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 시대의 강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고민들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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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무살 이후로 꽤나 오랫동안 진로를 두고 방황하며 갈팡질팡했다. (사실 지금도 그 고민은 끝나지 않았지만) 공무원 시험이나 현실적인 취업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준비하던 것들을 싹 뒤집어엎는 일들이 계속됐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겐 남들에게 내세울 이력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고 싶었던 일을 진득하니 파서 실력을 쌓은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왜 나는 현실적으로 세상에 잘 뿌리내리고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쭉 밀고 나가며 버티지도 못하는가. 오랫동안 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스스로가 괴로워 상담까지 받아가며 고민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동안의 나는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 버틸 힘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하는 세상의 목소리를 인정하며 살아가기엔 자아가 너무 강했고, 그 목소리에 팽팽하게 대결하며 살기엔 너무 나약했던 건 아닌지.



2.

  정지우 작가의 글이라면, 일단은 시선을 집중하고 그의 잔잔히 흐르는 사유를 따라가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잠깐 대학원 신문사에서 일할 때, 그는 칼럼을 고정적으로 써주는 성실한 작가이기도 했는데 그의 글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만족감을 전해주었으니까. 그렇다고 그의 책을 열심히 챙겨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번 책만큼은 반가운 마음으로 펴서 읽었다.



  전작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의 연장선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과잉되게 의식해서 '좋아요'라는 수치로 환원되는 관심에 목을 매거나 소비를 과시하고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패턴에 매몰되어 중심을 잃어버리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 여기서는 유튜브로 이어진다.

유튜브는 조회수가 직접적으로 수익과 연결되기 때문에 자극적인 콘텐츠에 몰두할 유혹이 더 큰데, 한국의 유명 유튜버들이 유독 적군과 아군을 가르고 누군가를 '저격'하는 콘텐츠를 많이 생산하는 건 조금만 둘러봐도 쉽게 깨닫게 된다. 저자는 최근 들어 한국의 디지털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단순히 독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 온라인 세계에 폭넓게 퍼진 이분법적 대립 구조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나와 의견이 같은 아군, 나와 의견이 다른 적군을 가르고 저격에 저격, 반론에 반론이 꼬리를 물며 서로를 헐뜯고 거기에 동조하는 댓글들이 달린다. 이러한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한국 사회의 각종 집단 갈등, 혐오, 차별"을 심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군/아군으로 쉽게 나누는 프레임은 타인을 단순하고 폭력적으로 규정하게 되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


  요즘 지나치게 유행하는 MBTI에 대한 저자의 조심스러운 비판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제가 MBTI가 P이다보니 계획적이지 못해서 과제를 늦게 낼 예정이에요'라는 환원론적이고 결과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부터 특정 MBTI를 지정해서 채용을 하거나 혹은 배제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보다보면 유독 한국인들은 타인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규정하는 틀을 좋아하구나 싶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건 섬세한 관찰을 동반한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사랑하겠다는 것은 그 존재를 쉽게 규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류하기보다는 존재의 작은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애쓰고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에 가까울 것이다."(25)


  오히려 누군가를 굳이 깊게 이해하고 싶지 않을 때, 혹은 그런 노력이 귀찮을 때 쉽게 어떤 틀에 넣어서 '아, 그 사람은 이런 성향이니 이런 행동을 하는 수밖에 없어'하고 결론을 내려버리고 내 관찰과 사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타인을 쉽게 규정하지 않고 섬세하게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저자의 시선과 노력은 그간 오랫동안 인문학을 공부해온 데에 기반할 것이고,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깊이 있는 통찰력과 따뜻한 온도는 그런 데서 오는 듯하다.



3.

  타인을 쉽게 비난하고 규정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상대를 비난하는 논리로 '그건 너의 선택이니 그걸 책임지는 것도 너의 몫이야'라는 잔인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비판도 뼈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선택지 자체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선택은 자유롭지 않고 강요된 선택이 더 많다. 저자는 이렇게 선택이란 "완전히 자발적인 경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으므로 "타인의 선택을 나와 무관한 거라 생각하고 비난하기보다는 타인의 선택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고 공감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주장한다.


  몇 살에는 결혼을 해야하고, 몇 살에는 어느 정도 돈을 모아야 하고, 집은 어느 정도로 마련해야 하고, 소비는 이 정도는 되어야한다는 기준이 온갖 SNS와 재력을 갖춘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매체를 통해 전시된다. 그걸 보는 동안 개인들은 한없이 위축되고 이 사회는 끊임없이 기준에 미달되어 있고 뒤처져있다고 엉덩이를 떠밀며 이들을 재촉한다. 나는 어느 순간 그 강도가 더 세지고 가혹해져가는 것 같아 갑갑함을 느끼면서도 거기에 저항해야할 힘이나 나만의 논리 같은 걸 내 안에 견고하게 갖추고 있지는 못해 더욱 괴로울 때가 있었다. 정지우 작가는 그걸 갖춘 단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던 건, 이번에 아예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게된 후였다.


  인문학을 오래 공부해왔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정말 사회에 맞서 싸울 실질적인 논리나 힘을 갖추지 못해서 어딘가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 결혼 후 책임져야 할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다 안정적으로 지켜주고 싶다는 간절함, 이런 것들이 그를 인문학과는 정반대의 접근을 취하고 있는 법의 세계에 발을 담그게 했다. 정지우 작가가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고 변호사가 되었다니... 사실 좀 충격적이었지만, 이 땅에 더 비짝 몸을 붙인 채 세상과 싸울 무기를 고민하고 갖추게 된 뒤 쓴 글이라 그런지 더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내용이 많았다. 그는 여전히 SNS로 오가는 피상적인 관계 대신 책읽기와 글쓰기로 연결된 모임들을 이어나가고 직접적으로 사람들과 부딪치며 세상과 맞서 싸우는 힘을 계속 안에서 길러가며 전투를 벌여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에게는 타인들에게 덜 민감한, 나 스스로 자족하는 자리가 얼마나 있는가. 또 그런 공간이 내 안에서 어디쯤 있는가를 확인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저 내가 나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호숫가 오두막같은 자리 하나가 내면에 지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279)


  나의 내면에는 그런 자리가 얼마나 확보되어 있을까. 중년을 바라보게 된 지금에 와서야 그런 오두막 같은 자리를 내 안에 어떻게든 만들어놓지 않으면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회의 목소리에 휩쓸려나가버리고 말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대가 왔다고. 저자는 그런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이면서 세상의 목소리에 맞서 싸울 힘을 실질적이고도 치열하게 만들어나가고 다른 이들에게 퍼뜨려나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글이 그런 의미에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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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길의 왼쪽 - 황선미 산문집
황선미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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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을 쓴 바로 그 황선미 작가의 산문집이다.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인기를 끌었지만, 나는 8년 전쯤 책만 읽어봤다. 하지만 결론부에 가서 받았던 충격 만큼은 잊혀지질 않는다.

아동 소설인데 이렇게 처절한 비극으로 끝맺어도 될까? 뭐 이런 의아함이었는데,

그것도 편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운 끝맺음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비극적인 세계인식을 하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황선미 작가를 섭외할 일이 있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어딘가 차분하고 냉랭해보이는 목소리를 지닌 작가는 단호하고 정중하게 내 청을 거절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한참 인기를 끌 때라 바쁠 거라 생각은 했기 때문에 크게 기대도 안했지만 너무나 여지를 주지 않는 거절이었다. 하지만 이후 만나게 된 황선미 작가에게 글을 배웠다던 분들은 그분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정도로 다들 스승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이 보여서 원래 그렇게 차분하고 단정한 분이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좀더 인간적인 날것 그대로가 나타난 작가의 모습이 궁금해져서 책을 집어들었다.

1부는 지금의 작가를 만든 상처나 어린 시절의 결핍, 가족 이야기들이 나오고 2부는 일상, 3부는 여행에세이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1부가 좋았다.

작가 본인도 쓰고 있지만, 이렇게나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데다가 다정하고 지지적인 남편과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우울하고 쓸쓸하단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많이 쓰냐고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의 성향이나 근본적으로 지닌 고독감이나 외로움은 개인차가 있는 것이어서 그런 식으로 밖

에서 재단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나 역시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톡홀름 대학 강연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미 첫 책으로 강연을 두 차례 했으니 새로 번역된 작품으로 행사를 하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당연한 제안인데 문제는 내가 원작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 왜 이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책이 번역돼 있으니 서점에서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책을 공수받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서점에 들러 내 책을 찾아보았다. 소설 코너. 두툼한 틈에 <푸른 개 장발>이 꽂혀 있었다. 책을 빼내자 직원이 웃으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설명을 한다. 나는 내 사진이 실려 있는 부분을 펴서 보여주며 이게 나라고 말해주었다. 그가 놀라서 또 뭐라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하더니 서명을 해달란다. 내 이름을 한글로 커다랗게 남겨주었다.

(194~195쪽)

이런 장면은 어째 부러움이 꽤나 크게 몰려왔다. 외국의 서점에 가서 "이게 나요!"하고 책날개의

표지 사진을 보여주는 인증이 가능하다니!! 역시 세계적인 작가이긴 하다.

***

앞서 언급했듯, 1부를 읽다 보면 작가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가난으로부터 겪은 상처나 결핍이 꽤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을 서릿한 언어로 담담하게 표현해내는 걸 보면, 역시나 글

잘 쓰는 작가가 맞구나 싶고.

남의 둥지에 뻐꾸기가 새끼를 낳고나면, 그 새끼들이 자라서 원래 주인의 새끼들을 둥지밖으로

밀어버리는데 그것에 대한 맹렬한 분노를 표현한 걸 보면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고, 어머니에 대

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새끼를 핥는 짐승 어미처럼 눈을 혀로 핥아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눈병을 낫게해 준 어머니의 일화를 떠올리는 부분은 정말 '동물적'으로 '감각적'이란

생각도 든다.

참담하고 슬프다.

우리의 눈은 어떤 등에 가려져 있나. 진실에 접근해갈수록 얼마나 더 배신을 당해야할까.내 둥지에서 내 새끼가 떨어져 죽는 이 현실에 뼈가 아프다. 부끄럽고 분노가 치민다. 얼룩덜룩한 뻐꾸기의 그 깃털과 부리가 찢어져라 벌려대는 그 붉은 입에 구토가 인다. 나를 어지럽히는 뻐꾸기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다.

(29쪽)

 

엄마는 그날 왜 그랬을까.

그날 처음으로 엄마를 뜨겁게 , 동물적으로 기억하게 됐다.

다래끼 때문에 여러날 고생하던 중이었다. 병원도 약도 쉽지 않았던 가난한 집이라 결국 종기가 눈을 덮어버렸는데 새벽녘 잠결에 엄마의 행위를 경험하고 말았다. 엄마의 뜨겁고 거친 혓바닥이 내 눈을 핥았던 것이다. 개가 새끼를 핥아주듯 곪고 짓무른 상처를 구석구석. 혀끝이 농으로 붙어버린 눈꺼풀을 녹이고 파고들어 욱신거리는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나의 온 신경이 깨어나 뻣뻣하게 마비되고 소름이 돋았다.

"밤새 입속에는 독이 고여서 곪은 걸 잡을 수 있어."

엄마의 지독한 입 냄새. 뜨거운 체온. 꼭 짐승의 혓바닥처럼 거칠던 감촉. 물도 못 마셔 바삭하게 들리던 숨소리. 어둡고 긴 동굴처럼 느껴지던 목구멍의 공명. 그 모든 게 동시에 나를 뒤덮었다. 나는 두려웠고 동시에 온전하게 무방비의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을 맞았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지독한 사람이었고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입을 연 적이 없다. 나을 때가 돼서 나았는지 다래끼의 독을 엄마 입 속의 더 지독한 독이 잡았는지 알 수 없으나 내 눈은 멀쩡하게 1.5 시력을 한동안 유지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

(32~33쪽)

 

이 장면 하나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사실 뒷부분은 읽으면서도 크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청소년, 아동 소설들이 지닌 말랑하고 옅은 분위기,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는 '성인 화자가 아이인

척'하는 어색한 목소리 때문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물론 잘 쓴 몇몇 소설들은 그렇지 않다)

황선미 작가는 애초에 그런 '척' 같은 건 하지도 않는 듯하다.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 자체를

하지 않으니까.이렇게 동물적인 감각으로 접근하는 어린 시절의 세계가 오히려 더 직접적으로 닿

 아있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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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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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딘가 모르게 반응이 느리고, 빠릿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주인공 미숙.

친구들은 그녀를 '미숙아'라고 부른다. 이름에 호격조사 '아'를 붙인 상태가 아니라 어딘가 미숙해보이는 아이라는 조롱조로.

 이 만화는 미숙의 십대 시절부터 스무살이 되어 독립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성숙의 상태'라는 도달점을 상정하는 성장소설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지 않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딘가는 미숙하지 않은가.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미숙의 상태에서 성숙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신화에도 나는 늘 의문을 가진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상처가 쌓여가며 점차 더 움츠러들고, 남에게 방어적으로 변해가지 않던가.




그럼에도 <올해의 미숙>은 보다 더 씩씩해지고 당당해져가는 미숙의 과정을 담았다.

좋은 시를 쓰겠다는 자신의 꿈 때문에 생계를 위한 노동을 따로 하지 않는 아버지,

이 때문에 끊임없이 부업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미숙과 정숙 자매는 가난하게 자란다.

언니 정숙은 시를 쓰겠다는 꿈을 어릴 때 잠시 가지지만,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비뚤어지기 시작한다.

미숙은 언니를 보며 "무너지고 있었"다라고, 느끼고 "희망이 절망하고 있었"다며 안타까워한다.

아버지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으로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안의 분노를 꾹꾹 눌러두던 정숙은 미숙을 때리기 시작한다.

만화 안에서 때리는 장면은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언니인 정숙이 미숙을 때렸다는 것은 한 컷도 없이 설명만으로 제시된다. 밤마다 다정하게 누워 언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던 미숙에게는 그만큼 떠올리기 힘든 경험이었을지도.



  

**

미숙은 먼저, 재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일종의 돌파구를 잠시 찾는다.

자신을 '미숙아'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재이는 미숙을 대신해 그녀를 놀리는 아이에게 화를 대신 내고, 서로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으며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재이는 미숙의 가족 이야기를 팔아서 소설에 당선되며, 그것에 대해 미숙에게 아무런 말도 미리 해주지 않는다.

왜 자기 이야기를 허락도 없이 쓰냐는 말에 재이는 그저 '소설'일 뿐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자신의 깊은 컴플렉스를 허락없이 훔쳐간 친구에게 화를 내자 재이는 "뭐래 쪼다년이"라는 폭력적인 말로 되돌려주며 둘의 관계는 끝이 난다.



재이가 의도적으로 이야깃거리를 위해 미숙에게 접근한 것 같지는 않다.

재이 역시 부모님이 이혼한 상태였고, 미숙에게 적극적인 것은 그녀 쪽이었다.

소설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져다 쓸 때, 그것에 대한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재이 말대로 그저 소설일 뿐 현실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온 마음을 열어 내보인 가장 가까운 친구의 상처를 이야기 소재로 가져다 쓸 때에 재이도 분명히 떳떳하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에 상을 타기 전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것. 재이는 이후로 만화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어른이 된 뒤에도 성공한 소설가가 되어 책을

출간하고 여전히 미숙을 궁금해한다는 근황이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이후에도 책을 냈던 것을 보면, 재이는 어쨌거나 문학적 재능이 있었을 것이고 친구의 이야기를 가져다 쓴다고 한 들 소설적으로 잘 구성해냈겠지만, 미숙은 그녀로부터 큰 상처를 입는다.


 


***

미숙이 마음을 쏟는 또다른 대상은 아버지가 데려온 강아지 '절미'이다.

아버지는 강아지가 진돗개인 줄 알고 없는 살림에 백숙을 고아 먹이고, 돼지 뼈도 던져주지만

강아지는 알고 보니 혼혈이었다. 아버지 마음대로 '진도'라고 불린 강아지는 똥을 먹고 몸집도 커지지 않자 더 이상 미숙의 아버지는 강아지를 돌보지 않는다. 그렇게 버려진 강아지를 미숙은 '절미'라고 부르며 정성껏 돌본다.


"아껴 줄 거면, 끝까지 아껴 주지. 씨이발"


미숙이 내뱉는 이 욕설에는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게 압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상대를 향해 시작한 애정과 관심을 쉽사리 철회하지 않는 것.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계산하지 않고 진심을 다하는 것.


 

재이에게 큰 상처를 입은 미숙은 고등학교도 그만두고 동네 도서관을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거기서 우연히 알게 된 겸재와의 만남에서 적극적인 것은 미숙이다.

미숙은 이제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먼저 궁금한 것을 묻고 -"왜 같은 시간에 커피를 드세요"

소박한 친절을 보이는 그에게 먼저 마음을 표현한다. -"그럼 우리 사귈까요?"

 

아버지와 언니가 병으로 죽고, 취직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해 절미와 함께 집을 나오는 마지막 장면보다는 겸재를 당당하게 대하는 미숙의 모습이 사실 더 인상적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철저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제 단단해졌고,

누군가의 물음이 자신에게 던져진 후에야 우물쭈물 겨우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이었을텐데도 미숙은 더 적극적으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미숙의 진정한 성장은 이미 그 때 이루어졌다.

아니, 그녀는 상처로 움츠러들지 않는 사람이기에 '미숙아'가 아니라 원래 성숙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

만화에서 제시되는 깨알같은 장면들을 보며 나와 같은 세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때 참 많이도 보였던 '영화마을'이라는 비디오 가게, 권여선 작가의 등단작 <푸르른 틈새>도 나온다.

1999년에 고등학교를 입학한 미숙은 나와 동갑이다.

동갑내기 여자아이의 어설픔과 아픔, 그리고 당당함을 나란히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십대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그동안의 일들이 "먼 과거"가 아니라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미숙.

그리고 책의 제목인 "올해의 미숙"

시간을 뒤집어놓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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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셀렉트 북 - 로컬 트렌드세터가 추천하는 도쿄 아이템 250
강한나 지음 / 니들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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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여행자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가 나왔다.

저자는 일본 연예게 진출 7년차이며, 작가나 시인으로도 활동 중인 로컬 방송인으로 NHK 프로그램 2개에 고정으로 출연할 만큼

활발하게 활동 중인 사람이라고.

어쨌거나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최신 트렌드를 발빠르게 알리는 데 앞장서는 사람인 듯하다.

책은 그래서 소위 '도쿄통'인 사람이 2018년 현재 가장 핫한 가게와 상품들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형식이다.




1. 도쿄는 커피 마니아들의 성지

2. 일본 직장인들이 줄을 서는 점심식사

3. 책을 좋아하는 당신을 위한 서점 기행

4. 가성비 좋고 맛도 좋은 디너

5. 일본 드럭스토어를 털어라!

6. 일본 편의점을 털어라!

7. 이치란, 잇푸도는 이제 식상하다! 일본 최고의 라멘을 찾아서

8. 아름다운 사진 한 장 남기고픈 당신을 위해

9. 꼭 한 번 먹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빵집들

10. 도쿄는 카레 천국

11. 패셔니스타들의 단골집

12. 오마모리 콜렉션

13. 레트로풍 카페로 떠난 시간 여행

14. 녹차 마니아들이 사랑하는 도쿄

15. 도쿄의 팬케이크 열풍

16. 로맨틱한 도쿄 커플 여행

17. 팔로우미 팔로우미 도쿄 뷰티!

18. 일본의 신기방통한 문방구 쇼핑

19. 싸고 맛있게 배를 채우기

20. 노곤한 오후의 달달한 휴식

21. 일본 연예인들의 단골 가게

22. 술 한잔 기울이며

23. 도쿄 사람들의 치즈 사랑

24. 도쿄 기념 선물로 뭘 사가지?

25. 도쿄에서 떠나느 요코하마 쁘띠 여행



 이 정도면 거의 백과사전급이라고 생각한다. 도쿄의 유명한 카페나 맛집 등을 알려주는 책들이야 기존에 많이 나와있지만,

지금껏 접해본 책들 중 가장 자세하고 정보가 많다. 최신의 트렌드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구성 자체가 정말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함이 담겨있다. 일부러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녹차나 치즈, 팬케이크 점을 따로 항목을 만들어 가게들을 설명하고 있다거나 요즘 유행하는 문구류나 가성비 좋은 화장품, 드럭스토어나 편의점의 인기 물품을 소개하는 항목이 그렇다. 정말 2018년 현재 가장 인기가 많은 항목들이 담겨 있고 가격과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 구매시 유의점 같은 것들을 밑에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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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계절 - 김지훈 이야기 산문집
김지훈 지음 / 니들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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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사실, 이런 식의 사랑 에세이는 잘 읽지 않는데, 지인의 소개로 읽게 되었다.

앞페이지를 조금 읽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80년대를 풍미했던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90년대에 히트했던 원태연의 <넌 가끔 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 가다 딴생각을 해>였다. 작가는 90년대 생으로 20대 후반이니까 위의 시인들이 해당 시집으로 인기를 끌었을 나이와 얼추 비슷할 것 같다.

 

나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십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원태연의 시집과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 얼마나 당대 대중들의 감성을

파고들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나 또한 그의 시집에 있던 구절들을 다이어리에 열심히 옮겨 적고,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내며 함께

그 말랑말랑한 연애시들을 공유했다. 물론 그의 산문집도 좋았다. 딱히 연애란 걸 해보지도 못한 나이였지만, 이렇게 쉽게 잘 읽히면서도

절절하게 와닿는 문장들이라니.


 

2.

물론 20대 이후로 나는 더이상 이런 것들을 읽지 않는다. 순수문학을 전공하면서 이런 것들이 우습게 보이게 된 것도 사실이다.

'저런 게 무슨 시이고 에세이야?'라는 생각들. 너무 쉽고 뻔한 언어들로 뻔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들을 쓰는 게 그냥 지루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런 굳어버린 판단들을 조금 제쳐놓고 읽어보자고 다짐했다.

정말 특별한 나이대에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감성들이 아니던가. 아직 사랑이 미숙하고 서툴고, 엄청나게 예쁘고 거대한 환상 속에서

사랑만을 바라보던 시기.물론,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3.

책을 읽을 때 오는 '공감(共感)'이라는 정서에 대해 생각한다.

비슷한 것을 경험했을 때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고, 내가 경험하지 못했지만 정말 기묘한 인식의 깨달음이 전달되었을 때 오는 희열감일 수도 있다. 아마 이 책은 철저히 전자에 충실한 것일테지.


저자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이 책의 내용을 조금 요약해보자.

그는 건널목 앞에서 운명의 그녀를 만났다. 무턱대고 다가가 전화번호를 묻고 '데스티니'라고 저장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운명이라고 느껴졌고 처음으로 연락처를 물어봤다고. 그리고 그녀가 화가일거라고, (사실은 화가이기를)기대했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페이스북에서 찾은 그녀 사진의 옆에는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

어쨌든 기적적으로(?) 그녀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고, 그녀와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니었고, 승무원이었다.

둘은 사랑을 나눴고, 싸우기도 했고, 질투도 했고, 결국은 사랑에 대한 기대와 온도차로 헤어졌다.

저자는 그 사랑과 이별의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

 

 

4.

사실은 정말 '보통의 사랑' 이야기다. 첫눈에 누군가에게 반해서 운명처럼 느끼고 그와 연애를 하고 헤어지는 서사는 영화와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저자의 이야기도, 문체도 사실은 굉장히 평범하다. '사랑'과 '예쁨'이라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 있어 그녀는 정말 예뻤나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누군가에게 공감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건 그만큼 평범하고 흔하기 때문에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



5.

 

지금은 페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하지 않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어서 공유되는 정서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자는 SNS에서 주로 글쓰기를 해오고 소통을 하고 있는 듯하다. 2000년대에 유행했던 싸이월드의 글들을 생각해보면 될 듯하다.

잘 읽히고, 쉬운 단어들과 적당히 반복과 대칭구조를 이루는 문장들. 사랑은 이런 것, 이별은 이런 것, 나는 이러했고, 너는 이러했고

이런 식의 이분법과 격언식의 문장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호응을 얻는다.

위에 쓴 원태연의 시집 제목도 그 예이다. 너는 가끔 내 생각을 한다면 나는 (온종일 네 생각만 하다가) 가끔 딴 생각을 한다는 식.

아마 이 책도 그런 글쓰기의 연장 선에서 나온 책같다. 일기와 독백조에 가까운 읊조림과 편안한 구어체.


어쨌거나, 저자가 섬세하고 꼼꼼한 캐릭터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연애를 했던 사람과 나눴던 대화나 상황들을 이만큼 꼼꼼하고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적어도 그는 이렇게나 꼼꼼하고 세세하게 기록했으니, 그 사랑과 이별의 기록만큼은 절대 증발하지 않겠구나, 싶다.


이별을 온전히 견디겠다고, 잊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부단히 다짐하는 듯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이렇게 책으로 세세히 기록해도 바람 결에 날아가는 모래처럼 결국엔 사라져가는 것이 기억이거늘.

운명이라고 느낄만큼 강력하고 인상적인 사랑이었다면, 가슴 한 켠에 오래오래 잘 남겨둬도 되지 않을까.

이별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철칙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이별한 지 오래되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이별한지 얼마 안 되도 깡그리 잊혀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니.

현재의 사람과만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겠다. 지난 사랑도 사랑이고, 그것 또한 따뜻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두 가지 사랑이 나름의 다른 색깔로 진행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슴에 묻어둔 과거의 사랑도 진행중이고, 현재 만나는 사람도

생생하게 진행 중인 어떤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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