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 병자년의 난을 겪고 나서 당쟁이 더 심해지는구나. 노론, 소론이 다 무엇이냐. 노소 대립의 근원은 열등감이 아니겠느냐. 상대가 나보다 우월하면 아니 된다는, 아니 나만 옳아야 한다는 생각인게지. 그 생각의 배후에는 비열하고 저속한 열패감이 자리 잡은 게야. 너는 그렇게 살지 마라. 파벌을 무시하란 말이다.

노론과 소론은 길에서 만나도 서로 모르는 척했으며, 노론은 소론을 모기라 불렀고 소론은 노론을 빈대라 불렀다. 옷깃도 서로 달랐는데, 노론은 옷깃을 길게 하였고 소론은 짧게 하였다.

사람들은 일변 관습이 지켜지기를 바라지만, 일변 타파되기를 원하기도 하네. 사람에게는 이두링 섞여 있지. 관습은 때로 옭아매기도 하지만 관습에 머물러 있을 때는 답답은커니와 편안하기도 하거든.

부와 명예를 좇는 것이 인생의 강물에서 빠른 흐름인지 느린 흐름인지는 각인의 관점 나름이겠지요.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라도 자족하고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높은 곳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하지요. 그렇지만 야심가들은 순복해야 할 때 하지 않고, 의무를 다해야 할 때 내던지는 경우도 많더군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귀하게여기는 것밖에 모르지요. 자신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은 때로 자신을 경멸하기도 하지 않을까요? 자기 삶이 혐오스러울 때가 오히려 가장 강렬하게 사랑하는 때가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깊은 사랑과 깊은 혐오는 결국 서로 맞닿아 있을 테니까요. 또한 이것이 음이 차면 양이 되고 양이 차면 음이 되는 (주역)의 이치가 아닌지요?

주위의 모든 것이 저에게 사랑을 전하고 있었답니다. 작은 것, 사소한 것들이 생명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온몸으로드러내고 있었지요. 물동이에 갇득찬 물이 넘치듯이 온 땅은 생명으로 넘쳐흘렀고 저는 순식간에 깨닫게 되었답니다. 인간은 이 모든 만물에 생명을 부여한 창조주의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지식이 아니라 직관으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 모든 자연은 하느님의 비밀스런 섭리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분의 아름다운 창조를 여실히 표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것은 시계와 달력만이 아니다.
매주일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의 시계가 시간이 가고 있음을, 지금이 자신의 때 임을 옐매로 보여준다.
고장이나 멈춤이 없는 자연의 시계....
그 경이로움을 보며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의 마음을, 뜻을 고민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장은 가족을 위해서 싫은 일도 하는 거야.

그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괴롭냐는 건
생계 다음의 문제지

아름다움을 머리로는 인식하면서
감정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울증의 한 가지 증상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뭣이냐....
커피를 고르고 볶고 갈고
드립을 하는 동안에 마음이 정리되고
나를 위한 외식행위를 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원두를 갈다 보니
내 마음의 모난 부분도 함께 갈리더라

커피 마실 때가 참 좋다
생각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료 이상이다
-거트르드 스타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는 로마에서, 인드레는 아가야에서, 시몬과 다대오는 페르시아에서, 도마와 나다나엘은 인도에서, 빌립은 히에라볼리,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모두들 기꺼이 천국을 위해 순교했으며, 마침내 예수 그분이 바로 진리였음을 깨달은 노령의 요한은 눈물의 참회 속에 한 복음서를 기록해놓고 눈을 감았던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 같이 걷기, 떠남이란 책의 저자이자 몽골에서 사역하신 이용규선교사님이 몽골사역을 내려놓고 인도네시아로 선교 사역지를 바꾸며,

이슬람 문화권에서 기독교 대학을 세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신 뜻과 이루어주신 사건들이 전개되어 있다

왜 잘 하고 있던 몽골을 떠나 생각지도 않았던 인도네시아로 보내셨는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곳으로, 해결해야할 것이 많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그곳으로 보내신 이유를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알게 되었단다

 

우리가 고통스러울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건 우리가 하나님께 해결해 주실것이라는 기대(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과 늘 동행하면서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내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할지라도 내 실체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내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내어드릴때 주님께서는 그 모습 그대로를 받으시고 위로해주신다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평탄한 길만을 주지 않으시고 기근과 전쟁과 여러 어려움을 주셨듯이 주님을 믿으면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믿음이 자라게 하시고 주님께 더 깊이 들어올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며 내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서 그분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지라고 한다

 

마치 아브라함이 기근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냈던 것처럼 일련의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내 약함을 보았다.

우리에게 허락된 가시를 통해 우리의 약함을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낙담에 빠져 있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도리어 그 약함을 통해 강해지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약함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러나고 드려져야 한다.

이런 실패와 약함의 노출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갖고 계시는 특별한 기대 때문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약속을 바라보다가도 어느새 환경과 내가 가진 자원을 보고 있었다. 슬그머니 하나님 대신에 다른 걸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내 노력으로 강해져서 사역과 나를 보호하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는 모든 걸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먼저 명령하신다. 그 명령에 우리가 일단 순종하고 기다리면, 왜 그 명령이 주어졌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멈추고 머물러 있게 하시는 건 우리 관심의 초점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임을 배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선물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허락하실 때 먼저 사람의 복을 주심을 믿는다.

15년이 걸렸다. 때로는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걷기를 원하신다는 깨달음이 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