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베이비 -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이 책이 시작되는 앞부분은 아주 강렬하다. 책을 소개하는 다른 매체나 글에서도 이 부분만큼은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을 만큼. 책을 다 읽고 나면, 전체 주제와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

아빠는 나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렸다.

돈을 얼마나 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갚지 않은 건 확실하다. 열 살이 넘어서도 난 전당포에 있었으니까. 보육원이 아니라 전당포에 아이를 맡긴 아빠나 덜컥 아이를 맡은 전당포나 흠, 긴말은 하지 않겠다. 하면 할수록 상상을 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길. 버림받은 아이의 이야기라고 우울하게 시작하진 않는다는 것. (...)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면 값이 떨어지기 전에 팔고, 금을 맡기면 값이 오르길 기다린다. 그럼 아이를 맡겼을 땐?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 전당포 주인이 할머니, 그 딸과 아들이 엄마와 삼촌이 된다. "애들은 억만큼 주고도 못 사는 어른들의 희망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할머니가 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12)

책의 제목, 그리고 이 서론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듯이 주인공 '나'(하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도박을 허용하는 동네의 카지노를 배경으로 태어난 아이다. 아이는 버려져 전당포에 맡겨졌고 전당포를 꾸려나가는 할머니와 그의 자식들이 아이의 가족이 된다. 책에서는 '지음'이라는 지명으로 이름이 설정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곳이 사북의 강원랜드라는 걸 안다.

2.

10년 전쯤, 일하던 회사에서 출장 차 사북에 갔던 적이 있다. 같이 갔던 일행 중 한 명은 어느 곳을 가리키며 저기서 누가 자살을 했단다, 아침만 되면 좀비의 눈빛을 한 사람들이 슬금슬금 나타난다며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맡은 일은 카지노에서 벌어들인 수입 일부를 그 지역 아이들을 위한 문화산업에 환원하는 기업과 협력해 힉교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병주고 약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돌던 초겨울이라 그랬겠지만 도시 전체가 잿빛으로 보였다. 그곳에도 해맑은 아이들이 있었고 기업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초등학교 시설은 꽤 세련되었다고 느꼈다. 많지는 않지만 웃으며 학교 문을 나서던 아이들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만난 하늘이는 그 아이들과도 겹쳐보였다.



하늘이를 키우는 할머니는 월드컵 전당포를 꾸려나가고 있고, 하늘이는 '그림자 아이'라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도서관에서 공공근로자로 일하는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출근한다. 삼촌은 성실히 일하던 배달차 주인이었지만, 도박으로 3시간 만에 500만원을 잃은 뒤 반쯤 정신이 나가 '지음이 흔들린다, 랜드가 무너진다!'를 외치고 다닌다.

소설은 10살짜리 하늘이의 시선으로 지음에 세워진 카지노를 발판삼아 삶을 꾸려나가는 주변인물들의 모습을 비춘다. 도박할 자금을 마련하려 물건을 처음 전당포에 맡기기 시작한 사람이 재차 돈을 따고 다시 잃고 새로운 물건을 맡기다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이자와 빚 때문에 좀비가 되어가는 모습, 전당포를 꾸려나가면서도 빚을 져서 자살을 하고마는 사장, 도박에 열중하느리 아이를 임신한지도 모르고 심지어 아이를 낳은 뒤에도 애를 내팽개쳐두고 번갈아가며 카지노를 하러 갔던 무책임한 부부 등 이곳은 한탕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와 중독과 쾌락의 공간이다.

하늘이의 할머니는 시세의 흐름을 잘 좇아간 덕분에 부를 어느 정도 축적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지음의 산 역사와 비극을 한평생 목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70년대에 탄광이 부흥할 땐 근처에 올림픽 다방을, 2000년대에 카지노가 들어설 땐 월드컵 전당포를 열어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전당포를 꾸려나가는 인물들을 악하게만 그리지는 않는다. 너무나 빠르게 바뀌고 흥망성쇠를 반복해가는 지음이라는 도시에서 이들이 살아남으려는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 할머니는 그러하기에 전혀 돈이 되지 않는 하늘이를 거두어 손자로 키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에 악인은 없다. 그저 싱크홀처럼 사람과 돈을 빨아들이는 도박장이 있고, 그 주변에 모여사는 여러 군상들의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3.

"지음이 흔들린다, 랜드가 무너진다!"라는 삼촌의 외침은 카지노가 지어질 무렵 이를 반대하던 데모단의 벽보 문구이기도 했고, 하늘이의 꿈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소설 말미에 이르면 이것은 현실이 된다. 화려한 부의 상징이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장면을 겹쳐그리듯, 랜드는 무너져내리는데 하늘은 거기서 살아남고 하늘이의 생사를 알지못해 괴로워했던 할머니는 그 뒤로 몸져누워 쇠약해지다가 세상을 떠난다. "어른들의 희망이자 미래"라는 할머니의 말을 이어받듯 자본주의의 괴물같던 랜드가 무너지고 전당포도 문을 닫지만 하늘이는 할머니의 유언을 이어받아 학교 교육도 받을 수 있게 되고 다시 가족들의 품에서 잘 자라날 수 있게 된다는 결론은 어쨌거나 해피엔딩.


하지만 환상에 가깝다는 점에서, 한 토대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뒤에나 가능하다는 점에서 슬픈 해피엔딩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선 자조와 패배감, 비애의 정서가 가득했는데 최근에는 어떤 식으로는 희망과 해피엔딩으로 발을 내딛어보려는 시도들이 보이는 건 아닌가 싶다.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덮치면서 사실 비극은 더 심화되었을지언정, 해피엔딩과 희망을 꿈꾸고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생을 위해 발을 내딛겠냐는 마지막 몸부림 같기도 하다.


소설의 첫 장면이 담고 있던 강렬함이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아쉽다. 소설 속 화자는 10살 아이인데 여러 상황들을 너무나 자세히, 어른처럼 알고 장황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의아한 부분들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농촌, 탄광촌, 카지노 랜드를 거치며 빠르게 변해간 한 지역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소설화한 시도는 반길만 하다. 비극적인 시간들을 많이 겪어야했던 이곳을 비극적이지만은 않게, 유머러스하고 씩씩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간 점은 이 소설의 미덕이며 소설 속 화자 하늘이의 캐릭터를 통해 잘 구현해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버지, 아들에게 말씀하옵소서.

-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문학동네, 2017.

이승우의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 』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는 '부재하는 아버지'와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아들'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혈연의 부자관계이기도 하고, 대리적 부자관계이기도 하며,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신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존재적 근원을 질문하는 과정이든(「모르는 사람 」,「복숭아 향기 」), 환대의 윤리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개인이든(「찰스 」,「신의 말을 듣다 」) 공통적으로 '아버지'를 경유해 답을 찾고자 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아들들은 끊임없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의 존재 근원을 찾기 위해, 그리고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기기 위해.

아버지의 목소리를 복기하는 과정

 구어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말하는 자가 있고, 그의 목소리는 공기 중으로 전파되어 듣는 자의 귀로 들어간다. 말하는 자가 발화한 메시지는 목소리 안에 담겨 듣는 자에게 들어가 수용된다. 저자는 이렇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화용적 상황에만 주목하지 않고, 말하는 자가 목소리를 내어 발화할 때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점에서는 누구보다 잘 듣고 가장 잘 듣는 사람이다. (...)

말한 사람 자신은, 말해진 것이 불완전하고 서툶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완전하고 정확하게 듣는다. 그가 듣는 것이 말해진 말이 아니라 말해지기 전의 말이기 때문이다(12)

 말하는 사람은 늘상 자기의 말을 가장 정확하게 듣고 동시에 인지하고 있을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말은 거짓으로 발화될 수도 있고, 발화된 순간에야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기가 한 말을 잘 듣고 정확히 안다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말'이라는 권위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소설 「모르는 사람 」의 화자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었던 아버지의 소식을 11년 만에 듣는다. 건설 회사의 후계자 자리를 마다하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사로 살다가 말라리아로 죽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게 된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두기 위해 억지 논리를 동원한다. 아버지는 유명한 여배우와 눈이 맞아 외국에 가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를 '아버지의 파렴치한 행각으로 인한 죽음'으로 단순화해버린다. 아들인 화자 역시 땅끝선교회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의 모습과 기록과 사진들이 낯설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아가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는 지점은 그 사후적인 메시지 전달을 통해서이다.

 틈나는 대로 서재에 조용히 혼자 틀어박혀 있던 아버지. 어느 날, 서재에서 나온 아버지의 모습이 하얗고 키도 커 보였으며 후광 같은 게 보였음을 화자는 회상한다. 이 장면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신의 임재 때문에 새하얗게 광채를 내고 있던 것을 회상하는 성경 기자(記者)의 서술을 떠올리게 한다. 서재라는 공간 안에서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상기하고, 선교사로 떠나려는 사명을 되새긴다. 마치 성소와도 같은 공간이다. 신약에서도 예수가 죽은 뒤에야 그의 생애와 언행에 대한 기록이 이루어지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재구성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예수 생전에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도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가 죽은 후였다. 가까이 했던 상대가 부재하게 되자 다시금 그의 생전의 목소리를 복기해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겪은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이 시간적으로는 뒤늦은 것일지라도 부재의 결핍과 안타까움을 메우려는 노력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바둑 대국이 끝나고 한 수 한 수 복기하다 보면 대국중에는 보지 못했던 수를 보게 되고 상대방이 둔 수에 감춰진 의도를 읽게 되는 것과 같다. 항상 뒤늦게 깨닫는다, 세상사란 게 바둑판과 같다, 하고 주름진 얼굴의 외삼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56-57)

「복숭아 향기 」에서도 아버지가 이미 죽고 없는 화자가 등장한다. 우연히 M시로 발령이 나게 된 그는 아버지가 그곳의 신문사에서 일 했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묻는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아들의 기억의 진실여부를 어머니는 직접적으로 확인해주지 않는다.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진실을 "세월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발굴"(51)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외삼촌이다. 화자가 외삼촌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기억하듯, 그의 외삼촌은 대리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외삼촌의 목소리를 통해 서사적으로 재구성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비극에 가깝다. 정신증을 앓던 M시의 재벌 후계자와 M신문사의 똑똑한 여기자의 정략적 결혼. 이 비극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어머니였다. 자신은 "누군가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사람"(66)이니까 이 혼사를 무조건 거절하고 떠나라고 상에 엎드려 우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복숭아 향기에 홀린"것처럼 마음이 움직였다는 그녀. 아버지의 정신증은 점차 심해져 내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주인공을 낳을 때까지 과수원에서 지낸다. 유일하게 시댁에 요구해서 물려받은 복숭아 과수원에 아버지의 묘를 만들고 그곳에서 3년 간 머물렀다. 외삼촌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부모의 과거 이야기가 끝나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온다.

 부모에 대해 자신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사실들이 '거짓'이 아니기를 화자는 애타게 바랐다. 부모는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고,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두려움을 느꼈으므로 그는 외삼촌의 진술을 들으며, 진실에 직면하려 애쓴다. 화자는 나름의 '진실'에 도달하고, 실제로 결말부에서는 "여기에서 살아라. 그동안 여태 내가 과수원을 돌봐왔다."(67)라는, 부재한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다.


​목소리에 대답하거나 거부하는 일, 환대의 윤리

​ 잘 알려져 있듯이, 레비나스는 호소에 대한 응답(response)과 책임(responsbility)을 주장했다. 과부, 가난한 자, 이방인 등의 약자는 거부할 수 없는 '타자의 얼굴'로 나타나고 그에 대해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환대의 윤리와 마주한다.

 「찰스 」에서 찰스는 교수인 김철수가 말레이시아의 학회에 갔다가 여행 가이드로 만난 현지인이다. 한국어가 유창하고, 농담처럼 "제 한국 이름도 김철수에요"라고 말하던 그에게 김철수는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국에서 재회한 찰스는 김철수가 그에게서 들은 것과는 달리 이주노동자였고, 불법체류자였다. 찰스는 철수와의 신분을 이용해 그의 연구실 공간을 몰래 사용하고, 출판사에 교수인 철수의 이름을 팔아 번역일을 몰래 구하려고도 한다.

 궁금한 것이 모두 물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음은, 때때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감당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물음들은 그런 자신감 내지 책임감 없이 물어질 수 없다(144)

 철수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올 말들과 그것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두려워서 묻지 않기로 한다. 한국에 와서 다시 만난 찰스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사는 곳이 어딘지'를 물으면 돌아올 대답, '집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지기 싫어 그는 더 묻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연구실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 있도록 잠시 빌려줌으로써 최소한의 예의를 베풀 뿐이다. 출입국관리소에서 찰스의 신분을 보장해줄 수 있는지 묻는 전화가 걸려오자 철수는 갑자기 무엇인가가 자신의 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는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 찰스가 애타게 자신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는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말을 들었을 때, 철수는 찰스의 호소에 응답(response)할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터. 철수는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그 호소에 응답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이와는 반대편의 결말로 향하는 것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와 「신의 말을 듣다 」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로 도망치듯 이사를 간 화자. 그녀의 집에 매일같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남자가 나타나고 겁에 질린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하자마자 곧바로 잡힌다. 남자는 건물 벽에 몸을 붙이고 온몸을 하늘로 뻗어 와이파이를 빌려 쓰려고 하던 외국인 노동자였다.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자기 나라의 사이트를 접속하기 위해 필요한 무선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그곳을 계속 서성이게 된 것. "처지가 딱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의를 베풀라는 암시를 꽤 노골적으로 하"(174)는 경찰관의 언행을 화자는 극도로 불편해한다.

 무선인터넷에 암호를 걸고, 정기적으로 경찰관의 순찰도 부탁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살던 그녀의 집 앞에 남자는 다시 나타난다. 그는 과일 같은 것들을 한 봉지씩 싸들고 와서, 한국말을 잘하는 친구까지 동원해가며 애원한다. 가족들과 꼭 연락해야하니 무선인터넷을 제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여기서 부탁을 하는 이 남자, 꽤 뻔뻔하게 말한다. "사모님, '선물'해주세요"라고.

 교회에서 '가진 것은 다 받은 것이고, 받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주어야 하는 것이요, 선물'이라는 목사의 설교를 들었고, 따라서 선물을 해달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여자는 당황스러워한다. 궂은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여자의 집 앞에서 기다리며 용서를 빌고 애걸하던 남자에게 여자는 결국은 문을 열어주고야 만다. 그녀는 남자의 호소에 응답하고 문을 열어보임으로써 환대의 윤리에 설득된 것처럼 보이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은 남아있다. 자신을 오랫동안 '피해자'의 위치에 둠으로써 "빚진 것이 없으므로 책임질 것이 없고", "기본적으로 요구를 받는 자가 아니라, 요구하는 자 요구할 권리를 가진자"(184)로 스스로를 여겼던 그녀가 외국인 노동자의 출현으로 인해 그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혹은 그렇게 해야한다는) 소설 속 화자(혹은 작가의)인식은 동의하기 어렵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오랫동안 시달려 외부에 대한 공포로 움츠리게 된 여성보다 '외국인 노동자'가 더 약자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을까. 게다가 소설 속에서 그 윤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기독교 교회의 설교이다.

 

 「신의 말을 듣다 」역시 신의 목소리가 친구의 목소리로 옮겨오며, 그것을 체화한 이가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변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일종의 당위이자 책무성으로 제시되는 '환대의 윤리'를 소설 안에서 그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시도인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신'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그에 따라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게 된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늘 의문스럽다.

 아버지를 경유해 존재의 근원을 찾고 윤리적 구원에 도달해가는 과정에서 여성인물들이 지속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싶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모르는 사람들 」), 그를 위해 참고 인내한다(「복숭아 향기 」). 남편으로부터 오랫동안 끔찍한 폭력을 당해온 여성 개인의 서사 또한 '누구도 순수한 피해자일 수 없다'는 보편성의 논리와 '가난한 외국인 남성 노동자' 앞에서 쉽게 탈각되어 버린다. (「넘어가지 않습니다 」) 

 

***

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문학나눔 붘어1기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 생각하느라 꽃을 피웠을 뿐이에요
나태주 엮음, 한아롱 그림 / 니들북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편집이나 기획의도가 좀 애매한 책이다.

사실, 나태주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드라마 <학교 2012>에서 이종석과 장나라가 <풀꽃>을

낭송하는 장면들 때문이었던 듯하고 (정확한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젊은 기간제교사의 애정어린 교육관과 문제학생의 교감이 바탕이 되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던 것 같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다.



나태주 시인이 자신의 시와 여러 시편들을 엮었는데 봄을 맞이하여 인생과 봄에 대한 시를 엮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와 다른 시편들이 섞여있는 느낌이고 1장.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2장. 사랑하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3. 삶이란 무엇일까요 4. 희망은 어디에 깃들었을까요 라는 목차에 들어있지만, 딱히 그 제목에 맞게 시편들이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 시들도 천차만별이라서,그 시가 '선택된' 이유라든가

자작시라면 저자가 그 시를 쓰게 된 배경이나 이유, 다른 시인의 시라면 그 시가 어떤 주제를 담고 있으며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그 시를 선택했는지의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예쁜 삽화가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요즘 그런 책들이야 한둘이 아니고.

시집에는 예쁜 삽화가 수록되어있어야 한다는 구성도 사실 좀 식상하다는 느낌.

  



**

시 <풀꽃>은 참 좋았는데-이 시를 알게 된 뒤로 정말로 풀꽃을 볼 때면 한번쯤 자세를 낮추고 자세히 들여다 보는 일이 생겼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좋은 것들도 있고, 정말 별로인 것도 가끔 있고 그렇다.



내가 나를 칭찬함 (나태주)


오늘도 흰 구름을 나는

흰 구름이 아니라고 억지로

우기지 않았음



오늘도 풀꽃을 만나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얼굴 돌려 외면하지 않았음



이것이 오늘 내가 나를 진정

칭찬해주고 싶은 항목임



당신도 부디 당신 자신을

칭찬해주시기 바란다




이런 시는 개인적으로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비슷한 어구와 단어를 반복해서 '시의 형태'와 비슷한 어떤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경구와 교훈의 나열이 담긴 시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포옹1 (나태주)


남자가 여자를 안아주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남자의 포옹이 정복과 소유와 관용의 표현이라면

여자의 포옹은 용서와 자비와 안식의 표현이다

여자가 남자를 안아줄 때 남자들은 거센 갈기를 내리고

순한 짐승이 되고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된다

알았어요 예 그렇게 할게요

백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는 포로가 된다

세상의 여자들이여 남자들을 안아주라

그러면 당신의 남자들은 모두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머리 조아려 안겨 오는 순한 짐승이 되고

사랑스런 아이가 될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안아주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남자들의 포옹에는 부성이 들어 있지 않지만

여자들의 포옹에는 늘 모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여자들이여

날마다 순간마다 당신의 남나들을 안아주라

그러면 당신의 남자들이 행복할 것이고

당신도 행복해질 것이다



 이 시는 읽고 기염을 토했다. 미투 운동이 퍼져나가고 있는 시대에 이런 도식적이고 젠더감수성 없는 이분법이라니. 결국 부드러운 모성의 방식으로 남자들을 안아줄 때 남자들은 항복하고 행복해지고 그러면 여성도 행복해진다는 결론. 최근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여성을

존중한답시고 "남존여비! 남자의 존재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있다"라는 건배사를 외치는 남성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들이 미투운동을 하는 것은 남성 위에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다. '양성평등',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것을 외치는 것인데 마치 여성들이 남성 위에 군림하려는 듯한 두려움을 모호하게 감추고 '그래, 내가 져줄게'라는 시혜의식을 농담처럼 발휘하던 그 불편한 대사와 '모성' .부드러운 포옹'을 여성만이 지닌 어떤 속성으로 신화화하고 그걸 적극적으로 발휘하라는 노골적인 메시지가 담긴 이 시는 거리가 멀지 않다.




물론 낭만적인 시들도 있다.



지평선(막스 자코브)


너의 하얀 팔이

나의 지평선 전부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팔 안에 안겨 나른하게 잠들어본 사람이라면, 이 시를 보며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넉넉하고 편안한 품은 지금 이 순간 나와 그의 세계의 전부인 것 같고, 그 팔 너머로의 세계는 아늑하게만 느껴지는....




노래(이시카와 다쿠보쿠)


헤어지고 나서

해가 갈수록

보고 싶은 너



이시가리 교외에 있는

너의 집 뜨락

능금나무 꽃이 떨어졌으리



길고 긴 편지

3년 동안 세 번 왔지

내가 쓴 편지는 네 번인데.



하이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화자에게 답장을 더이상 보내지 않는 '너'에 대한 약간의 원망과 미련과 그리움이

한 데 뭉쳐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답장을 보내지 않는 무심함에 원망스럽다가도 해가 지날수록 계속 그리워지는 마음이 느껴진다.




메시지(자끄 프레베르)


누군가가 연 문

누군가가 닫은 문

누군가가 앉은 의자

누군가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가 깨물은 과일

누군가가 읽은 편지

누군가가 쓰러뜨린 의자

누군가가 연 문

누군가가 아직도 달리는 거리

누군가가 건너가는 숲

누군가가 몸을 던지는 강

누군가가 죽은 병원.

 


 이런 시도 있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가 닫았고, 의자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과일을 깨물었으며 편지를 읽었다.

의자를 쓰러뜨리고는 문을 열어 달려 숲으로 건너갔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과정을 담담하게 '누군가가'로 적은 이 시는

'누군가'가 남긴 행동의 흔적들을 통해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화자의 고투일까.




***

 나는 시전공도 아니고, 시를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어서 시를 보는 눈따위 있을리는 없지만,

그래도 시가 지닌 어떤 함축성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애매모호함같은 것들이 좋다.

'우리 인생은 이런 것이니 이렇게 살아라'라는 경구는 문학스럽지 않게 너무 답을 제시해주는 느낌이라 반감이 든다고 해야하나.


어쨌거나 이런 식의 시가 어쩔 때는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어쩔 때는 식상함과 지루함을 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그 메시지가 올바름을 지니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든다면.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짧은 시편들이 사실 더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해줘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도 주로 에세이스트였을 것 같은 임경선 소설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 한다.

솔직한 나의 감상은...

작가의 필력은 나쁘지 않지만 '소설'로서는 많이 아쉽다.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기쁨을 느낀다는 작가의 말과 달리,

미안하지만 나는 소설의 한 부분을 인용해서 들려주고 싶다.

소설이라는 부분에 대해 좀더 고민을 하신다면,

앞으로 더 좋은 소설을 쓰실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자체도 에세이였다면 굉장히 훌륭했을 것 같으니까.

"베일리는 방과 후 운영하는 북클럽 아이들이 제출한 글 중 안나의 글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의 글은 물론 또래 아이들에 비해, 그리고 외국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법 잘 쓴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글은 한마디로 평이했고 독자적인 매력이 없었다."(15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가만가만히 위로하는 듯하다.

그래도 다시 '사랑'을 통해 위로받고 다시 시작하라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상처를 주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내가 흔적을 남기고

언젠가 그것이 흉터로 희미해질 때쯤

그 흔적도 소중하게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