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티스데일 간호사가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수필이다.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죽음의 주체임을 그래서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해야함을 얘기한다. 장사와 기술의 발전이란 핑계보다 실은 물욕에 기반한 시스템보다 평안한 죽음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또한 섣부르게 애도의 표현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완화의료를 통해 임종에 가까이에서 고통하는 환자를 적절히 도울 수 있음도 알려주고 있다.
게랄트 휘터의 존엄에 대한 글이다. 자신의 존엄을 인식한 사람은 현혹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존엄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수단시 당한 경험이 있는자는 똑같이 주변 사람들을 대상화해 버린다. 존엄을 가르치는 교육 속에 수평적 인간관계와 자아 성찰을 거쳐 온전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공부가 필요하다.
역시 김려령의 소설은 감칠 맛이 난다. 재미있는 흐름을 타다 다시금 긴장하게 만드는 전개가 기분 좋게 한다. 정치가 진유철과 소설가 하도연의 만남, 그것도 신비한 느낌의 이스탄불 사랑의 시작은 어쩌면 편안함과 아기자기한 소풍놀음인지도 모르겠다. 정희의 등장과 마치는 글에서의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에 나오는 올렌까로 상징되는 바짝 달라붙는 삶이 진정 사랑의 심호흡을 목도리는 짓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사랑은 혼자 세워 주고 그 독자성과 연대성을 긴장감 있게 유지하는 것이다.
젊은 엄마 비베케와 아들 욘이 하룻밤새 겪었던 일을 소설로 서술하고 있다. 비베케가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청년 톰과 우연찮게 만나 데이트를 하고 욘도 집을 나와 근처 소녀와 만나고 내일이면 맞을 아홉살 생일 전야를 또다른 놀이공원 여자와 만나 그녀가 쫓는 톤을 이유없이 따라갔다. 소년의 막연한 두려움과 비베케의 제대로 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헌배해서 그려지고 있다.
김원영 변호사의 글을 처음 읽었다. 중증장애인이 자신이 당한 존재적 체험을 실격이라 표현했다. 사회는 그리고 성장했던 시간 외부적 현실은 혐오와 배제가 주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시각으로 나를 세우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변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것이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 장애를 가진 당사자도 존엄한 존재이고 한 사회 속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져야한다는 것을 세세하게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