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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일기 - 머무름, 기다림, 비움
아르투로 파올리 지음, 최현식 옮김 / 보누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몇 년전 안식월을 1달 반 가진 적이 있다. 3주 동안 아무 것도 아니하고,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이 지냈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걷고, 천천히 생각하고, 아무 것도 아니하는 일(?)을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을 하니 그 때부터 뭔가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깊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의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었다. 지난 날의 일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보였다. 자연히 깊이 묵상이 되고, 글이 써지고, 시도 나왔다. 깊은 사색이 되고, 고독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때로는 사람이 그리웠지만 그런대로 깊고 잔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심신이 쉬니 활력을 얻을 수 있었고 안식월 후에 일들은 잘 풀리고, 건강도 회복 되었다. 아무 것도 안함의 능력이었다.
사막일기, 사막에서 쓰는 일기라 관심이 갔다. 사막에서는 무엇을 느끼는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뭘 보고, 뭘 생각하게 될까? 저자는 600키로를 낙타와 함께 안내자를 동반하여 걸었다고 한다. 군대 근무 시절에 1박2일에 걸쳐 100키로 행군을 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사막에서 600키로라 생사를 건 행군이라 생각된다. 이 행군과 사막의 수도원에서 느낀 점들을 주옥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인이 사막에 갖힌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갖히고 본인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자유를 들여다 보자.
비움은 기억 없음이다. 이것은 공간과 시간의 비움을 말한다. 여기엔 우리가 내면을 응시하고 심연 속에 그저 내맡기는 일만이 남는다. ‘한 처음’에 혼돈, 비움이 있었다. 두려움은 비움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표시이다. 참을성도 없고, 이해심도 없는 사람들은 이 중요한 통찰을 얼른 내팽개쳐버리고, 비움을 우리 인간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출발점으로 삼기를 거부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여기서 말하는 비움을 가지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사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비움이라 생각이 든다.
“신앙생활에서 죽음의 가장 큰 결실은 자유다. 고린도후서3:17절에 주님은 영이시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 비움은 조금씩 자유의 빛깔을 얻는다. 사막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dlg은 채 몇 년 동안 혹독한 수형 생활을 하는데 갑자기 어떤 이가 문을 열고는 삶을 찾아 나가라고 했다. 그 때 비로소 지식 나부랭이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였다. 물론 몇 년 뒤에 도로 덧씌워졌지만 말이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삶이 진정한 살아 있는 삶이다. 이것이 자유의 삶, ‘너희가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리라’의 성취된 삶이다.
“사막에서 받은 소중한 선물인 자유를 결코 잃어본 적이 없다고 믿는다. 비록 노예 같은 삶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이를 고수 한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노예 생활은 고되지만 확실함을 준다. 말하자면 당신에게 영혼을 달라는 대신 안정을 준다. 영혼을 팔라고 하루에 일흔 번 꼬임 받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람은 확실함과 안정성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지금 영혼을 팔아 안정을 누리고, 세상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 시간의 노예, 상황의 노예, 물질의 노예, 언제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겠는가? 단 하루의 자유를 누리는데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속박하는가? 아내에게 안식을 하라고 했다. 집, 아이들, 교회를 두고 어디를 가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걱정 말라고 하는데도 걱정이 된다고 한다. 자유의 경험이 없으니 주어도 누리기 힘은 우리의 길들여진 삶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
“사막은 이런 말로 나를 일깨웠다. ”자 친구, 얼굴을 들고 웃어보게, 머리에 기름도 좀 바르고, 주위를 둘러봐,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네. 오늘 사막 한가운데서 자넬 위해 준비한 이 꽃 앞에 시바의 여왕도 검불 하나에 지나지 않아“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음에도 힘든 줄 몰랐다.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게 되었을 때 더는 겸손을 찾을 필요도 없었고 자신에게 솔직한 걸로 충분했다.“ 사막에서 발견한 한 꽃의 아름다움, 그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의 아름다움,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보시지 않을까?
“우리의 기도학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하는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규정된 프로그램들을 소심하게 준수할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또 그룹을 세련되고 획일화하는 힘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틀을 잘 유지할 수 있는 개인만을 양산하는 데 힘을 쏟는다. 하지만 이는 위험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랑에 관한 모든 선언들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예수를 조금씩 알아가고 그 분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뵈옵는 데로가 아니라 완고해지려고만 하는 구조들을 경직시킬뿐이고, 구조 밖에서 이루어지기도 하는 주님의 현존과 활동을 알아차리도록 돕지 못할 것이다.” 기도의 형식이 기도에 도움이 되지만 기도에 방해도 될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기도는 형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자유로운 교제이다.
제일 나쁜 태도는 그분께 자신을 완전히 맡기지 않는 것이었다.
사하라 사막 위에 난 길을 천천히 걷는 동안 더욱 힘써 ‘덕행들’을 갈고닦으리라는 어떤 웅변같은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즉 “내게는 모두가 똑같다. 부자건 가난하건, 중국인이건 남미인이건, 백인이건 흑인이건”, “나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으로 족하다.” “내겐 사람들과의 끝이 나쁠수 있지만, 하나님아고는 늘 좋아.” 우정이 친교일진대,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 정말 자신만의 것을 내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사막에서 저절로 알아지는 깨달음이었다. 사막의 유익함이다. 사막이 아니더라도, 홀로 있음, 고독, 단절 속에서 얻는 유익함이다. 한 번쯤 경험해 볼만하다.
사막에서 얻은 교훈, 사막에서 몇 년씩 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막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봄은 어떤가? 깊은 시골에서 몇 주, 몇 개월을 지내보는 것이다. 깊은 시골이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조금은 한적한 곳에서 지금 있던 곳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단절해 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구속 속에서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수많은 깨달음을 줄 것이다. 비움을 경험케 할 것이다. 자유아닌 자유를 줄 것이다. 진정한 삶을 제공할 것이다. 언제나 제대로 살 수 있을 때가 올 것인가? 불쌍한 현대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