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아버지, 아들에게 말씀하옵소서.
-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문학동네, 2017.
이승우의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 』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는 '부재하는 아버지'와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아들'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혈연의 부자관계이기도 하고, 대리적 부자관계이기도 하며,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신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존재적 근원을 질문하는 과정이든(「모르는 사람 」,「복숭아 향기 」), 환대의 윤리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개인이든(「찰스 」,「신의 말을 듣다 」) 공통적으로 '아버지'를 경유해 답을 찾고자 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아들들은 끊임없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의 존재 근원을 찾기 위해, 그리고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기기 위해.
아버지의 목소리를 복기하는 과정
구어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말하는 자가 있고, 그의 목소리는 공기 중으로 전파되어 듣는 자의 귀로 들어간다. 말하는 자가 발화한 메시지는 목소리 안에 담겨 듣는 자에게 들어가 수용된다. 저자는 이렇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화용적 상황에만 주목하지 않고, 말하는 자가 목소리를 내어 발화할 때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점에서는 누구보다 잘 듣고 가장 잘 듣는 사람이다. (...)
말한 사람 자신은, 말해진 것이 불완전하고 서툶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완전하고 정확하게 듣는다. 그가 듣는 것이 말해진 말이 아니라 말해지기 전의 말이기 때문이다(12)
말하는 사람은 늘상 자기의 말을 가장 정확하게 듣고 동시에 인지하고 있을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말은 거짓으로 발화될 수도 있고, 발화된 순간에야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기가 한 말을 잘 듣고 정확히 안다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말'이라는 권위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소설 「모르는 사람 」의 화자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었던 아버지의 소식을 11년 만에 듣는다. 건설 회사의 후계자 자리를 마다하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사로 살다가 말라리아로 죽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게 된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두기 위해 억지 논리를 동원한다. 아버지는 유명한 여배우와 눈이 맞아 외국에 가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를 '아버지의 파렴치한 행각으로 인한 죽음'으로 단순화해버린다. 아들인 화자 역시 땅끝선교회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의 모습과 기록과 사진들이 낯설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아가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는 지점은 그 사후적인 메시지 전달을 통해서이다.
틈나는 대로 서재에 조용히 혼자 틀어박혀 있던 아버지. 어느 날, 서재에서 나온 아버지의 모습이 하얗고 키도 커 보였으며 후광 같은 게 보였음을 화자는 회상한다. 이 장면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신의 임재 때문에 새하얗게 광채를 내고 있던 것을 회상하는 성경 기자(記者)의 서술을 떠올리게 한다. 서재라는 공간 안에서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상기하고, 선교사로 떠나려는 사명을 되새긴다. 마치 성소와도 같은 공간이다. 신약에서도 예수가 죽은 뒤에야 그의 생애와 언행에 대한 기록이 이루어지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재구성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예수 생전에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도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가 죽은 후였다. 가까이 했던 상대가 부재하게 되자 다시금 그의 생전의 목소리를 복기해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겪은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이 시간적으로는 뒤늦은 것일지라도 부재의 결핍과 안타까움을 메우려는 노력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바둑 대국이 끝나고 한 수 한 수 복기하다 보면 대국중에는 보지 못했던 수를 보게 되고 상대방이 둔 수에 감춰진 의도를 읽게 되는 것과 같다. 항상 뒤늦게 깨닫는다, 세상사란 게 바둑판과 같다, 하고 주름진 얼굴의 외삼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56-57)
「복숭아 향기 」에서도 아버지가 이미 죽고 없는 화자가 등장한다. 우연히 M시로 발령이 나게 된 그는 아버지가 그곳의 신문사에서 일 했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묻는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아들의 기억의 진실여부를 어머니는 직접적으로 확인해주지 않는다.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진실을 "세월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발굴"(51)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외삼촌이다. 화자가 외삼촌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기억하듯, 그의 외삼촌은 대리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외삼촌의 목소리를 통해 서사적으로 재구성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비극에 가깝다. 정신증을 앓던 M시의 재벌 후계자와 M신문사의 똑똑한 여기자의 정략적 결혼. 이 비극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어머니였다. 자신은 "누군가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사람"(66)이니까 이 혼사를 무조건 거절하고 떠나라고 상에 엎드려 우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복숭아 향기에 홀린"것처럼 마음이 움직였다는 그녀. 아버지의 정신증은 점차 심해져 내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주인공을 낳을 때까지 과수원에서 지낸다. 유일하게 시댁에 요구해서 물려받은 복숭아 과수원에 아버지의 묘를 만들고 그곳에서 3년 간 머물렀다. 외삼촌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부모의 과거 이야기가 끝나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온다.
부모에 대해 자신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사실들이 '거짓'이 아니기를 화자는 애타게 바랐다. 부모는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고,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두려움을 느꼈으므로 그는 외삼촌의 진술을 들으며, 진실에 직면하려 애쓴다. 화자는 나름의 '진실'에 도달하고, 실제로 결말부에서는 "여기에서 살아라. 그동안 여태 내가 과수원을 돌봐왔다."(67)라는, 부재한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다.
목소리에 대답하거나 거부하는 일, 환대의 윤리
잘 알려져 있듯이, 레비나스는 호소에 대한 응답(response)과 책임(responsbility)을 주장했다. 과부, 가난한 자, 이방인 등의 약자는 거부할 수 없는 '타자의 얼굴'로 나타나고 그에 대해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환대의 윤리와 마주한다.
「찰스 」에서 찰스는 교수인 김철수가 말레이시아의 학회에 갔다가 여행 가이드로 만난 현지인이다. 한국어가 유창하고, 농담처럼 "제 한국 이름도 김철수에요"라고 말하던 그에게 김철수는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국에서 재회한 찰스는 김철수가 그에게서 들은 것과는 달리 이주노동자였고, 불법체류자였다. 찰스는 철수와의 신분을 이용해 그의 연구실 공간을 몰래 사용하고, 출판사에 교수인 철수의 이름을 팔아 번역일을 몰래 구하려고도 한다.
궁금한 것이 모두 물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음은, 때때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감당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물음들은 그런 자신감 내지 책임감 없이 물어질 수 없다(144)
철수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올 말들과 그것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두려워서 묻지 않기로 한다. 한국에 와서 다시 만난 찰스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사는 곳이 어딘지'를 물으면 돌아올 대답, '집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지기 싫어 그는 더 묻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연구실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 있도록 잠시 빌려줌으로써 최소한의 예의를 베풀 뿐이다. 출입국관리소에서 찰스의 신분을 보장해줄 수 있는지 묻는 전화가 걸려오자 철수는 갑자기 무엇인가가 자신의 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는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 찰스가 애타게 자신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는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말을 들었을 때, 철수는 찰스의 호소에 응답(response)할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터. 철수는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그 호소에 응답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이와는 반대편의 결말로 향하는 것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와 「신의 말을 듣다 」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로 도망치듯 이사를 간 화자. 그녀의 집에 매일같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남자가 나타나고 겁에 질린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하자마자 곧바로 잡힌다. 남자는 건물 벽에 몸을 붙이고 온몸을 하늘로 뻗어 와이파이를 빌려 쓰려고 하던 외국인 노동자였다.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자기 나라의 사이트를 접속하기 위해 필요한 무선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그곳을 계속 서성이게 된 것. "처지가 딱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의를 베풀라는 암시를 꽤 노골적으로 하"(174)는 경찰관의 언행을 화자는 극도로 불편해한다.
무선인터넷에 암호를 걸고, 정기적으로 경찰관의 순찰도 부탁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살던 그녀의 집 앞에 남자는 다시 나타난다. 그는 과일 같은 것들을 한 봉지씩 싸들고 와서, 한국말을 잘하는 친구까지 동원해가며 애원한다. 가족들과 꼭 연락해야하니 무선인터넷을 제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여기서 부탁을 하는 이 남자, 꽤 뻔뻔하게 말한다. "사모님, '선물'해주세요"라고.
교회에서 '가진 것은 다 받은 것이고, 받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주어야 하는 것이요, 선물'이라는 목사의 설교를 들었고, 따라서 선물을 해달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여자는 당황스러워한다. 궂은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여자의 집 앞에서 기다리며 용서를 빌고 애걸하던 남자에게 여자는 결국은 문을 열어주고야 만다. 그녀는 남자의 호소에 응답하고 문을 열어보임으로써 환대의 윤리에 설득된 것처럼 보이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은 남아있다. 자신을 오랫동안 '피해자'의 위치에 둠으로써 "빚진 것이 없으므로 책임질 것이 없고", "기본적으로 요구를 받는 자가 아니라, 요구하는 자 요구할 권리를 가진자"(184)로 스스로를 여겼던 그녀가 외국인 노동자의 출현으로 인해 그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혹은 그렇게 해야한다는) 소설 속 화자(혹은 작가의)인식은 동의하기 어렵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오랫동안 시달려 외부에 대한 공포로 움츠리게 된 여성보다 '외국인 노동자'가 더 약자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을까. 게다가 소설 속에서 그 윤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기독교 교회의 설교이다.
「신의 말을 듣다 」역시 신의 목소리가 친구의 목소리로 옮겨오며, 그것을 체화한 이가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변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일종의 당위이자 책무성으로 제시되는 '환대의 윤리'를 소설 안에서 그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시도인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신'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그에 따라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게 된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늘 의문스럽다.
아버지를 경유해 존재의 근원을 찾고 윤리적 구원에 도달해가는 과정에서 여성인물들이 지속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싶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모르는 사람들 」), 그를 위해 참고 인내한다(「복숭아 향기 」). 남편으로부터 오랫동안 끔찍한 폭력을 당해온 여성 개인의 서사 또한 '누구도 순수한 피해자일 수 없다'는 보편성의 논리와 '가난한 외국인 남성 노동자' 앞에서 쉽게 탈각되어 버린다. (「넘어가지 않습니다 」)
***
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문학나눔 붘어1기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