 되었던 것 같다. 한 점의 그림 속에 훌륭한 화가들 의 인생의 깊이가 담겨 있다. 그 그림 한 점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또한 후손 대대로 감동과 영향력을 줄 수 있다. 그림의 위력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림을 통해 인생의 깊이를 알고, 자신만의 특별한 인생을 살 용기를 불어 넣어줄까를 고민하며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4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 자아정체성 찾기, 제2부 소통법 발견하기, 제3부 함께 성장하기, 제4부 가치관 완성하기. 각각의 주제에서 특별한 화가 한 명씩 소개해보고자 한다.

 

제1부의 자아정체성 찾기: 나를 사랑하다.

칼로, 그는 소아마비, 교통사고, 유산, 이혼 등 이 많은 불운 속에서도 예술 꽃을 피웠던 화가다. 멕시코 최고의 수재들만 다니는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다 교통사고로 침대에 눞게 된다. 누워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자신의 그림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싶어 당대 최고의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를 초대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건강치 않은 자신을 외면하고 다른 이를 찾는 남편에 대한 원망(떠 있는 침대), 미국에 건너가 적응하지 못하며 지내면서(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선에 서 있는 자화상) 여러 번의 수술에도 치료되지 않는 몸(부서진 기둥)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특히 부서진 기둥에서 사실적이면서도 자신의 몸의 한계를 그림으로 그려낸 모습은 충격적이면서도 그녀의 아픔이 확실하게 각인된다. 아픔이 있어야 예술이 나오나 보다.

 

제2부 소통법 발견하기 : 너를 만나다.

부유한 집안에서 도시의 여학교를 졸업한 열일곱 꽃다운 아가씨가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 아들 스물다섯의 화가가 인연을 맺는다. 주위의 반대가 있었지만 서로를 신뢰하며 어려운 살림을 꾸린다. 당시 화가의 수입이 거의 없고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아내의 남편을 향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거치며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았지만 약삭빠르게 살 궁리를 하기 보다는 진실된 삶을 살기로 마음 먹고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의 주제들 대부분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생활상이 대부분이다. 그런 마음은 <여인과 항아리> <세 여인> <빨래터> <할아버지와 손자> 등이다. 위작 시비도 참 많았던 <빨래터>는 뭐 그리 주제가 될 만한 것도 아닌 것을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을 담아, 무엇을 그려야 할지를 생각하며 그린 것이 후대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주인공의 변함없음, 아내의 신뢰의 깊이가 어우러져 지금의 빛을 보게 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도 흔들리지 말고 깊이 우물을 파듯 한 삽을 뜨고 또 파야 할 것 같다.

 

제3부 함께 성장하기 :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까?

세잔은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했다. 세잔은 그림을 통해 ‘사과는 이것이다’라고 규정하는 대신 ‘이것이 사과일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역사상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는 이브의 사과요, 둘째는 뉴턴의 사과요, 셋째는 세잔의 사과이다. 이렇게 사과 하나로 예술계를 정복한 그의 힘은 사과를 집중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고치고 또 고쳤다. 고친 횟수가 100회를 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과가 자라는 과정, 심지어 썩는 것까지 모두 관찰하면서 사과를 그렸다. 사과를 그만 그리라는 친구 에밀 졸라와 단절하기도 했을 정도로 사과에 대한 사랑 아니 집착은 심했다. 그 고집스러움이 결국 사과 하나로 예술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고집스런 집착이 있는가? 생각해볼 문제다.

 

제4부 가치관 완성하기 :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할까?

라이트의 과학기술을 대하는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지금 인터넷, 스마트폰시대, 더 이상 텔레비전, 가정용 전화가 필요 없는 시대를 사는 이 시대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이제 나는 고민하고 있는데 이미 산업혁명 직후 이런 고민을 그림으로 그려낸 화가가 있었다. 라이트의 <태양계의에 대해 강의하는 철학자>가 대표작인데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퇼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와 구도가 비슷하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가장 밝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건 인간이었지만 라이트는 그 자리에 기계를 가져다 놓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고, 어른들 두 명은 회의적인 인상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그림 <새를 대상으로 한 공기 펌프 실험>은 당시 찰스 다윈에 의해 1765년 설립된 루나 소사이어티, 즉 시인, 신학자, 발명가, 철학자 등이 모여 한 달에 한 번씩 보름달이 뜬 날 밤에 집회를 열어 과학 실험을 했던 장명을 그린 것이다. 새를 유리병에 넣고 공기를 빼서 보이지 않는 공기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새를 죽이는 것을 보고 아이 둘이 슬픔에 잠기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모습을 그려내서 과학문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요즘 세상은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은 그 회전목마에 올라타고 같이 돌아가고 있다. 옛날 놀이기구는 회전목마, 천천히 돌아 아이들도 다 탈 수 있는 그런 놀이기구가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회전목마의 회전 속도가 너무나 빨리 돌고 있다. 사람들은 그 목마에 타고 개구리가 미지근한 물에서 적응하다가 삶아지듯, 사람들이 회전속도에 적응해내기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경험치 못한 것들, 즉 자살 사이트, 묻지마 범죄, 이혼과 딩크족,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 등이 과학 문명에서 오는 부정적 결과일 것이다. 과학문명 발달에 대한 진실된 질문을 할 때인 것 같다. 좋은 책으로 나이가 든 나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져주어 저자에게 감사한다. 내가 아는 그림과 조각을 잘 하는 아이가 이 책을 보고 좋은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적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의 기쁨 - 기쁨의 주권자와 동행하라
존 파이퍼 지음, 이상준 옮김 / 두란노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현재 미국에 부는 바람은 상당히 고무적인 것 같다. 번영의 신학이 잦아들고, 복음의 신학이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복음 중심의 신학의 원동력이 바로 존 파이퍼 목사님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현재 미국의 영성을 주도하는 목사님으로 알고 있는 존경받는 목사님의 책을 읽게 되어 기쁘다. 파이퍼 목사님의 주제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을 기뻐함, 하나님 안에서 기뻐함 등이다. 특히 미국이나, 한국 등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누리면서도 번영해야 한다는 신학이 여전한 흥미를 끄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끝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번영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적 갈급함이 결국 복음으로 돌아오게 된 것 같다. 너무나 감사하고 잘된 일이라 생각한다. 파이퍼 목사님의 하나님의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저자는 먼저 선포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은 당신이 하나님으로 인해 최고의 만족을 누릴 때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에 대한 만족이 무한대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대해 무한한 기쁨을 갖고 계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보다는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아니 둘 다 만족할 수 있지만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면 모든 환경과 조건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서를 바꾸면 결국 어떤 조건에서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헨리 스카우걸 목사님의 “인간 영혼 안에 숨 쉬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주제를 시작하고 있다. 그 내용에는 “인간의 영혼은 ... 그 안에 꺼질 줄 모르고 불타오르는 갈증을 안고 산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그것을 자신을 지으신 분에게 내어 드리지 않고서는 어떤 영혼도 진정한 기쁨과 본질적인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나의 경험도 내 속에 알 수 없는 너무나 큰 갈망이 있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산기도, 금식기도, 작정기도 등 수도 없이 기도했다. 산에 올라가 원숭이처럼 나무에 매달려 은혜를 달라고 부르짖기도 했다. 그 갈망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갈증, 오직 하나님만이 해소 할 수 있는 갈급함이었다. 내 안에 그 갈급함이 있으니 너무나 감사하다.

 

하나님의 기쁨은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기쁨이 되시기에 합당한 것은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만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다양한 탁월성의 놀라운 조화’를 이루신 분이시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특성들이 참으로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높이와 무한한 겸손이 만나고, 정의와 은혜가 만나고, 위엄과 온유가 만나고, 선의 극치와 악으로 고통당하는 중에도 보이신 인내가 만나고, 순종의 위대한 정신과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최고 통치권이 만나고, 절대적인 주권과 완벽한 포기가 만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잠10:1절에 보면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듯 우리도 자녀들을 보고 기뻐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잘 따를 때 기뻐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버지의 무한한 행복은 그 아들의 기쁨 안에 존재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최초의 위대한 기쁨은 그 아들을 기뻐하시는 기쁨이다.

 

하나님은 아들 뿐 아니라 선하신 기쁨으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넘치는 만족으로 창조 세계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성이 알려지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찬양할 민족을 기쁨으로 선택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아들에게 지우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기쁨으로 모든 것을 보시고, 이루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전 종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데 디모데형 선교사는 많지만 바울형 선교사는 적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즉 교회가 있는 곳에 있는 성도들을 관리하는 데는 열중하는데 바울처럼 미전도 종족에게 가거나 불신자를 전도하는 목회자가 드물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이사야53:9절에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끝까지 죄인들과 함께 하셨다. 지도자는 내려갈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못 박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변에는 목회하다가, 선교 하다가, 어려운 이웃을 돕다가 파산의 지경에 이른 목사님이 많으시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신 분들이다. 진정한 사랑의 목자다. 누가 그들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성공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신 분들이다. 내가 잘 아는 목사님도 그런분이 계신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듯이 좋은 길로 인도함 받을 것을 믿는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문단이 어딘가요? 롬3:23-26절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 삼으셨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셨으니 비난받아 마땅한가? 이 방법을 택한 것은 불경건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방법이었다. 삼위 하나님이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내주는 고통을 당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고통을 당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죄인이 죄악 속에 있는 것을 바라보시고, 죄의 수렁에서 이끄시는 일을 감당하시는 고통을 당하셨다. 삼위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감당하심이 우리를 살리게 된 것이다. 우리를 기뻐하시기 위해 성부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내어 던지는 아픈 기쁨을 택하신 것이다. 마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수술실에 들여보내는 아버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기뻐하신다.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할 때 기뻐하신다. 또한 우리가 순종과 정의를 실천할 때 기뻐하신다. 이 책의 요점은 스바냐 3장 12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만물보다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고 그분 자신의 완전함이라는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끝없이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특별식을 만들 때 주방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신다. 하나님이 특별히 만족스런 음식을 찾으실 때는, 응답할 기도를 찾으신다. 우리의 기도는 부엌에서 왕의 침실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하나님이 시장하셔서 식사를 하고 싶으시게 만든다. 향기를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먹고 싶은 마음처럼 응답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식사를 즐기시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분의 영화로운 일이다. 즉, 하나님의 음식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기쁨에 대한 그분의 식성을 만족시키는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하나님 안에는 채워야 하는 결핍이 전혀 없으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백성의 결핍을 채우심으로 자신의 영광의 부요함을 높이시고, 그렇게 자신의 만족을 얻으신다.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대접하고` 싶은가? 기도라는 빈 잔을 들고 나아가, 하나님이 그것을 채우심으로 그분의 영광의 부요하심을 보일 수 있도록 하라. 얼마나 멋진 분이신가? 이렇게 주기를 좋아 하시는 분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하나님! 지금 이 시간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나도 하나님을 닮아 누구든지, 뭘 원하든지, 바라는 것을 마음껏 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줄 수 있는 복을 주옵소서!

 

은혜는 용서가 아니라 능력이다. 은혜는 단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베풀어지는 관용이 아니다. 은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혜는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능력이다. 성경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여기서 은혜를 자신의 사역을 감당케 한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은혜 받고 그 때부터 순종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아니라 은혜의 지속, 계속되는 은혜 아래 거하면 순종이 나타나고, 순종이 이뤄지면 능력은 저절로 나타난다. 은혜를 용서 받은 것만으로 축소시키고 은혜 받은 이후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은혜는 떠나고 은혜가 능력이 되지 못한다. 은혜는 용서와 순종과 능력으로 죽 이어가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성공이 무엇일까? 소요리문답 1조 1항에는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의 성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왜 이런 답이 나왔을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승리의 삶과 행복의 비결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고, 하나님 또한 의지함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모든 상황과 사건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로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결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건강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서 치료하신다. 치료하심을 선포하며 기도의 향기를 올려드린다. 흠향하시고, 고치시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내가 간증하겠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금융시대 - 개인 투자와 세계경제의 흐름을 바꿀 금융의 미래
로버트 쉴러 지음, 조윤정 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 나라는 1997년 IMF구제 금융을 받는 경제적 치명타를 입었다. 그 때 수많은 노숙자, 가정 파탄 등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각 가정들이 겼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뼈를 깍는 고통을 견뎌내며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잘 이겨냈다. 더군다나 경제적 타격의 주범인 미국의 금융회사들의 오너들은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다는 말에 분노하기도 했다. 그에 따른 미국 월가에서는 매일 시위가 끊이질 않는다고 들었다. 따라서 금융의 문외한인 나도 금융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금융기관과 단절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알고 보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도 직감하게 된다.

 

금융에 농작물이나 일용품의 가격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상품의 교환가격은 주식이나 채권 시장의 가격과 거의 동일하다. 보리와 쌀 교환가격은 주식이나 채권 시장의 가격과 거의 동일하다. 보리와 쌀 시장이 금융시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저소득 인구 계층이 이런 식품시장 가격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금융기관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금융기관을 좀 더 올바르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 개인의 일상에서의 금융과 연관성을 보면 은행에서 돈을 찾고, 체크 카드를 쓰고, 지인에게 송금을 하고, 현찰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조차 금융이다. 현찰이라는 것도 돈이라는 가치를 금융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금융과 뗄 수도 없고, 같이 살자니 부정적 이미지를 지닌 것이 금융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경제의 최 말단인 나의 딜레마이며, 저자 예일대학의 경제학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30년간 예일대에서 경제를 가르친 사람과 공통 주제이다. 세계적인 석학의 해결 방안은 무엇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금융과는 절대로 뗄 수 없는 현대인들의 삶이라면 금융에서 답을 찾아야 되는 게 또한 현실이다. 따라서 금융에 대한 긍정적인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잘못된 금융상품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궁지로 몬 몇몇 사기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 사태의 원인을 단지 몇몇 이기적인 자들의 탐욕으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금융시장을 만들기 위해서 금융의 민주화가 필요다. 문제는 근본적 원인인 시스템 개선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결국 핵심을 놓치고 발전의 기회도 잃게 될 것이다. 금융체제가 비록 불완전하다고 해도 저자는 금융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분명 중대한 화두가 되리라고 믿고 있다. 몇몇 금융의 흉들 때문에 규제와 억제책을 쓰고 있지만 금융개혁을 억제하기 보다는 풀어주어야 금융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금융에 대한 적대감은 금융발전을 저해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금융위기가 온전히 사람들의 탐욕스런 부정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금융기관의 근본적인 구조적 부실 때문이다. 부동산 위기를 관리하는 데 실패하고 레버리지 규제에 실패한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 기관들이 실패한 영역을 직시하고 개혁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떻게든 구제 금융을 피하고 정부지출을 삭감하여 국가 채무를 줄이는 쪽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일반 대중의 분노에 호응하여 정치인들이 내놓은 정책들은 장기적 비전이 아니라 당장 문제로 보이는 것들을 해결하는 방향으로만 추진되었다. 따라서 제대로만 대책을 세우고 금융정책을 펴나간다면 금융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다. 금융은 분명 그럴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지혜를 모으면 금융은 희망이다.

 

고독한 시인도 예술을 위해서는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기본 생활비가 필요하고, 출판사와 인쇄소가 필요하며, 시 낭송회를 기획하는 사람들과 이를 위한 적당한 장소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다 금융이다. 우리 모두 꿈꾸는 미래의 금융은 첫 번째, 점점 더 다양화하는 사회계층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고 전체 경제에도 더 잘 결합하는 금융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혁신을 통해서 조금씩 더 완벽해진 금융기관과 금융수단들의 수혜 대상들을 넓히고, 사회적 불평등으로 향하는 트렌드를 바꾸어야 한다. 두 번째 목표를 위해서는 인간들의 특성과 변덕을 고려한 금융기관과 금융상품을 설계해야 한다. 그러자면 금융 팀에 심지학자들도 채용하고, 지난 몇십 년 동안 탄생하고 발전한 행동경제학과 형태재무학도 활용해야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젊은 예술가, 철학자, 시인들이 꿈꿀 만한 세계가 아닐지 모르지만,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금융을 통해서든 아니든 스스로 노력해서 재산을 모으는 행위는 결코 죄가 아니다. 사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일부는 이런 행위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인식으로부터 금융을 시작해야 건강한 금융이 만들어질 수 있다.

 

포브스의 미국 400대 부자들을 보면, 모두가 억만장자인 그들 대부분이 실제로 금융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명단 가운데 세명, 오프라 윈프리, 도널드 트럼프, 스티븐 스필버그는 경영자와 연예인으로서 이중생활을 영위하는 덕분에 두 군데 즉 400대 부호와 100대 명사에 오를 수 있었다. 금융은 그 자체로 유명 인사로 가는 길이 되지 못한다. 400대 부호 명단에 저명한 과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노벨상 수상자 역시 찾아 볼 수 없다. 금융은 강력한 도구다. 자본을 조성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들의 조화를 이끌고 그들에게 동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는 단순히 그들의 노력과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대개 많은 유능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효율적인 조직을 형성하고 이끄는 그들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는 부가 집중되는 것이다. 부가 집중되는 것을 가능하면 제한할 수 있으면 금융의 역할을 건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미국 금융회사의 권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는 전혀 취해지지 않았고, 가까운 미래에도 그런 조치는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 집중을 막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자본 소유의 분산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 일은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 결과가 이익을 가져다주고 생산성을 저해하지 않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금융과 정보기술의 새로운 발전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혁신이 필요하다. 에인절의 거대한 환상과 비슷하게 오늘날에는 기업들이 정말로 공격적이고 사악한 행동을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믿음이 팽배해있다. 이런 믿음은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재계에 대한 분노를 낳을 것이고, 따라서 기업의 바람직한 역할이 방해를 받을 것이다. 아울러 미래 세계의 번영은 속도가 둔화되는 위협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재산을 모으는데 지나치게 열심일 경우에는 존경을 사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는 대부분의 부자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고 예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는 자존감을 높여주고, 어느 한계 내에서는 성취감도 주고, 더 낳은 교육을 제공해 주고, 먹고사는 일에서 벗어나 삶의 목표에 헌신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다. 그러나 부는 전체적인 심리적 안녕과 행복을 주지도 못하고, 더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루도록 그들이나 그들의 자식에게 동기를 부여하지도 못한다. 에인절이 파악한 환상은 하나의 관념이었고, 그 관념은 불신을 퍼뜨려 결국 두 차례 세계대전을 야기했다. 사람들이 경제 세계에서 무자비하게 부를 쫓는다는 관념에는 비슷한 위험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 역시 불신을 퍼뜨리고, 이에 따라 건설적인 경제 활동의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금융계의 사람들은 고객이나 주주를 위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어떤 도덕적 의무 아래 놓여 있다. 그렇다고 해도 고객이나 주주로부터 허락받은 내에서 그런 의무를 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금융계의 사람들은 돈밖에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금융에 흥미를 가진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규제기관 쪽으로 간다. 거기서는 큰돈을 벌 일이 없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규제기관의 일자리를 더 좋아하여 큰돈을 벌 가능성도 없이 금융계에 종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금융에서 흥미를 발견하고 금융이 돈 외에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반사회적 금융수단을 통해 얻은 부로부터 커다란 행복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막대한 재산으로 할 수 있는 정말로 만족할만한 일은 기부 외에는 거의 없다. 근사한 저책을 많이 보유한다고 해서 본질적인 만족을 얻지는 못한다. 부자이면서 나눔에도 인색하다면 그는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될 뿐 아니라 납치나 강탈에 대한 두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이기적이라는 자책감과 사회적 고립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금융이 적절하게 설계되고 민주화된다면, 카스트적 평형 상태를 해체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진정으로 민주적인 금융은 사람들을 추방자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금융자본주의는 여전히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경제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공정하기를 원하지만 예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전혀 없는 사회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금융의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면 금융계약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금융의 민주화에는 금융의 인간화가 함께해야 한다. 그 정도로 금융의 인간화는 중요하다. 금융의 인간화는 바로 자선의 욕구다. 올바른 사회 환경에서는 부자들이 많은 재산을 건설적으로 기부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금융자본주의는 기부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때에만 완전히 타당할 수 있다.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고 인간적 가치를 강화하기 위한 열쇠는 인간의 동기와 욕구의 다양성을 고려한 민주적 금융시스템을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하는데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동기부여적인 거래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시스템, 우리의 공격성과 권력욕에 배출구를 제공해주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은 불가피한 인간의 충동을 통제 가능하고 평화로우며 건설적인 경기장 내로 들어오게 할 것이다. 열쇠는 인간, 그 중에서도 도덕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인간이 금융을 해야 금융의 민주화가 완성된다고 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금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금융에 소망을 걸어보게 되었다. 금융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니, 어떻게 해서든 금융을 주무르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져야 한다. 결국 도덕의 문제로 귀결이 된다. 이 책에서도 금융의 민주화를 주창하지만 실제로 금융을 쥔 것은 결국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들 것인가는 해결방안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방향이 그런 것을 주장하기 위해 쓴 것도 아니기도 하다. 법이나, 규제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의사가 되어 투철한 의사로서의 사명을 잃지 않을 때 의술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지만 사명을 잃은 의술은 돈 버는 기술에 불과할 것이다. 금융이 의술보다는 훨씬 속물적 냄새가 나지만 도덕적이고 건강한 사고를 가진 금융가가 돈을 주무른다면 의사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 살리는 기적의 도구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금융의 적극적 사용과 기회로 볼 것을 제안하며 이 서평을 마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