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소설을 오랫만에 만났다. 글이 문장이 이렇게 정갈하고 맛갈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초나라와 단나라, 그 왕이었던 목왕과 그 아들 표, 그리고 칭왕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으로서 주연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더 큰 비중으로 신월마 토하와 비혈마 야백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말이 가지는 속성과 그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돈물이라는 스스로 사라지는 풍속이 기억에 남고 평등하고 자족적인 월 지역의 풍경이 돋보인다. 권력을 다투기보다 더욱 자연 속으로 몰입하여 가버린 목왕의 둘째 아들 연의 선택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유발 하라리의 박사논문이다. 대다수의 논문이 재미 없듯이 이 글도 그렇다. 의미를 찾아 읽어야 할 것이다. 중세 기사도정신의 끝자락을 잡고 왕정과 민족이데올로기로 넘어가는 근대에서 전사귀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현대의 회고가 자신이 체험한 전쟁에 대한 서정성을 담았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지휘관들은 명예로운 행동 곧 무훈에 집착했다. 명예가 전공에 있고 존중할 사람들이 전사일 때 민간인들은 하찮은 존재로서 취급되는 것이 기억에 남는 좋지 않은 부분이다.
김선현 미술치료사의 임상적 사례를 모은 글이다. 그림이 가지는 영향, 그 속에 담긴 화가의 의도는 현실 속에 피폐하고 곤고한 이들을 위로하고 공감한다. 또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함을 통해 자신이 닿을 미래를 가늠할 수 있도록 이끈다.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명화의 세계가 나의 암울한 자리를 새롭게 비춘다.
김이설 작가의 소설이다. 처음 한편의 글을 보고 2편으로 넘어가며 단절된 단편은 아닌가? 의아했다. 다소 좁은 범위의 글이어서 마치 비슷한 옴니버스 형식은 아닌가해서이다. 시인이 되길 지향하는 장녀의 부단하나 약하디 약한 움직임, 그런데도 간절한 바램은 정도를 가게 했다. 가장으로 객관적인 위치를 잡아주던 아버지의 말씀은 흔들림 없는 비젼이었다. 아무것도 당연하게 명확한 인생의 답은 아닌 것이 속박없이 서로를 키워주고 지켜주는 사이일 것이다. 화자의 애인과 같은 사람이 삶을 버티게 하는 큰 자양분이 아닐까한다.
이정명의 소설을 처음 보았다. 빨려들어가는 이야기의 전개와 또다른 기발함으로 연결되는 서사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1987년대와 2017년 그때와 지금을 잇는 엘렉트라의 변명이 새롭게 보인다. 또한 김기준이었던 최민석 국회의원, 최민석이라했던 연출가 이태주의 삶은 과연 참과 거짓이 어디 있는지를 묻고 있다. 삶의 질곡을 따라 공작이 만든 업보는 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어려운 이웃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