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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으로 있어줘
고니시 마사테루 지음, 김은모 옮김 / 망고 / 2023년 9월
평점 :
고정관념, 또는 진부한 표현을 의미하는 문학용어 클리셰. 어쩌면 그것을 비틀어 깨트리는 일마저 또 다른 클리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 있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된 고니시 마사테루의 작품 “명탐정으로 있어줘”는 클리셰의 반전을 역이용하는 낯선 반전을 통해 작중 스토리에 재미를 더했다.
저자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클리셰는 일견 독자에게 범인을 유추할 수단처럼 보인다. 저자가 설정한 클리셰 범벅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혀가며 저자와의 두뇌싸움에 우위를 점할 찰나 독자는 저자가 날린 충격의 어퍼컷 한 방에 몸의 중심을 잃는다. 그러나 수많은 작품을 통해 맷집을 키운 노련한 독자들은 다시금 중심을 잡고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클리셰의 반전이라는 어퍼컷에도 끄덕없던 독자들은, 어쩌면 당신의 어퍼컷을 예상했다는 듯 코웃음을 치지만 저자는 다시 한 번 잽을 날리는 것으로 독자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일례로, 수영장의 ‘인간 소실’에서는 학생을 지도하던 선생님이 수영장 내에서 갑자기 증발해 버리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물론 저자는 수많은 클리셰를 깔아두고, 인간 소실 뒤에 살인이 숨어있음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독자는 저자가 깔아둔 클리셰를 따라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유추해내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범인이라 생각한 인물과 가짜 피해자의 공조라는 반전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한 반전을 예상한 독자들도 여럿 있으리라. 저자는 클리셰의 반전을 식상하게 여기는 일부 독자들에게 히몬야 할아버지의 대사와 편지를 보여주어 그들을 완전히 넉다운시킨다.
한편, 우리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 뒤에 내면의 상처를 지닌 쓸쓸한 탐정에 강한 연민을 느끼곤 한다. 뛰어난 지성을 소유한 히몬야 할아버지는 손녀인 가에데가 고민을 거듭하던 사건도 손쉽게 풀어낼 만큼 탐정으로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딸을 여위고 사위마저 암으로 떠나보낸 아픔을 지니고 있다. 그가 파킨슨병을 동반한 루이소체 치매에 걸려 환시와 현실의 경계를 수도 없이 옮겨 다니는 건 소중한 이들을 일찍이 떠나보낸 아픔의 크기가 상상도 못할 만큼 크게 자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쾌복을 응원하는 독자가 비단 나뿐만은 아니리라.
히몬야 할아버지의 대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그가 내뱉은 일련의 대사들은 추리소설 장르에 대한 저자의 신조를 대변하는 의도적인 장치처럼 보였다. “주어진 상황을 자기 입맛에 맞춰서 착각하면 안 된다”(p166)라는 할아버지의 대사는 독자들에게 클리셰에 너무 휘둘리지 말 것을 주문하는 말처럼 들리곤 했다. 또한 “출제자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또 하나의 정답’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p174)라는 대사를 통해 저자는 독자 스스로가 자신이 설정한 것을 넘어 스토리를 재구성해볼 것을 넌지시 권한다. 저자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아름답고 뛰어난 스토리를 독자들이 만들어낼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겠다.
리들 스토리를 클리셰처럼 활용해 마지막까지 스토리에 재미를 더해준 작품. 독자는 저자의 의도대로 마지막까지 기존의 스토리를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