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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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딘가 모르게 반응이 느리고, 빠릿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주인공 미숙.

친구들은 그녀를 '미숙아'라고 부른다. 이름에 호격조사 '아'를 붙인 상태가 아니라 어딘가 미숙해보이는 아이라는 조롱조로.

 이 만화는 미숙의 십대 시절부터 스무살이 되어 독립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성숙의 상태'라는 도달점을 상정하는 성장소설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지 않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딘가는 미숙하지 않은가.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미숙의 상태에서 성숙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신화에도 나는 늘 의문을 가진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상처가 쌓여가며 점차 더 움츠러들고, 남에게 방어적으로 변해가지 않던가.




그럼에도 <올해의 미숙>은 보다 더 씩씩해지고 당당해져가는 미숙의 과정을 담았다.

좋은 시를 쓰겠다는 자신의 꿈 때문에 생계를 위한 노동을 따로 하지 않는 아버지,

이 때문에 끊임없이 부업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미숙과 정숙 자매는 가난하게 자란다.

언니 정숙은 시를 쓰겠다는 꿈을 어릴 때 잠시 가지지만,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비뚤어지기 시작한다.

미숙은 언니를 보며 "무너지고 있었"다라고, 느끼고 "희망이 절망하고 있었"다며 안타까워한다.

아버지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으로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안의 분노를 꾹꾹 눌러두던 정숙은 미숙을 때리기 시작한다.

만화 안에서 때리는 장면은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언니인 정숙이 미숙을 때렸다는 것은 한 컷도 없이 설명만으로 제시된다. 밤마다 다정하게 누워 언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던 미숙에게는 그만큼 떠올리기 힘든 경험이었을지도.



  

**

미숙은 먼저, 재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일종의 돌파구를 잠시 찾는다.

자신을 '미숙아'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재이는 미숙을 대신해 그녀를 놀리는 아이에게 화를 대신 내고, 서로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으며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재이는 미숙의 가족 이야기를 팔아서 소설에 당선되며, 그것에 대해 미숙에게 아무런 말도 미리 해주지 않는다.

왜 자기 이야기를 허락도 없이 쓰냐는 말에 재이는 그저 '소설'일 뿐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자신의 깊은 컴플렉스를 허락없이 훔쳐간 친구에게 화를 내자 재이는 "뭐래 쪼다년이"라는 폭력적인 말로 되돌려주며 둘의 관계는 끝이 난다.



재이가 의도적으로 이야깃거리를 위해 미숙에게 접근한 것 같지는 않다.

재이 역시 부모님이 이혼한 상태였고, 미숙에게 적극적인 것은 그녀 쪽이었다.

소설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져다 쓸 때, 그것에 대한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재이 말대로 그저 소설일 뿐 현실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온 마음을 열어 내보인 가장 가까운 친구의 상처를 이야기 소재로 가져다 쓸 때에 재이도 분명히 떳떳하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에 상을 타기 전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것. 재이는 이후로 만화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어른이 된 뒤에도 성공한 소설가가 되어 책을

출간하고 여전히 미숙을 궁금해한다는 근황이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이후에도 책을 냈던 것을 보면, 재이는 어쨌거나 문학적 재능이 있었을 것이고 친구의 이야기를 가져다 쓴다고 한 들 소설적으로 잘 구성해냈겠지만, 미숙은 그녀로부터 큰 상처를 입는다.


 


***

미숙이 마음을 쏟는 또다른 대상은 아버지가 데려온 강아지 '절미'이다.

아버지는 강아지가 진돗개인 줄 알고 없는 살림에 백숙을 고아 먹이고, 돼지 뼈도 던져주지만

강아지는 알고 보니 혼혈이었다. 아버지 마음대로 '진도'라고 불린 강아지는 똥을 먹고 몸집도 커지지 않자 더 이상 미숙의 아버지는 강아지를 돌보지 않는다. 그렇게 버려진 강아지를 미숙은 '절미'라고 부르며 정성껏 돌본다.


"아껴 줄 거면, 끝까지 아껴 주지. 씨이발"


미숙이 내뱉는 이 욕설에는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게 압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상대를 향해 시작한 애정과 관심을 쉽사리 철회하지 않는 것.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계산하지 않고 진심을 다하는 것.


 

재이에게 큰 상처를 입은 미숙은 고등학교도 그만두고 동네 도서관을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거기서 우연히 알게 된 겸재와의 만남에서 적극적인 것은 미숙이다.

미숙은 이제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먼저 궁금한 것을 묻고 -"왜 같은 시간에 커피를 드세요"

소박한 친절을 보이는 그에게 먼저 마음을 표현한다. -"그럼 우리 사귈까요?"

 

아버지와 언니가 병으로 죽고, 취직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해 절미와 함께 집을 나오는 마지막 장면보다는 겸재를 당당하게 대하는 미숙의 모습이 사실 더 인상적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철저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제 단단해졌고,

누군가의 물음이 자신에게 던져진 후에야 우물쭈물 겨우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이었을텐데도 미숙은 더 적극적으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미숙의 진정한 성장은 이미 그 때 이루어졌다.

아니, 그녀는 상처로 움츠러들지 않는 사람이기에 '미숙아'가 아니라 원래 성숙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

만화에서 제시되는 깨알같은 장면들을 보며 나와 같은 세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때 참 많이도 보였던 '영화마을'이라는 비디오 가게, 권여선 작가의 등단작 <푸르른 틈새>도 나온다.

1999년에 고등학교를 입학한 미숙은 나와 동갑이다.

동갑내기 여자아이의 어설픔과 아픔, 그리고 당당함을 나란히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십대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그동안의 일들이 "먼 과거"가 아니라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미숙.

그리고 책의 제목인 "올해의 미숙"

시간을 뒤집어놓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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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셀렉트 북 - 로컬 트렌드세터가 추천하는 도쿄 아이템 250
강한나 지음 / 니들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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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자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가 나왔다.

저자는 일본 연예게 진출 7년차이며, 작가나 시인으로도 활동 중인 로컬 방송인으로 NHK 프로그램 2개에 고정으로 출연할 만큼

활발하게 활동 중인 사람이라고.

어쨌거나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최신 트렌드를 발빠르게 알리는 데 앞장서는 사람인 듯하다.

책은 그래서 소위 '도쿄통'인 사람이 2018년 현재 가장 핫한 가게와 상품들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형식이다.




1. 도쿄는 커피 마니아들의 성지

2. 일본 직장인들이 줄을 서는 점심식사

3. 책을 좋아하는 당신을 위한 서점 기행

4. 가성비 좋고 맛도 좋은 디너

5. 일본 드럭스토어를 털어라!

6. 일본 편의점을 털어라!

7. 이치란, 잇푸도는 이제 식상하다! 일본 최고의 라멘을 찾아서

8. 아름다운 사진 한 장 남기고픈 당신을 위해

9. 꼭 한 번 먹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빵집들

10. 도쿄는 카레 천국

11. 패셔니스타들의 단골집

12. 오마모리 콜렉션

13. 레트로풍 카페로 떠난 시간 여행

14. 녹차 마니아들이 사랑하는 도쿄

15. 도쿄의 팬케이크 열풍

16. 로맨틱한 도쿄 커플 여행

17. 팔로우미 팔로우미 도쿄 뷰티!

18. 일본의 신기방통한 문방구 쇼핑

19. 싸고 맛있게 배를 채우기

20. 노곤한 오후의 달달한 휴식

21. 일본 연예인들의 단골 가게

22. 술 한잔 기울이며

23. 도쿄 사람들의 치즈 사랑

24. 도쿄 기념 선물로 뭘 사가지?

25. 도쿄에서 떠나느 요코하마 쁘띠 여행



 이 정도면 거의 백과사전급이라고 생각한다. 도쿄의 유명한 카페나 맛집 등을 알려주는 책들이야 기존에 많이 나와있지만,

지금껏 접해본 책들 중 가장 자세하고 정보가 많다. 최신의 트렌드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구성 자체가 정말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함이 담겨있다. 일부러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녹차나 치즈, 팬케이크 점을 따로 항목을 만들어 가게들을 설명하고 있다거나 요즘 유행하는 문구류나 가성비 좋은 화장품, 드럭스토어나 편의점의 인기 물품을 소개하는 항목이 그렇다. 정말 2018년 현재 가장 인기가 많은 항목들이 담겨 있고 가격과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 구매시 유의점 같은 것들을 밑에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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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생각하느라 꽃을 피웠을 뿐이에요
나태주 엮음, 한아롱 그림 / 니들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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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나 기획의도가 좀 애매한 책이다.

사실, 나태주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드라마 <학교 2012>에서 이종석과 장나라가 <풀꽃>을

낭송하는 장면들 때문이었던 듯하고 (정확한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젊은 기간제교사의 애정어린 교육관과 문제학생의 교감이 바탕이 되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던 것 같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다.



나태주 시인이 자신의 시와 여러 시편들을 엮었는데 봄을 맞이하여 인생과 봄에 대한 시를 엮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와 다른 시편들이 섞여있는 느낌이고 1장.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2장. 사랑하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3. 삶이란 무엇일까요 4. 희망은 어디에 깃들었을까요 라는 목차에 들어있지만, 딱히 그 제목에 맞게 시편들이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 시들도 천차만별이라서,그 시가 '선택된' 이유라든가

자작시라면 저자가 그 시를 쓰게 된 배경이나 이유, 다른 시인의 시라면 그 시가 어떤 주제를 담고 있으며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그 시를 선택했는지의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예쁜 삽화가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요즘 그런 책들이야 한둘이 아니고.

시집에는 예쁜 삽화가 수록되어있어야 한다는 구성도 사실 좀 식상하다는 느낌.

  



**

시 <풀꽃>은 참 좋았는데-이 시를 알게 된 뒤로 정말로 풀꽃을 볼 때면 한번쯤 자세를 낮추고 자세히 들여다 보는 일이 생겼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좋은 것들도 있고, 정말 별로인 것도 가끔 있고 그렇다.



내가 나를 칭찬함 (나태주)


오늘도 흰 구름을 나는

흰 구름이 아니라고 억지로

우기지 않았음



오늘도 풀꽃을 만나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얼굴 돌려 외면하지 않았음



이것이 오늘 내가 나를 진정

칭찬해주고 싶은 항목임



당신도 부디 당신 자신을

칭찬해주시기 바란다




이런 시는 개인적으로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비슷한 어구와 단어를 반복해서 '시의 형태'와 비슷한 어떤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경구와 교훈의 나열이 담긴 시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포옹1 (나태주)


남자가 여자를 안아주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남자의 포옹이 정복과 소유와 관용의 표현이라면

여자의 포옹은 용서와 자비와 안식의 표현이다

여자가 남자를 안아줄 때 남자들은 거센 갈기를 내리고

순한 짐승이 되고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된다

알았어요 예 그렇게 할게요

백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는 포로가 된다

세상의 여자들이여 남자들을 안아주라

그러면 당신의 남자들은 모두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머리 조아려 안겨 오는 순한 짐승이 되고

사랑스런 아이가 될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안아주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남자들의 포옹에는 부성이 들어 있지 않지만

여자들의 포옹에는 늘 모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여자들이여

날마다 순간마다 당신의 남나들을 안아주라

그러면 당신의 남자들이 행복할 것이고

당신도 행복해질 것이다



 이 시는 읽고 기염을 토했다. 미투 운동이 퍼져나가고 있는 시대에 이런 도식적이고 젠더감수성 없는 이분법이라니. 결국 부드러운 모성의 방식으로 남자들을 안아줄 때 남자들은 항복하고 행복해지고 그러면 여성도 행복해진다는 결론. 최근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여성을

존중한답시고 "남존여비! 남자의 존재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있다"라는 건배사를 외치는 남성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들이 미투운동을 하는 것은 남성 위에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다. '양성평등',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것을 외치는 것인데 마치 여성들이 남성 위에 군림하려는 듯한 두려움을 모호하게 감추고 '그래, 내가 져줄게'라는 시혜의식을 농담처럼 발휘하던 그 불편한 대사와 '모성' .부드러운 포옹'을 여성만이 지닌 어떤 속성으로 신화화하고 그걸 적극적으로 발휘하라는 노골적인 메시지가 담긴 이 시는 거리가 멀지 않다.




물론 낭만적인 시들도 있다.



지평선(막스 자코브)


너의 하얀 팔이

나의 지평선 전부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팔 안에 안겨 나른하게 잠들어본 사람이라면, 이 시를 보며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넉넉하고 편안한 품은 지금 이 순간 나와 그의 세계의 전부인 것 같고, 그 팔 너머로의 세계는 아늑하게만 느껴지는....




노래(이시카와 다쿠보쿠)


헤어지고 나서

해가 갈수록

보고 싶은 너



이시가리 교외에 있는

너의 집 뜨락

능금나무 꽃이 떨어졌으리



길고 긴 편지

3년 동안 세 번 왔지

내가 쓴 편지는 네 번인데.



하이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화자에게 답장을 더이상 보내지 않는 '너'에 대한 약간의 원망과 미련과 그리움이

한 데 뭉쳐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답장을 보내지 않는 무심함에 원망스럽다가도 해가 지날수록 계속 그리워지는 마음이 느껴진다.




메시지(자끄 프레베르)


누군가가 연 문

누군가가 닫은 문

누군가가 앉은 의자

누군가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가 깨물은 과일

누군가가 읽은 편지

누군가가 쓰러뜨린 의자

누군가가 연 문

누군가가 아직도 달리는 거리

누군가가 건너가는 숲

누군가가 몸을 던지는 강

누군가가 죽은 병원.

 


 이런 시도 있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가 닫았고, 의자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과일을 깨물었으며 편지를 읽었다.

의자를 쓰러뜨리고는 문을 열어 달려 숲으로 건너갔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과정을 담담하게 '누군가가'로 적은 이 시는

'누군가'가 남긴 행동의 흔적들을 통해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화자의 고투일까.




***

 나는 시전공도 아니고, 시를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어서 시를 보는 눈따위 있을리는 없지만,

그래도 시가 지닌 어떤 함축성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애매모호함같은 것들이 좋다.

'우리 인생은 이런 것이니 이렇게 살아라'라는 경구는 문학스럽지 않게 너무 답을 제시해주는 느낌이라 반감이 든다고 해야하나.


어쨌거나 이런 식의 시가 어쩔 때는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어쩔 때는 식상함과 지루함을 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그 메시지가 올바름을 지니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든다면.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짧은 시편들이 사실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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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계절 - 김지훈 이야기 산문집
김지훈 지음 / 니들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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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사실, 이런 식의 사랑 에세이는 잘 읽지 않는데, 지인의 소개로 읽게 되었다.

앞페이지를 조금 읽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80년대를 풍미했던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90년대에 히트했던 원태연의 <넌 가끔 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 가다 딴생각을 해>였다. 작가는 90년대 생으로 20대 후반이니까 위의 시인들이 해당 시집으로 인기를 끌었을 나이와 얼추 비슷할 것 같다.

 

나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십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원태연의 시집과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 얼마나 당대 대중들의 감성을

파고들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나 또한 그의 시집에 있던 구절들을 다이어리에 열심히 옮겨 적고,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내며 함께

그 말랑말랑한 연애시들을 공유했다. 물론 그의 산문집도 좋았다. 딱히 연애란 걸 해보지도 못한 나이였지만, 이렇게 쉽게 잘 읽히면서도

절절하게 와닿는 문장들이라니.


 

2.

물론 20대 이후로 나는 더이상 이런 것들을 읽지 않는다. 순수문학을 전공하면서 이런 것들이 우습게 보이게 된 것도 사실이다.

'저런 게 무슨 시이고 에세이야?'라는 생각들. 너무 쉽고 뻔한 언어들로 뻔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들을 쓰는 게 그냥 지루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런 굳어버린 판단들을 조금 제쳐놓고 읽어보자고 다짐했다.

정말 특별한 나이대에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감성들이 아니던가. 아직 사랑이 미숙하고 서툴고, 엄청나게 예쁘고 거대한 환상 속에서

사랑만을 바라보던 시기.물론,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3.

책을 읽을 때 오는 '공감(共感)'이라는 정서에 대해 생각한다.

비슷한 것을 경험했을 때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고, 내가 경험하지 못했지만 정말 기묘한 인식의 깨달음이 전달되었을 때 오는 희열감일 수도 있다. 아마 이 책은 철저히 전자에 충실한 것일테지.


저자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이 책의 내용을 조금 요약해보자.

그는 건널목 앞에서 운명의 그녀를 만났다. 무턱대고 다가가 전화번호를 묻고 '데스티니'라고 저장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운명이라고 느껴졌고 처음으로 연락처를 물어봤다고. 그리고 그녀가 화가일거라고, (사실은 화가이기를)기대했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페이스북에서 찾은 그녀 사진의 옆에는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

어쨌든 기적적으로(?) 그녀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고, 그녀와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니었고, 승무원이었다.

둘은 사랑을 나눴고, 싸우기도 했고, 질투도 했고, 결국은 사랑에 대한 기대와 온도차로 헤어졌다.

저자는 그 사랑과 이별의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

 

 

4.

사실은 정말 '보통의 사랑' 이야기다. 첫눈에 누군가에게 반해서 운명처럼 느끼고 그와 연애를 하고 헤어지는 서사는 영화와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저자의 이야기도, 문체도 사실은 굉장히 평범하다. '사랑'과 '예쁨'이라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 있어 그녀는 정말 예뻤나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누군가에게 공감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건 그만큼 평범하고 흔하기 때문에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



5.

 

지금은 페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하지 않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어서 공유되는 정서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자는 SNS에서 주로 글쓰기를 해오고 소통을 하고 있는 듯하다. 2000년대에 유행했던 싸이월드의 글들을 생각해보면 될 듯하다.

잘 읽히고, 쉬운 단어들과 적당히 반복과 대칭구조를 이루는 문장들. 사랑은 이런 것, 이별은 이런 것, 나는 이러했고, 너는 이러했고

이런 식의 이분법과 격언식의 문장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호응을 얻는다.

위에 쓴 원태연의 시집 제목도 그 예이다. 너는 가끔 내 생각을 한다면 나는 (온종일 네 생각만 하다가) 가끔 딴 생각을 한다는 식.

아마 이 책도 그런 글쓰기의 연장 선에서 나온 책같다. 일기와 독백조에 가까운 읊조림과 편안한 구어체.


어쨌거나, 저자가 섬세하고 꼼꼼한 캐릭터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연애를 했던 사람과 나눴던 대화나 상황들을 이만큼 꼼꼼하고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적어도 그는 이렇게나 꼼꼼하고 세세하게 기록했으니, 그 사랑과 이별의 기록만큼은 절대 증발하지 않겠구나, 싶다.


이별을 온전히 견디겠다고, 잊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부단히 다짐하는 듯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이렇게 책으로 세세히 기록해도 바람 결에 날아가는 모래처럼 결국엔 사라져가는 것이 기억이거늘.

운명이라고 느낄만큼 강력하고 인상적인 사랑이었다면, 가슴 한 켠에 오래오래 잘 남겨둬도 되지 않을까.

이별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철칙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이별한 지 오래되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이별한지 얼마 안 되도 깡그리 잊혀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니.

현재의 사람과만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겠다. 지난 사랑도 사랑이고, 그것 또한 따뜻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두 가지 사랑이 나름의 다른 색깔로 진행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슴에 묻어둔 과거의 사랑도 진행중이고, 현재 만나는 사람도

생생하게 진행 중인 어떤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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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르고 후회해도 결국엔 다 괜찮은 일들
이소연 지음 / 예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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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다른 측면을 깨달았다. 혼자 하는 여행은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경험이라는 점. 세상 어디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대개의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친절하다는 점(...) 혼자 다니다 보면 필연적으로 '낯선 타인들'과 마주치게 된다. 낯선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어야 하고, 때로는 낯선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깊은 속이야기를 털어넣기도 한다. 익숙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타인들의 존재에 민감해진다. (...) 어느덧 혼자 여행 15년차에 접어든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람은 원래 친절한 존재다. 그 친절을 통해 우리는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혼자 하는 여행을 통해 나는 세상과 연결된다. (25~27쪽)

 

 사람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평소처럼' 대답을 해야 했다. 내 속은 나를 이런 자리로 끌고 온 친구에 대한 원망으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전염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점점 그 자리가 편안해졌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기억이 났다. 아련한 추억처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런 외출이 얼마 만이었던가. 나는 잊고 있었던 거다. 혼자 거대한 우울을 끌어안고 씨름하던 시간 동안, 사람들과 나누는 떠들썩한 만남의 즐거움을,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처럼 까맣게 기억에서 지우고 있었던 거다. (42~43쪽)

 

10년 전에 내가 만나던 사람들과, 현재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명단은 거의 겹치지 않는다. 즉 주변 사람들의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52쪽)

 

 

 

 

 이 책을 펴들고 맨 처음 읽은 장은 '쏘가리-옛 선생님께 전화를 걸다'라는 장이었다. 우연히 떠오른 옛 선생님,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서 연락했던 선생님은 바로 저자를 기억해주진 않았지만, 사실 선생님 앞에서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려고

29살짜리 젊디젊은 선생님을 당혹스럽게 했던 그 여고생을 선생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은 퇴직을 하고 쏘가리를 직접 키우고 계셨다는. 내가 이 장을 고른 것은 실제로 얼마 전에 내가 바로 은사 님을 17년 만에 직장에서 재회하는

독특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나를 기억하실까?'

하는 묘한 기대와 설렘, 그리고 어떻게 변화하셨을까 하는 궁금증... 그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서 몇 날 며칠을 기다리고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뵈었을 때, 선생님은 용케도 중학교 때의 나를 기억하고 계셨고 나는 주름살만 늘었을 뿐 변함이 없는

선생님의 젠틀한 모습과 나를 반가워하는 표정에 그 때의 중학생처럼 단숨에 달려가 선생님을 감격어린 눈으로 쳐다보며인사를 했다.

교감 선생님이 되어 다시 뵙게 된 나의 옛선생님은 이젠 존댓말로

"오랜만이네요. 정말 반갑습니다."라며 악수를 권하셨고 나는 선생님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감격에 겨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이 책의 여러 일화들과 저자의 생각들은 누구라도 경험했을 법한, 그리고 누구라도 한번쯤은 생각해봤을만한 것들이 저자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담담하게 그려져있다. 한 때는 죽자살자 사랑했을 연인과의 이별,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우연처럼

다른 곳에서 만나 그와 악수를 나눴을 때 느껴진 서늘한 감촉, '오래갈 사이'라는 애매한 관계 안에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묘한 포장지로 묶어 두고 바라보는

시선들...

 

 

 

 

드라마 PD인 작가의 말처럼, 때로는 드라마에서처럼 우연이지만 때로는 간절한 바람이 끌어온 것만 같은 기적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길 꿈꿀 때가 있다. 그렇게도 미워하고 그리워했던 그 사람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게 면박을 주고 떠나버렸던 얄미운 그 썸남은 뭐하면서 살고 있을까, 딱히 연락을 하고 수소문을 해서 만나려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나기는 그런 사이라면 결국 '우연'에 기대어 서로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으로 어떤 인력에 의해 스르르 밀려오듯, 그렇게 끌려와 마주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과 눈빛을 가진 사람이 매력있다고 느끼는데

이 책의 작가가 딱 그런 느낌이다. 얼굴을 본 적도 없지만, 그냥 엄청 매력있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잘 입은 채 나이들어가고 있는 여성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독특한 색깔을 뿜어내는 글을 쓰고 있겠지.

나이가 들면서 이제 존재만으로 싱싱함을 뿜어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은 나와 거리가 멀어졌고, 이젠 지나온 나의 찌질하고 바보같은 삶 조차도 그냥 그렇게 잘 어우러져 '나'라는 인간을 조금은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색깔을 지닌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아우라를 감싸고 있는 이 책과 같은 글을,

나도 언젠가는 쓰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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