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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중심의 교회 - 그 교회에 가고 싶다!
매트 챈들러 외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요즘 떠도는 말이 있다. 가나안 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나안 거꾸로 하면 안나가 교인이란 뜻이다. 교회에 나가시를 싫어한단다. 왜? 교회가 매력이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말이나, 세상이 하는 말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들리는 말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계발서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많이 반성한다. 그렇다면 가고 싶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어떤 말이 나오는 교회에 가고 싶어 할까? 매트 챈들러는 예수님, 복음을 말하는 교회를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참 다행이다. 참 고맙다. 성도들이 아직은 깨어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론에 이런 말이 나온다. 체이스 목사가 사역 팀과 머리를 맞대고 개발한 설교 시리즈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가슴에 확 와 닿는 제목, 공들여 제작한 동영상, 다양한 홍보 전략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정말이지 생동감 넘치는 하루였다. 하지만 사역을 마치고 집 주차장에 도착한 체이스 목사는 하염없이 공허함이 밀려온다. 설교 시리즈도 갈수록 열기가 떨어진다. 늘 새로움을 찾아다니는 철새 교인들이 쫙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가슴이 답답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조작과 과대광고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하나? 목회 성공은 여전히 주일 출석 숫자다. 전국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성공한 교회인데 이해할 수 없는 허무함은 뭐란 말인가? 이 느낌은 누구랄 것도 없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직감이다. 우리 교회와 목회자들에게는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 ‘회복’이다. ‘첫 사랑’이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복음, 복음’ 말로만 하는 복음과 실제적으로 누리는 복음과의 차이는 천지 차다. 개인이 만족과 성화를 위해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돌아가야 하듯 교회도 끊임없이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중심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그분이 완성하신 일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배 형식이나 설교 내용에 상관없이 죽음과 공허함만 가즉 찬다. 복음이 빠진 교회는 빈 쭉정이처럼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다.
최근 미국에서는 복음에 관한 사상과 저술, 설교의 붐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마이클 호튼, 트레빈 왁스, J. D. 그리어, 튤리안 차비진, 그레그 길버트를 필두로 수많은 이들이 복음을 주제로 책을 펴내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번영신학적 기류가 지배했던 것이다. 미묘한 차이라 느끼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크게 복음에서 벗어난 흐름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복음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버텨온 교회와 학자들에게 공을 돌린다. 이제 복음이란 단어조차도 광범위하고, 세속에 물든 모습으로 들려지기에 예수님이란 단어를 쓰게 되었다.
교회가 예수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는 교만함만 가득차고, 변화가 없는 가짜 공동체일 뿐이다. 예수님이 완성하신 일이 아닌 다른 것, 예를 들어 경제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 음악 취향, 공통된 인생 경험 같은 것 위에 공동체를 세우면 그것이 차별의 원인이 된다.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 자랑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 열등감을 느낀다. 롬12:9-13절에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의 교훈을 찾아보자. 첫째, 가면을 벗으라. 요즘 소그룹이나, 교회에 가면 옷을 새것으로 갈아 입고 단장을 하고 가듯 가면들을 가면 무도회장 입장을 위한 필수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가면이 교회를 죽인다. 심지어 가면을 벗으면 나중에 자신을 비난하는 말이 돌고 결국 그 교회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고 까지 한다. 그래서 목사님들까지도 가면을 벗기기는커녕 쓰라고 한다. 적절한 고백의 수위를 지혜롭게 할 필요는 있지만 아예 가면을 쓰는 것은 진정한 교제와 주님의 치유를 막을 뿐이다. 둘째, 죄인은 품고, 죄에는 맞서 싸우라. 교회가 세상의 풍조를 은혜라는 빌미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안된다. 그러나 어떤 죄인이라도 품어내는 바다와 같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섬기되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해서는 안 된다. 즉 ‘보답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본 강자는 생존하고, 약자는 도태된다는 인식에 따라 약자를 연민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직 복음에 뿌리를 내린 연민만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죄책감에서 섬기기도 한다. 즉 자신은 과소비 하면서 하나님께 죄송해 사면서 미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강압’에 못 이겨 섬긴다. 즉 봉사활동의 시간을 채우는 식이다. 어떤 이들은 ‘교만’ 때문에 남을 섬긴다. 도덕적이 우위를 과시하기 위한 섬김은 안 된다. 언제나 목적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야말로 섬김의 목적이며 시작이다. 예수님 안에서 비롯하고, 그분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한다.
예수님 중심이 된 교회는 우리가 지향해야할 진정한 교회다. 현대는 다양한 구성원 공동체로 존재한다. 지연 학연, 지역의 특성, 사회적 지위가 맞는 사람들끼리의 공동체 등이다. 이런 공동체는 우리 주님이 어떻게 보실까?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정죄. 심지어 십자가에 형틀에 매이면서까지 죄인, 세리를 찾아 나서신 주님의 교회를 바라보는 눈은 어떠실까? 또한 다양한 목적 공동체이다. 구제, 찬양, 젊은이, 인재 양성 등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님이 꼭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청소년, 청년들에게 매력이 있는 교회를 외치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노력이 마지막 예수님을 그 중심에 심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교회가 바로 예수 중심 교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