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1
조승연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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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식 주례를 일 년에 몇 차례 하는 편이다. 결혼의 의미를 신랑의 호칭, 신랑 신부 위치, 신부의 의상 등에서 찾아 설명하여준다. 신랑 신부 혹은 하객들도 아주 좋아 한다. 그 의미를 몇 가지 설명해보자.

 

결혼식에서 신랑의 상징은 백마와 칼이다. 칼을 차고 말을 탄 신랑은 용감하게 신부를 지키라는 의미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보호해야. 성경에 주님이 성도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고. 죽도록 사랑해야. 흔히들 남자를 백마 탄 기사라고. 하필이면 백마 탄 기사인가? 멋있어서인가? 아니다. 부자라서 그런가? 아니다. 빠른 말을 타고 와서 아내를 구해주는 기사라는 의미에서 백마 탄 기사다.

왜 신랑이 결혼식 때 왼쪽에 서는가? 신부를 빼앗아 가려고 할 때 왼 쪽에 찬칼을 빼서 아내를 목숨을 걸고 지키기 위해서다.

 

어른들은 남편의 호칭으로우리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남존여비에 의해, 혹은 잘못된 전통에 의해 나온 호칭이 아니다. 존경해서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분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남편을 위해 불러주는 게 아니라 아내를 위해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아내들이 스스로 아내들을 위한 ‘주인’이란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이 아내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결혼식에 신부가 면사포를 안 쓰는 경우는 없다. 다른 것은 생략해도 면사포는 절대로 생략하지 않는다. 머리 위에 쓰는 모자나, 수건 등의 것들은 모두 자신 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표시다. 신부가 면사포를 머리 위에 쓰는 것은 나는 남편 아래 있어 순종하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순종하며 것이라는 약속의 표시다. 신부는 이미 면사포를 썼기 때문에 약속한 것이. 따라서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성도가 주님께 하듯하라고. 나 사랑해주고, 나를 위해 목숨을 사람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자신과 가정을 위해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남편을 존경하고, 힘들 위로하고, 뜻을 따르는 아내가 남편은 더욱 기가 살아 출세할 것이고, 가정은 평안해 것이다.

신부의 웨딩드레스는 오직 흰색이다. 웨딩드레스를 칼라로 하는 경우는 없다. 칼라 웨딩드레스는 결혼식이 아니다. 신부가 아니다. 흰 색은 정결과 기쁨이다. 신부는 정결이 생명이다. 결혼은 앞으로 정결하겠다는 약속이다.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소하는 약속이다. 흰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고 다른 남자를 품는 것은 결혼을 깬 것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하고 장동건을 더 좋아 하면 불법이다. 외도다.

흰 색은 기쁨이다. 아내는 남편의 기쁨조가 되어야 한다. 아내가 기쁨이 되지 못하면 아내가 아니다. 음식으로, 웃음으로, 몸매로, 말로, 사랑으로, 섬김으로, 깨끗한 옷으로 기쁨조가 되어야 한다. 이게 흰 옷을 입고 결혼하는 의미이다.

 

이 책에도 보면 ‘사랑과 전쟁’이란 말이 있다. 지금의 의미와 조금은 다르지만 과거는 사랑은 곧 전쟁이었다. ‘약혼’을 뜻하는 단어 ‘engagement'는 전쟁의 ’교전‘을 뜻하기도 한다. 중세의 유럽은 결혼이란 살벌한 비즈니스였다. 혼기가 찬 아들을 준 집안이 딸이 있는 집안과 혼사를 맺고 싶으면 남자쪽 집안 친인척의 남자들이 모여 도끼와 방패로 무장하고 여자 집으로 가서 모조건 딸을 달라고 횡포를 부리는데 이것은 그냥 ’협상하자‘는 뜻이다. 합의가 이루어지면 결혼 지참금(여자는 딸에게 물려줄 유산에 대한 선금, 남자는 여자를 키우는데 들어간 돈 권리금, 며느리를 통해 태어날 아기 낳는 임대료, 아이들의 양육비 등을 선금으로 내야 했는데 이 액수가 합의가 이루어지면 결혼이 성사된다. 계약금이 프랑스어로 ’gage'였기 때문에 ‘서로 계약금을 지불했으니 약속된 사이다’라고 해서 약혼, 즉 약속된 사이를 ‘engaged'라 했다. 이 계약이 서로 지켜지지 않으면 비극으로 결말나는 경우도 많았다. 전쟁도 한 번 칼을 뽑거나 총이 발사되면 사람의 의지와 상관 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engage'는 ‘전쟁이나 전투에 임한다’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또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도 임금, 즉 ‘wage'를 주는 대신 그 사람에게 계속 일을 시키겠다고 약속을 한다는 의미에서 ’고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약혼을 하는 것과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과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모두 같은 단어라니, 기혼자들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뭔가 큰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일 것이다. 남편을 뜻하는 단어 ’husband'를 보자 ‘house'는 잘 알다시피 ’집‘을 뜻하고, ’band'는 ‘묶는다’는 뜻이다. 영국에서 집이 없는 남자에게는 결혼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이 남편이란 뜻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노예에게 발찌를 채웠는데, 이는 밤에 몰래 도망가지 못하도록 쇠사슬을 걸기 우함이었다. 결혼반지도 같은 원리였다. 로마인들은 네 번째 손에 가락에 ‘마음의 핏줄’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다가 조그마한 무쇠로 된 일종의 반지를 채워 놓으면 여자의 마음을 평생 구속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결혼반지에 열쇠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족쇄였다. ‘결혼반지’란 뜻의 ‘wedding band'의 ’band'가 ‘집에 묶였다’라는 뜻의 ‘husband'의 ’band'와 같다는 것을 눈여겨보기를 바란다. 더 심한 것은 ‘wife'가 독일어로 그냥 ’여자‘를 뜻하는 ’Weib'과 같은 어원이라는 것이다. 즉 ‘wife'란 뜻은 ’내 소유의 여자‘라는 뜻이다.

 

기타 수많은 단어들의 유래들이 아주 흥미진진하다. 그 의미를 찾아보니 씁쓸한 것들도 너무 많다. ‘슬로바키아’인들이 야만적이어서 노예로 잡아다 쓰다보니 ‘노예’라는 단어가 슬라브인들의 의미하는 단어인 'slave'가 되었다니 슬라부인들의 수치이기도 하다. 하기사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조센진’이라 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 또한 일본인들을 ‘쪽바리’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국력이 강한 나라들의 언어가 남는다는 의미에서 ‘slave'가 남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도 ’조센진‘이 남지 않고 ’쪽발이‘가 남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우리가 더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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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명에서 단 한명으로
벤 피트릭.스콧 브라운 지음, 정지현 옮김 / 콘텐츠케이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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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인기의 시대다. 남들로부터 인기를 잃으면 다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 드는 시대다. 그래서 학교에서 왕따가 큰 문제가 된다. 사실 옛날에는 스스로 왕따를 자처했고, 삶이 왕따의 삶이었다. 그래서 사색도 많이하고, 그래서 생각도 깊었다. 소설가 박완서님은 초등학교때 왕따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왕따가 자신을 생각하고, 소설의 영감을 주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왕따를 즐기니 남들이 좋아 하는 때가 왔다고 한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의 조명을 받다가 그 관심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힘든일일 것이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인기가 사라진 후에 후유증이 아주 심각하게 온다. 심지어 지금 인기를 누려도 혹시 언제 인기가 떨어질까를 생각하며 불안해 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수만명의 관중들로부터 발수갈채를 받다가 파킨슨 병으로 집에 돌아가야 했고, 수많은 관중들은 다 사라진 그것도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는 아픔을 겪는 삶이었다. 그런 중에 그는 그 외로움을 가족을 통하여 이겨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겨내고 있다.

 

파킨슨 병을 앓을 확률은 4만명 중에 한 명꼴이란다. 파킨슨 병은 호르몬 도파민의 생성에 이상이 옴으로 근육 등에 심각한 질병을 유발하는 질병이다. 저자 벤 피크릭은 아버지도 파킨슨, 자신도 파킨슨 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18세부터 장래가 총망되는 메이저리거다. 홈런타자. 도루왕, 송구왕, 겸손과 인격까지 갖춘 그야말로 손색이 없는 그런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불치병 파킨슨 병이 온 것이다. 저자는 이 질병을 해결함에 있어서 가족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풀고 있다. 4만명 중의 하나꼴이 걸리는 파킨슨 병을 앓는 그가 4만명의 관중의 관심을 받다가 사랑하는 딸 하나에게 사랑을 받고, 그 딸 하나를 위한 삶을 살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에서 많은 감동을 준다. 벤 피트릭은 자신의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데 있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한 아내와 딸로 충분했다. 딸에게 사랑과 딸을 사랑함으로 기쁨이 넘쳤고, 행복했다. 질병으로 인한 약물 과다 복용, 그로 인한 혼수상태, 근육 마비 등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잘 견뎌내고 있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는다. 사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데는 수만명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 아내, 자녀, 부모로 충분하다. 현대인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치유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내 가족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내 주변의 한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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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당김의 힘 - 사람과 세상을 움직이는
존 하겔 3세 & 존 실리 브라운 & 랭 데이비슨 지음, 이현주 옮김 / 프런티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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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첫째, 양반 상놈이 없는 계급사회가 아니다. 둘째, 대부분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이다. 셋째, 기본적인 경제력이 향상되었다. 기초적으로 누리는 것들이 거의 모든 것이다. 즉 명품이냐, 짝퉁이냐의 차이지 컴퓨터, 스마트폰을 다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인터넷 등을 통해 정보 공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특정한 계층만이 취득할 수 있는 정보 혹은 교육 기회가 오픈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이동이 용이해진 것이다. 여행, 유학, 경험 등을 누구든지 관심을 갖고 준비만 하면 할 수 있는 시대다. 여섯째, 메스컴, 신문, TV, 인터넷 등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기회를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정보가 아닌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일곱째, 교육 균등의 시대다. 대부분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수동적 형태의 현상이라 하면, 교육기회 균등은 능동적 환경의 변화라 볼 수 있다. 이런 변화들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조직과 체제 속에 살고 있다.

 

일례로 나의 딸이 대기업에 다니는데 집에 오면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은 하면 늘 하는 일이 서류 만들고 정리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상사나, 선배들이 하는 일에 보조역할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푸시’ 체제인 것이다. 윗선에서 정책을 정하고 아래 사람들은 그 정책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수행자일 뿐이다. 그러나 과거의 아랫것들이 제대로 모르고 능력도 부족하다면 당연히 그러해야겠지만 지금은 신학문을 외국에서 유학까지 해서 배운 것들을 그저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다루는데 쓴다면 얼마나 큰 손실인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잘 사용하는 것들을 보면서 외국에서 공부한 티가 나는구나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런 자원들을 충분히 활용하는 ‘풀’방식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현대의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푸시’ 시스템에서는 서열상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봉상하거나 처벌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과 더불어 계층이 존재한다. 아랫사람이 도구로 취급받는다. 프로그램 참여자들에게 지루함과 스트레스를 안긴다. 미리 정해진 반복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타고난 호기심과 개성을 숨겨야 한다. 창의적 본능을 억누른다. ‘푸시’ 철학은 1)사람들에게 돌아갈 몫이 충분하지 않다. 상대가 얻으면 나는 잃는다. 2)엘리트 집단이 결정을 내린다. 3)조직은 계층적이어야 한다. 4)사람들은 정해진 틀에 맞춰 살아야 한다. 5)클수록 좋다. 6)수요는 예측할 수 있다. 7)자원은 중앙에서 배분할 수 있다. 8)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푸시’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심해지는 성과에 대한 압박과 시달리던 개인과 기업들은 그 시대의 새로운 인프라스트럭처가 지닌 역량을 받아들여 그 기술로 일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푸시’ 사고방식과 관행은, 축적된 지식이 중요하고 지식의 흐름은 기껏해야 지엽적인 의미를 갖던 세상에 단단히 매여 있다. 우리는 매우 다른 사고방식과 지식의 흐름을 중요한 기회로 취급하고, 축적된 지식은 유용한 부산물이자 핵심적인 실행자로 취급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전환해야 한다. 기업의 전략적 이익은, 높은 가치의 지식 흐름에 참여하여 어떤 실천 방법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좌우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지식에 단순히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새로운 지식이 없다면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단계까지 성과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젠 직원들이 주변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직원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확대하여 풍요롭게 해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과거는 중심의 임원들이 변화를 주도했다면 이젠 주변부가 중심부를 변화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 중심부에서 주변부의 아이디어가 도달하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직접 주변부에 가서 그 아이디어를 찾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질문이 주는 의미가 내가 ‘풀’ 철학으로 바뀌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같다.

* 지역과 상관없이, 당신과 열정이나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 중에 가장 성공했거나 가장 똑똑한 살마 50명을 찾아낼 수 있는가?

* 이 사람들 중에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당신의 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

* 이 사람들 중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열정이나 관심사와 관련된 당신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몇 명인가?

* 이 사람들 중에 당신이 편안한 마음으로 연락하고, 서로 공유하는 열정이나 관심사와 관련된 새롱누 계획에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

* 이 50명의 활동을 잘 알 수 있도록 당신은 소셜 미디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가?

나를 돌아 보았다. 알고 있는 사람도 극히 적었고, 활동도 3-4가지에 불과하고, 함께 공유하거나 열정적으로 하는 경우는 2-3곳밖에는 없었다. 적극적으로 분발해야겠다.

 

변화를 촉진하는 세 가지 요소는 궤도, 레버리지, 속도이며,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의 세 단계는 접근, 끌어당김, 성취이다. 한 가지씩 설명하는 것으로 ‘풀’ 방식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1)궤도: 어떤 발전이 중요한지 구별하지 못하거나 우선순위를 매기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열심히는 하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거나, 방향성이 맞지 않은 것들인 경우라 실패를 맛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유행성 음식점을 뒷북치는 경우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2)레버지리: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야 할 필요는 없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데, 비교적 적은 비용을 들여 그렇게 할 수 있다. 모든 참여자가 자신의 잠재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 관계로 발전한다. 경쟁 압력이 거세지는 시기에는 이 레버리지가 유연성을 좊여주고 더 적은 투자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3)속도: 주위의 모든 것이 가속화된 속도로 변하고 있을 때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도와준다.

 

변화를 일으키는 단계를 보면

1)접근: 인적 자원, 정보, 네트워크를 말한다. 이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유익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나며, 여러 분야의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느슨한 관계를 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루트를 통한 정보를 늘 수집해야 한다.

2)끌어당김: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나 인적 네트워크를 나에게로 끌어 당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열정을 함께 해야 한다. 그들에게 접근하고, 도와주고, 보상을 해 주면서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이런 자원들을 한 군데로 모아야 한다. 응집시키고 분출할 준비를 해야 한다.

3)성취: 모은 정보, 인적 자원을 한 군데로 끌어 당겨 놓았다면 이젠 실행에 옮겨야 한다. 뭔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분출구를 찾고 그 방향을 향하여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나의 경우는 독서를 궤도로 삼았다면 내가 같이 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섬기면서 함께 동참하도록 열정을 나눠야 한다. 다른 독서모임도 네트워크를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이 인적 자원 및 독서 정보 및 노하우가 잘 정리되어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런 ‘풀’ 방식이 개인, 기관, 사회까지 이어질 수 있다. 개인에서 기관, 사회는 그 대상만 확대해 나가면 된다. 방식은 비슷하다. 이미 애플, 구글 등에서는 이 ‘풀’ 방식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는 네이버가 성공적 사례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일반인들의 지식과 정보, 관심을 한군데 모은 것 뿐인데 결과는 메가톤급이었다. ‘푸시’에서 ‘풀’로 전환한 한 가지 때문에 결과는 하늘과 땅이다. 지금 네이버와 다음의 비교급이다.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많은 세미나에 참석하자. 많은 모임에 가입하여 활동하자.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섬기자. 여행을 많이 하며 다양한 것을 보고, 경험하자. 영어를 더 공부해서 외국인들도 많이 만나자.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자. 언젠가는 터질 것이다. 메가톤급으로 세상을 섬기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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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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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도, 남들이 하지 않는 모험은 천재들만이 하는 짓이다. 천재가 뭐 다를 게 있는가? 남들이 하지 않는 짓을 하는 이들이 천재가 아닌가? 몇 년 전 작가 신경숙씨가 <엄마를 부탁해>에서 어렵게 느껴졌지만 새로운 시도로 더 텍스트를 빛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냥 잘 쓰는 글과 새로운 것을 가미한 글을 음식으로 하면 데코레이션을 멋들어지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역사소설, 쉽지 않은 장르인 것 같다. 글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고, 그 시대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당신의 분위기에 젖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역사 소설과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잘 엮는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디어와 탁월한 위트가 필요한 것 같다. 역사적 인물을 현대로 가져와 등장 시킨다는 발상을 어떻게 했을까? 몇몇 시간 여행을 해 현대의 인물이 과거로 가는 경우는 있지만 현대로 오고, 과거의 한 인물이 아닌 여러 인물임을 가상한다는 것은 정말로 탁월함이 엿보인다.

 

제목부터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홍도’ 섬을 말하나, ‘홍도야 우지마라’의 홍도를 말하나, 아니면 붉은 복숭아 홍도를 말하나, 먼저 궁금증을 유발하는 효과를 본 것 같다. 그러나 정작 홍도의 의미가 당나라 시인 설도의 자인 홍로를 따서 시도 잘 짓고 도가의 도인이 되어 세상을 두루 살피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으면 좋다는 생각에 지었다는 이름 ‘홍도’ 그러니 제목이 더욱 빛난다. ‘홍도’ 자칫 기구한 운명으로 전락한 주인공을 가시덤불 속의 장미로 만들어내고 있다. 홍도가 겪는 아픔들이 곳곳에 등장하나 아픔 보다는 그 아픔을 이겨내는 당당함, 주변의 지인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늘 행복 모드로 살아간 인생이란 느낌이 든다. 현대의 각가지 어려움 속에 사는 우리네 모습의 단상 속에서 ‘홍도’같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아니 내가 마치 홍도가 된 기분으로 들뜨는 마음까지 들게 한다. 과거의 인물 묘사는 물론, 현대의 동현과 대화하는 중에 ‘홍도’는 실제 인물로 만나고 싶을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홍도가 아버지의 역적으로 몰려 태형에 처하고, ‘홍도’란 이름을 지어준 죽도 할아버지 또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만다. 당시 광해군의 폭정에 간신배들의 마녀사냥에 몰려 몰사하지만 정여립이란 인물을 통해 그가 목숨을 버려 희생함으로 나라를 진정 구할 수 있었음을 말한다. 즉 대동회를 구성해 활동하다 박해가 오자 ‘필생금대동’(必生琴大同), 즉 대동을 반드시 해체하라. 구국을 위해 모인 대동을 왜 해체하란 말인가?

 

“자치기가 들고 나타났다던 편지는 죽음을 각오하고 대동계를 지키라는 반어법이 아니라 뜻 그대로였다. 반드시 대동계를 금하고 탄압하라! 이중플레이였다. 한쪽에서는 대동을 널리 가르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대동을 탄압하지만 그들은 결국 모두가 같은 대동계원들! 본래 백성이란 하지 말라하면 할수록 기를 쓰며 하겠다고 덤벼드는 게 백성들이니까! 대동계의 해산과 정여립이 내린 편지는, 백성들로 하여금 들불처럼 일어나게 만드는, 반란과 반역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혁명을 꿈꾸던 정여립의 카운터펀치였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민중의 기저로부터의 변화, 그래서 모든 민중이 다 대동계원이 될 때까지 민중 속에서 혁명을 일으키라는 것이다. 전 민중이 대동계원이 되게 하라!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실 대동계원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들 민초들의 변화 없이는 혁명을 없다. 결국 기득 세력들의 저항과 깨우쳐지지 않은 민중들의 부화뇌동이 뒤범벅이 되면 떼어낼 수도 없는 새로운 문제거리만 만들 뿐인 것이다. 그래서 정여립 등의 생각이 깬 대동계원들은 민초로부터의 변화, 혁명을 꿈꾸며, 더디지만 확실한 신세계를 추구했던 것이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양새로는 확실히 성취되지 않았는가? 정여립, 자신의 대에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지면 아래 에너지를 모으고 모아 메가톤급 지진을 일으키듯 확실한 민중의 시대를 연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방안, 처신의 큰 틀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어도 죽지 않는 정신, 살아도 살지 않은 사상, 죽어서 살아난 신념이지 않을까? 이것을 작가는 예수님의 희생과 제자들이 배출로 이어가고 있다. 그런 개념들이 결국 홍도라는 인물이 한 인물로 끝나지 않고, 홍도-미가륵-정주-이영과 김한빈-백다록-얀 얀센 꼬르버-김동현(자치기)로 이어지는 계보가 두 사람을 이어 지금의 민초들의 신세계를 만들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남녀의 사랑과 관심의 감정, 역사의 아픔과 고통을 돌아보는 계기, 민주화를 통하 신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 등을 모두 담고 있다. 구구절절마다 긴장감도 있고, 현대의 홍도와 동현의 대화 속의 유머까지 멀티 감각을 엿보게 되었다. 혼불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라 인정된다. 김대현 작가의 대성이 기대된다. 좋은 작품을 읽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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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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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 여류 소설가를 대표하는 작가 공지영이 새 작품을 냈다. 이번엔 천주교 사제 이야기다. 아니 신앙이야기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깊이를 쓰고 있다. 사랑의 종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성간의 사랑은 어떻게 맺어져야 하는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간의 간극은 어떻게 매울 것인가? 매우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자 후기에도 말했듯이 한국의 성인, 한국에서 성자로서 한국을 사랑한 사제들의 사랑을 실고 있다. 깊이 있는 삶, 희생적인 삶을 향해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요즘들어 가볍고, 혼란스럽고, 자극적인 글이 쏟아지는 이 때에 참 된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심연의 세계를 여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수사 요한, 정요한이 겪는 일들로 엮어 가고 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다니고, 수도원에 입교하여 수련을 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 동료 수사 미카엘과 안젤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미카엘은 무단으로 정의 구현을 위해 시위 현장에 뛰어드는 현실 세계의 정의를 부르짖다 경찰에 연행되어 무단 이탈이 발각되어 아빠스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징계 중에도 가난하고 억압받는 아이들을 야학에서 가르쳤다. 이 일을 돕기 위해 차량 운전을 해 준 안젤로와 새벽에 돌아오는 길에 음주운전 트럭에 의해 사고를 당함으로 둘이 꼭 껴안고 불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을 당한 정요한 수사는 아빠스님의 조카인 소희와 사랑에 빠져 사제의 길과 한 여인을 사랑하는 길 둘 중에 갈등하던 중 그래도 용기를 내어 소희를 사랑하기로 한다. 그러나 소희는 나이 많은 미국에 사는 약혼자와 떠나게 되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주님으로부터 “그녀를 사랑하라, 그녀에게로 가라”는 음성을 분명 들었는데 왜 그녀를 떠나게 하시는지 주님께 불만을 토로 한다. 그러나 결국 떠나는 소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 보내고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사제의 길을 무기력하게 걷게 된다.

 

정요한 수사의 할머니, 자신을 어려서부터 키워준 할머니로부터 6.25의 아픔을 겪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할머니가 사랑한 남자는 공산주의자, 그러나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중공군의 침략으로 후퇴를 하던 중 배에 올라야 하는 순간에 다른 사람들을 배에 올리고 결국 자신은 배를 타지 못한다. 그 후 그는 죽고 배는 기적적으로 정원을 엄청난 숫자로 초과하고서도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하게 된다. 나중에 그 배의 선장이 과학적으로 아무 대책이 없음에도 무조건 다 태우라는 명령에 차고 넘칠 정도로 싣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항구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 희생의 마음 속에 임신 중인 할머니로부터 정요한 수사의 아버지가 태어나고, 그 희생 정신을 통해 정요한이 살아 갈 수있게 된다. 결국 할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희생시켜 자신이 생명을 얻고, 배의 선장 또한 배가 다 침몰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릎쓰고 희생함으로 정요한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런 희생으로 자신이 생명을 얻고 지금껏 살아 왔다는 사실을 몰랐던 정요한 수사는 결국 소희를 떠나보내고 사랑의 희생의 길을 걷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은 정요한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명을 얻는 사람으로서 보답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면서 소희의 삼촌인 아빠스님의 설득으로 소희를 미국으로 떠나보내게 된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결국 이렇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소희를 사랑한 것이 당시에는 최선이고, 최고의 길이라 생각했지만 더 나은 길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지상에서 떠난 사람의 자취는 그가 남긴 사물에서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된다. 죽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살아 있었으면 그저 그렇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을 평범하고 시시한 한 사람의 생이 죽어서야 모든 이의 삶 속에 선명해지는 것. 아마 대표적인 이가 예수였겠지. 죽은 몸이 벌떡 일어나지 않아도 그것이 어쩌면 부활이 아닌까”

“당신의 남편은 그 아이 둘을 사다리로 올려 보내려 했습니다. 안 된다고 내가 소리쳤죠. 나는 거칠게 사다리를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 때 나는 보았죠. 어린 계집아이 둘이 사다리 끝에 대롱거리면서 매달려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을요. 그리고 당신의 남편이 그 두 계집아이 대신 부두에 남겨져 서 있는 것을요. 배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후였어요.”

“사랑이란 .... 요한, .....사랑이란 모든 보답 없는 것에 대한 사람이다!”

“그녀를 통해 나는 지옥은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독재자들이 왜 마지막에 착란으로 가는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아아, 선악과는 그래서 반드시 낙원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만일 선악과가 없었다면, 신성한 금기가 없었다면 그건 이미 지옥이리라. 그래서 그 금기가 범해진 이후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 살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내쫓으신 게 아니었다. 그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성스러운 금기가 없어진 그곳은 순식간에 낙원이 아니었을 테니까.”

 

정요한은 꿈을 미카엘 꿈을 꾸었다. 미카엘이 갑판 아래로 떨어졌다. 정요한은 줄을 던졌다. 그런데 줄을 잡고 올라오는 대신 칼을 하나 던졌다. 그리고 말했다. “칼로 밧줄을 끊고 떨어져 내려. 떨어져 내린 사람만이 배로 올라올 수 있어”

 

현실의 사랑, 사람을 사랑함, 하나님을 사랑함의 각기 다른 것 같은 문제들을 한 곳으로 엮어주는 것 같다. 이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라고, 내려가는 사람, 갖지 않고 주는 사랑, 소유하지 않고 던지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임을 알려주고 있는 듯 하다. 높고 푸른 사다리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사다리는 내려가기 위한 사다리라고 하는 듯싶다. 나는 하나님께 가는 길이 늘 올라가는 것, 즉 사다리란 올라가는 것만으로 생각했는데, 내려가야 올라갈 수 있고, 내려 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내려가는 사랑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닐 게다. 할머니의 남편처럼, 미카엘과 안젤로처럼, 배의 선장처럼, 아빠스님처럼, 모두 모두 내려가는 사랑을 하신 성인들이다. 내려갈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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