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더 크게 말씀해주세요 -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방법
스티브 슐츠 지음, 이용복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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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직이든 30년이 지나면 화석화 된다고 한다. 한국 교회는 벌써 30년이 네 번이나 지났다. 그 전에 너무 좋았던 기존의 틀을 고수하는 중이다. 그래서 좋은 면도 많지만 고정관념으로 장로의 전통이 된 것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 들려주심에 대한 견해이다. 음성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음성을 듣는다는 의미를 받아 들일수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저자는 100년이 넘는 전통 교회를 다녔다. 신앙 훈련을 위해 CCC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우연히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에 눈이 꽂혔다.

(사 30: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그 외에도 수도 없이 하나님은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 어느 교단의 여전도사님이 무슨 문제만 생기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대로 이뤄지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음성 듣는다는 게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너무나 확증적으로 말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며,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이로움과 생각이 너무 많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음성 듣는다는 말에 대한 신뢰가 더 많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말씀이 주님의 음성으로 말씀하심에 대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 신약을 막론하고, 선지자든, 제자이들 대상에 상관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부인하는 것도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음성을 들음을 꼭 소리로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느낌, 생각 등의 모든 감각을 통해 인도하심을 말한다. 또한 성경 읽을 때, 암송한 구절을 통해, 기도 중에, 지인의 대화를 통해 다양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말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말씀하시고 계신 것인가? 우리가 어떤 느낌으로 누구에게 전화를 하거나, 만나게 되는 경우 이런 것들이 바로 주님의 음성 들려주심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들리지 않은 게 아니라 듣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심을 우리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며 잘 들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더 잘 들으려면 장애물을 치워야 한다. 1)내가 모르는 깊은 상처들, 2)내가 움직여야 일이 될 거라는 착각, 3)하나님은 너무 바쁘셔서 내 일상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오해, 4)내가 선해야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편견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너무나 확실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오감, 인성 등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 모든 감각을 다 무시하고 오직 기록된 성경으로만 말씀하신다는 것은 지나친 협의적 해석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도구는 물론 성경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가지고, 또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때에 따라 맞게 말씀하심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묵상하고, 읽고, 암송하고, 늘 소지하고 다니면서 인도함을 받는 방법은 너무나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말씀을 기초로 해서 때에 따라 느낌과 꿈과 감정과 실제적으로 들려지는 음성까지도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된다면 얼마나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의 방향이 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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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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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엄청난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상상조차 힘든 정도다. 아직 실물을 보지는 못했지만 3D 프린터가 나왔다고 한다. 실물을 복사해서 만들어 낸다니 까무러칠 일이다. 앞으로는 100세시대를 넘어 늙지 않는 시대를 산다고 한다. 이젠 장기를 복제로 만들어 사람이 계속 재생되는 세상, 인간복제 장난감을 만든다고 한다. 사실 끔직하다고 할 정도다. 이런 세상을 미리 점치고 예상하여 살아가는 삶을 엮은이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다. 천재 작가다. 어찌 이런 예상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베르나르의 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무에서는 많은 서프라이즈를 경험한다. 재미있다 못해 혼란스럽다. 두렵기까지 하지만 결코 상상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욕망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단의 유혹에 망설임 없이 선악과 먹는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재미로 읽으면서 또한 미래를 예측, 대비해 본다.

 

첫 이야기부터 충격이다. 집에 들어와 온갖 가전품들이 이야기를 건다. 주인을 걱정하여 음식을 만들고, 차를 끓이고, 그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챙긴다. 혼자 있고 싶어 집에 갔는데 온갖 것들이 귀찮게 함으로 홀로 카페에 왔는데 거기서도 그를 괴롭힌다. 아니 그를 위한다고 하는 것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지 않은가? 홀로 있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인간이 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좀 생각하며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세상을 결코 인간을 그렇게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연예인들은 기획사에 묶여 자기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니다. 팬들의 것, 기획사의 것이다. 결국 내 몸을 위해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꼭 연예인만 그런가. 평범한 셀러리맨 역시 다를 바 없다. 돈을 벌어 편하게 살고, 누리기 위해 쉴틈 없이 직장에 나가야 하고, 잠만 자고 다시 직장으로 내몰려야 한다. 그렇게 수십년 일을 하다가 병들고, 약해지면 가차없이 버려진다. 그러면 뭔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병들고, 버림받고 죽을 날을 보내게 된다. 최근 조선일보에 늙어 병들어 병석에서 10년 지내다 죽는다는 타이틀로 1면 기사를 실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내가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황혼의 반란 편도 아주 재미있었다. 노인들의 반란, 버려진 노인들이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다 하여 그들이 반란군을 형성하여 정부군과 대치한다. 노인들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자식들을 위해 헌신한 고마움의 대상도 아니다. 수명이 길어진 관계로 은퇴 후 40년을 사는 그들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요즘은 실버산업이 대세다. 아니 병석산업이 대세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수입을 위해 죽을 권리도 없게 만드는 세상이다. 편안한 죽음을 왜 허락하지 않는가?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부모로 남길 권리를 왜 주지 않는가? 발달된 의술이 왜 인간을 오히려 구속하는가? 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가? 모든 세상은 수익구조로 돌아가고 있다. 수익을 위해서는 뭐든 서슴치 않는다. 병도 만들고 약도 만든다. 왜 그렇게 현대는 정신병자들이 많은가? 만들어 낸 병이 아닌가? 왜 그렇게 먹거리는 많은가? 먹지 않아도 될 먹거리는 왜 그렇게 TV 광고에 등장하는가? 왜 밤 늦게 고지방의 음식을 먹고 또 먹게 만드는가? 그래서 생긴 비만을 위해 휘트니스센타는 곳곳에 등장하는가? 그 많은 돈을 찍어내서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팔기 위해 늦은 밤까지 일하고, 일하다 배고프면 배가 터지도록 먹고, 먹은 것이 과식이 되어 비만을 해결하기 위해 등산에, 헬스에, 각종 스포츠를 만든다. 거기에 옷을 비싼 값에 만들어 팔고, 찍어낸 돈과 파괴한 지구의 자원으로 옷을 만들고 먹을 것을 싸들고, 마구 산과 물을 파손하면서 산에 오른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하는 기본적인 일들이다. 이런 일을 누가 꾸몄는가?

 

베르나르의 마지막 장 ‘어린 신들의 학교’ 편에 끝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하는 일은 참 재밌다. 하지만 너 혹시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니? 어딘가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신들이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마치 우리가 인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듯이 말이야> 까닭은 확실치 않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완전히 혼란에 빠져 버렸다. 내가 어떤 우월한 존재들의 장난감이라니! 그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내가 자유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어떤 존재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라니! 왝, 나는 구토를 하고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 이튿날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비슈누에게 말했다. <그건 불가능해, 신들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신들의 웃음이었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하는 듯싶다.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지, 그러나 왜 그런 골치 아픈 생각을 해, 그냥 우리 인간이 신들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되지. 그러면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인데. 이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어디까지 발전하는 것이 진정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돈을 찍어내서 행복해졌는가? 말하는 기계를 만들어서 행복해졌는가? 참다운 인간다움을 찾고 있는가?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머리가 아프다고 인간의 참 모습 회복의 길을 접는다면 천재 작가로서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여 더 발전하라. 그리고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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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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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운다는 일은 흥미롭다. 역사를 교과서로 배우는 것과 1차문서로 보는 것은 그 재미가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런면에서 징비록은 이순신을 알게 되는 재미, 일본 침략을 아는 깨달음,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과 기강의 무너짐 등을 알게 되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징비록은 그 부제로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이라 한다. 참으로 실감이 난다.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그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미래를 열고 대비할 수 있겠는가? 유성룡이 삭탈관직을 당하고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짐으로 후대에는 큰 유익이 된 것 같다. 사마천의 사기도 사마천이 역적이 되어 감옥에서 쓴 기록들이 지금껏 역사의 찬란한 기록으로 남았듯이 말이다. 또한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어 수많은 기록을 남김으로 그의 학문, 역사, 당시의 정치적 상황 등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나도 개인적으로 3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기회를 가짐으로 기록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여유와 기록, 쉼과 남김을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같다.

 

징비록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당시 조선의 상태가 이토록 기강이 해이할 수 있을까 싶다. 100년의 태평성대가 부른 결과라 생각된다. 지금 남북의 대치국면은 결코 불평만 할 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군사도, 군비도, 장수도, 명석한 정치 지도자도, 탁월한 리더십의 왕도 없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음을 실감한다. 어찌 원균같은 간신배가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국녹을 먹고 있는 신하들이 하나같이 쓸모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제대로 된 장수, 전투의 기본조차 없는 장수들이 수두룩 했다는 것에 한탄할 뿐이다. 나름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일본이 쳐들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지도자들은 이런 정도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일본의 모습이다. 조선의 사신을 불러 놓고 바자마 바람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와 오줌을 치우고, 한 번 돌리면 끝날 술을 내오고, 한 점 먹고 나면 없을 떡을 내오는 일본의 오만함을 어찌 수치스러워 읽기도 불편했다. 지금도 여전히 일본은 그런 나라다. 1945년 항복문서에는 어디에서 항복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은 항복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멈추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고이즈미, 아베 등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인데 우리만 흥분하고 있는 겪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준비, 또 준비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순신 같은 장수, 유비무환의 교훈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일본이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셋째, 이순신의 발견이다. 왜 이순신 이순신 했는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오직 나라를 염려하고, 자신의 한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킨 장수 중에 장수다. 어선 10척으로 적 100의 함선을 당당하게 물리치는 전쟁의 신 이순신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이순신이 전사했을 때 온 국민이 통곡했다고 한다. 사당을 지어 참배하도록 했을 때 신하들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 보면 이순신이 외친 것은 ‘생즉사 사즉생’이라 한다. 김훈은 말한다. 살기 위해 죽었다고. 만약 이순신이 살았다면 이순신은 죽었을 것이다. 살아서 영웅이 되었다면 그를 시기하는 반대 세력은 반드시 그를 역적으로 몰았을 것이고 기록은 결국 역적 이순신이 남았을 것이다. 결코 소설은 아니라 생각된다. 이런 한국의 정치 풍토는 언제나 개선될 것인지 우리는 진중하고도 참담한 심정으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정치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나라를 진정 생각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정치인, 군인들이 나와야 하며, 그 뜻을 잘 펼칠 수 있는 지략이 뛰어난 장수와 정치인들이 정.관계에 등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잘 되지 않으면 징비록에 수도 없이 나오는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죽은 일, 배고파서 사람을 잡아먹는 고통, 일본의 칼과 총에 쓰러진 무고한 수많은 백성들의 죽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국 정치란, 군사란 한 백성의 평안을 위한 것이 아닌가? 백성의 평안을 위하지 않은 정치, 군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역시 동북아 정세는 구한말과 유사하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의 기싸움, 그 사이에 낀 대한민국의 국운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중간에 남북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남북의 지도자의 현명한 선택,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을 넘어, 중국을 뒤로하는 세계로 뻣는 대한민국을 꿈꾸는 정치,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되면 좋겠다. 이런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좋은 책, 역사를 반성하는 징비록이 있어 천만다행이다. 공과를 뒤로하고 기록 자체로 후손에게 큰 교훈을 남겨준 유성룡 선조에게 감사를 드린다. 좋은 번역으로 도움을 준 김홍식님에게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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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중심의 교회 - 그 교회에 가고 싶다!
매트 챈들러 외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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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떠도는 말이 있다. 가나안 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나안 거꾸로 하면 안나가 교인이란 뜻이다. 교회에 나가시를 싫어한단다. 왜? 교회가 매력이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말이나, 세상이 하는 말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들리는 말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계발서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많이 반성한다. 그렇다면 가고 싶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어떤 말이 나오는 교회에 가고 싶어 할까? 매트 챈들러는 예수님, 복음을 말하는 교회를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참 다행이다. 참 고맙다. 성도들이 아직은 깨어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론에 이런 말이 나온다. 체이스 목사가 사역 팀과 머리를 맞대고 개발한 설교 시리즈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가슴에 확 와 닿는 제목, 공들여 제작한 동영상, 다양한 홍보 전략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정말이지 생동감 넘치는 하루였다. 하지만 사역을 마치고 집 주차장에 도착한 체이스 목사는 하염없이 공허함이 밀려온다. 설교 시리즈도 갈수록 열기가 떨어진다. 늘 새로움을 찾아다니는 철새 교인들이 쫙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가슴이 답답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조작과 과대광고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하나? 목회 성공은 여전히 주일 출석 숫자다. 전국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성공한 교회인데 이해할 수 없는 허무함은 뭐란 말인가? 이 느낌은 누구랄 것도 없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직감이다. 우리 교회와 목회자들에게는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 ‘회복’이다. ‘첫 사랑’이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복음, 복음’ 말로만 하는 복음과 실제적으로 누리는 복음과의 차이는 천지 차다. 개인이 만족과 성화를 위해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돌아가야 하듯 교회도 끊임없이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중심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그분이 완성하신 일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배 형식이나 설교 내용에 상관없이 죽음과 공허함만 가즉 찬다. 복음이 빠진 교회는 빈 쭉정이처럼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다.

 

최근 미국에서는 복음에 관한 사상과 저술, 설교의 붐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마이클 호튼, 트레빈 왁스, J. D. 그리어, 튤리안 차비진, 그레그 길버트를 필두로 수많은 이들이 복음을 주제로 책을 펴내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번영신학적 기류가 지배했던 것이다. 미묘한 차이라 느끼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크게 복음에서 벗어난 흐름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복음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버텨온 교회와 학자들에게 공을 돌린다. 이제 복음이란 단어조차도 광범위하고, 세속에 물든 모습으로 들려지기에 예수님이란 단어를 쓰게 되었다.

 

교회가 예수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는 교만함만 가득차고, 변화가 없는 가짜 공동체일 뿐이다. 예수님이 완성하신 일이 아닌 다른 것, 예를 들어 경제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 음악 취향, 공통된 인생 경험 같은 것 위에 공동체를 세우면 그것이 차별의 원인이 된다.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 자랑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 열등감을 느낀다. 롬12:9-13절에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의 교훈을 찾아보자. 첫째, 가면을 벗으라. 요즘 소그룹이나, 교회에 가면 옷을 새것으로 갈아 입고 단장을 하고 가듯 가면들을 가면 무도회장 입장을 위한 필수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가면이 교회를 죽인다. 심지어 가면을 벗으면 나중에 자신을 비난하는 말이 돌고 결국 그 교회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고 까지 한다. 그래서 목사님들까지도 가면을 벗기기는커녕 쓰라고 한다. 적절한 고백의 수위를 지혜롭게 할 필요는 있지만 아예 가면을 쓰는 것은 진정한 교제와 주님의 치유를 막을 뿐이다. 둘째, 죄인은 품고, 죄에는 맞서 싸우라. 교회가 세상의 풍조를 은혜라는 빌미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안된다. 그러나 어떤 죄인이라도 품어내는 바다와 같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섬기되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해서는 안 된다. 즉 ‘보답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본 강자는 생존하고, 약자는 도태된다는 인식에 따라 약자를 연민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직 복음에 뿌리를 내린 연민만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죄책감에서 섬기기도 한다. 즉 자신은 과소비 하면서 하나님께 죄송해 사면서 미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강압’에 못 이겨 섬긴다. 즉 봉사활동의 시간을 채우는 식이다. 어떤 이들은 ‘교만’ 때문에 남을 섬긴다. 도덕적이 우위를 과시하기 위한 섬김은 안 된다. 언제나 목적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야말로 섬김의 목적이며 시작이다. 예수님 안에서 비롯하고, 그분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한다.

 

예수님 중심이 된 교회는 우리가 지향해야할 진정한 교회다. 현대는 다양한 구성원 공동체로 존재한다. 지연 학연, 지역의 특성, 사회적 지위가 맞는 사람들끼리의 공동체 등이다. 이런 공동체는 우리 주님이 어떻게 보실까?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정죄. 심지어 십자가에 형틀에 매이면서까지 죄인, 세리를 찾아 나서신 주님의 교회를 바라보는 눈은 어떠실까? 또한 다양한 목적 공동체이다. 구제, 찬양, 젊은이, 인재 양성 등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님이 꼭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청소년, 청년들에게 매력이 있는 교회를 외치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노력이 마지막 예수님을 그 중심에 심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교회가 바로 예수 중심 교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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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홀리데이 (2013~2014년판, 휴대용 맵북) 최고의 휴가를 위한 여행 파우치 홀리데이 시리즈 3
이동미 지음 / 꿈의지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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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국 요리를 좋아한다. 우리 아이가 외국에서 생활할 때 값싸고 맛있는 음식은 태국음식이 최고라고 한다. 얼마전 지인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식당에서 점심을 태국 음식을 먹고 더욱 더 반했다. 시내라 그런지 값은 좀 비쌌다. 태국하면 수도인 방콕일 것이다. 태국은 푸켓과 치앙마이는 가 보았지만 방콕은 아직이다. 여행을 해보니 패키지로 여러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것은 매력이 점점 떨어진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내와 가족과 함께만 해 보기로 계획해 본다. 저자가 말했듯이 매력이 있는 도시, 좋아 하는 도시 두 번째로 꼽을 정도로 가 볼만한 도시란다. 태국의 중심으로 들어가 보자.

 

태국은 동남아시아의 선두주자다. 미얀마나 인근 나라들이 아주 부러워하는 나라다. 다양한 관광지와 과일들을 개량하여 먹는이들로 하여금 행복감을 더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두리안을 먹을 때는 속에 씨가 많고 내용물은 적어서 사실 먹을 게 별로 없는 과일이었다. 그러나 태국의 두리안은 씨는 적고, 내용물이 꽉 채워져 있어 아주 만족하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푸켓에 갔을 때도 유럽인들이 한 두 달씩 휴양차 와서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자연 경관, 날씨, 기타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른 휴양지도 이렇게 잘 갖추어져 있으니 태국의 수도 방콕은 어떠하겠으랴. 정말 가고 싶다.

 

지난 번 발리에 대한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여행 안내지로 손색이 없다. 다양고 수준급인 사진들과 매끄럽게 소개해 놓은 글들이다. 특히 사진은 정말 가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로 만들기에 충분한 매력을 담아내고 있다. 중간 중간 지도와 교통편, 다양하게 즐길 거리 등은 혼자만의 생각으로가 아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거리 등을 소개해 주어서 좋다. 여행은 아무 때나 가는 것이 아닌 것으로 안다. 특히 계절, 음식, 축제 등이 중요한데 자세하게 축제 등을 소개해 놓아서 때를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방콕에 가고 싶다고 해서 내 일정에 맞추기 보다는 방콕을 가려면 언제 가는 게 좋은지를 생각하고 내 일정을 잘 맞추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팁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좋아 하는 뒷골목 음식, 시장 등을 잘 소개해 주었다. 여행은 뭐니뭐니해도 사람들과의 만남이라 생각한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맞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뒷골목의 시장, 음식, 그들과의 만남의 장은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리라 생각된다. 내 아내는 모든 여성들이 좋아하는 쇼핑을 좋아 하는데 산 가격에 알찬 쇼핑을 할 수 있는 장소까지 잘 나와 있어 아내도 좋아 하는 것 같다. 152쪽의 열대과일 사전은 내가 좋아 하는 과일이 다 나와 있다. 열대지방의 여행의 맛은 과일이 그 1/3은 차지하는 것 같다. 각 과일마다 제일 많이 나는 시즌까지 소개되어 잘 맞추어야겠다. 특히 망고스틴을 좋아 하는데 4-6월이라 하니 여행의 비수기이기도 하니 망고스틴 마음껏 먹으러 방콕으로~~~

 

여행을 더 멋지게 하는 방법은 미리 알아두는 것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다. 방콕은 이 책 하나면 다 될 것 같다. 책이 작아 휴대하기도 간편할 것 같다. 각 지역에 지도를 중심으로 유명한 장소가 잘 안내 되어 있어 한 곳 한 곳 섭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으로 멋진 구혼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배려해 준다면 간단한 태국어로 물건을 사고, 길을 물을 수 있는 언어 쬐금만 안내해 준다면 의외로 알찬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좋은 책, 발로 뛰어서 만든 책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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