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하라 료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작가의 데뷔작이면서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첫 번째이다. 주인공인 중년 남자 사와자키 탐정의 매력이 상당하다.
작가 하라 료는 "레이몬드 챈들러"를 좋아해 작품에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한다. 사실 일본하면 추리 소설이 떠올라 후반부의 반전을 기대한다던가, 범죄가 일어난 것의 트릭은 무엇인지에대해 생각을 하는데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그러한 방식을 따르지않는다. 사와자키는 사건을 해결하기위해, 머릿 속에 떠오르는 물음을 풀기위해 걷고 또 걷는다. 사와자키는 독자들을 외면하지않는다. 홀로 추리하지않고 홀로 생각하지않는다. 보통의 사람과도 같이 헛다리를 짚어가며 하나 둘씩 틀린 가설을 지워나가고 새로운 가설을 머릿 속에 새겨넣는다.
사실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가 내게는 왠지 어렵게 다가왔다. 책의 띠지나 출판사 홍보 문구에 '하드 보일드'라는 문구가 있으면 왠지 구매하기 꺼리기까지했다. 이렇게 딱히 찾아서 보지않은 장르라지만, 장르 소설을 읽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하라 료'라는 이름이 호기심을 자극해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과작 작가인 하라 료는 어떤 문장을 가지고,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올까. 독자의 입꼬리를 올리게 만드는 작가일까, 입꼬리를 내리게 만드는 작가일까.
일단 나부터 말하자면, '하드 보일드'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신간의 책은 평이 좋은 것은 되도록이면 읽으려고하는 편이라 하드 보일드에 속하는 책을 읽었을 수는 있으나 찾아 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젠 찾아 읽을 때가 온 것 같더라. 특히 하라 료가 좋아하는 레이먼드 챈들러를 비롯한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쫓아야겠다.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의 이름과 필립 말로는 오며가며 이미 익숙하다지만 이제사 읽으려고하는 것은 다 하라 료 덕분이다. 일본의 레이몬드 챈들러라는 문구와 서문의 번역가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것도 그러하고. 특히 책의 후반부엔 단편집을 실었는데 그 내용에 필립 말로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그게 '남자는 터프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고 부드럽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다'였던가? 그 사람의 이런 대사는 들어본 적이 있겠죠?" _p.450
"말로란 탐정 이야기를 쓴 사람 이름을 가르쳐줄 수 없겠나?"
"레이먼드 챈들러." 사에키가 대답했다.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_p.456
이런. 내 정신 좀 봐라. 하라 료의 책에대해 적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읽지도 않은 작가의 칭찬부터 하고말았다. 갈무리하자면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문장, 내용이 마음에 든 나머지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도 호기심이 생겼다고 말하면 괜찮을려나.
잘 만들어진 책이고 잘 다듬어진 문장이다. 문장은 단출하나 씹을수록 맛이 베어나오는 듯하다. 쉴 새 없이 피워대는 사와자키의 담배 연기가 눈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사와자키의 모습이 상상된다. 기다란 코트를 즐겨입고 왼 손은 주머니에 쑤셔넣곤 오른 손으로는 담배를 쥐고 뒤에있는 사람에게 담배 연기나 날리는 그의 모습이.
나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ㅡ, 나는 승부에 진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패배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나 패배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인간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_p.433
매스컴은 늘 중요한 내용을 빠뜨린다. 진실을 전달한다고 떠들지만 기껏해야 그런 정도다. _p.446
세상일 만사 돌아가는 대로 두라는 사와자키의 성격은 이상하게도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