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생각하느라 꽃을 피웠을 뿐이에요
나태주 엮음, 한아롱 그림 / 니들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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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나 기획의도가 좀 애매한 책이다.

사실, 나태주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드라마 <학교 2012>에서 이종석과 장나라가 <풀꽃>을

낭송하는 장면들 때문이었던 듯하고 (정확한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젊은 기간제교사의 애정어린 교육관과 문제학생의 교감이 바탕이 되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던 것 같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다.



나태주 시인이 자신의 시와 여러 시편들을 엮었는데 봄을 맞이하여 인생과 봄에 대한 시를 엮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와 다른 시편들이 섞여있는 느낌이고 1장.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2장. 사랑하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3. 삶이란 무엇일까요 4. 희망은 어디에 깃들었을까요 라는 목차에 들어있지만, 딱히 그 제목에 맞게 시편들이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 시들도 천차만별이라서,그 시가 '선택된' 이유라든가

자작시라면 저자가 그 시를 쓰게 된 배경이나 이유, 다른 시인의 시라면 그 시가 어떤 주제를 담고 있으며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그 시를 선택했는지의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예쁜 삽화가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요즘 그런 책들이야 한둘이 아니고.

시집에는 예쁜 삽화가 수록되어있어야 한다는 구성도 사실 좀 식상하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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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풀꽃>은 참 좋았는데-이 시를 알게 된 뒤로 정말로 풀꽃을 볼 때면 한번쯤 자세를 낮추고 자세히 들여다 보는 일이 생겼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좋은 것들도 있고, 정말 별로인 것도 가끔 있고 그렇다.



내가 나를 칭찬함 (나태주)


오늘도 흰 구름을 나는

흰 구름이 아니라고 억지로

우기지 않았음



오늘도 풀꽃을 만나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얼굴 돌려 외면하지 않았음



이것이 오늘 내가 나를 진정

칭찬해주고 싶은 항목임



당신도 부디 당신 자신을

칭찬해주시기 바란다




이런 시는 개인적으로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비슷한 어구와 단어를 반복해서 '시의 형태'와 비슷한 어떤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경구와 교훈의 나열이 담긴 시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포옹1 (나태주)


남자가 여자를 안아주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남자의 포옹이 정복과 소유와 관용의 표현이라면

여자의 포옹은 용서와 자비와 안식의 표현이다

여자가 남자를 안아줄 때 남자들은 거센 갈기를 내리고

순한 짐승이 되고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된다

알았어요 예 그렇게 할게요

백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는 포로가 된다

세상의 여자들이여 남자들을 안아주라

그러면 당신의 남자들은 모두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머리 조아려 안겨 오는 순한 짐승이 되고

사랑스런 아이가 될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안아주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남자들의 포옹에는 부성이 들어 있지 않지만

여자들의 포옹에는 늘 모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여자들이여

날마다 순간마다 당신의 남나들을 안아주라

그러면 당신의 남자들이 행복할 것이고

당신도 행복해질 것이다



 이 시는 읽고 기염을 토했다. 미투 운동이 퍼져나가고 있는 시대에 이런 도식적이고 젠더감수성 없는 이분법이라니. 결국 부드러운 모성의 방식으로 남자들을 안아줄 때 남자들은 항복하고 행복해지고 그러면 여성도 행복해진다는 결론. 최근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여성을

존중한답시고 "남존여비! 남자의 존재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있다"라는 건배사를 외치는 남성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들이 미투운동을 하는 것은 남성 위에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다. '양성평등',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것을 외치는 것인데 마치 여성들이 남성 위에 군림하려는 듯한 두려움을 모호하게 감추고 '그래, 내가 져줄게'라는 시혜의식을 농담처럼 발휘하던 그 불편한 대사와 '모성' .부드러운 포옹'을 여성만이 지닌 어떤 속성으로 신화화하고 그걸 적극적으로 발휘하라는 노골적인 메시지가 담긴 이 시는 거리가 멀지 않다.




물론 낭만적인 시들도 있다.



지평선(막스 자코브)


너의 하얀 팔이

나의 지평선 전부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팔 안에 안겨 나른하게 잠들어본 사람이라면, 이 시를 보며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넉넉하고 편안한 품은 지금 이 순간 나와 그의 세계의 전부인 것 같고, 그 팔 너머로의 세계는 아늑하게만 느껴지는....




노래(이시카와 다쿠보쿠)


헤어지고 나서

해가 갈수록

보고 싶은 너



이시가리 교외에 있는

너의 집 뜨락

능금나무 꽃이 떨어졌으리



길고 긴 편지

3년 동안 세 번 왔지

내가 쓴 편지는 네 번인데.



하이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화자에게 답장을 더이상 보내지 않는 '너'에 대한 약간의 원망과 미련과 그리움이

한 데 뭉쳐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답장을 보내지 않는 무심함에 원망스럽다가도 해가 지날수록 계속 그리워지는 마음이 느껴진다.




메시지(자끄 프레베르)


누군가가 연 문

누군가가 닫은 문

누군가가 앉은 의자

누군가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가 깨물은 과일

누군가가 읽은 편지

누군가가 쓰러뜨린 의자

누군가가 연 문

누군가가 아직도 달리는 거리

누군가가 건너가는 숲

누군가가 몸을 던지는 강

누군가가 죽은 병원.

 


 이런 시도 있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가 닫았고, 의자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과일을 깨물었으며 편지를 읽었다.

의자를 쓰러뜨리고는 문을 열어 달려 숲으로 건너갔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과정을 담담하게 '누군가가'로 적은 이 시는

'누군가'가 남긴 행동의 흔적들을 통해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화자의 고투일까.




***

 나는 시전공도 아니고, 시를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어서 시를 보는 눈따위 있을리는 없지만,

그래도 시가 지닌 어떤 함축성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애매모호함같은 것들이 좋다.

'우리 인생은 이런 것이니 이렇게 살아라'라는 경구는 문학스럽지 않게 너무 답을 제시해주는 느낌이라 반감이 든다고 해야하나.


어쨌거나 이런 식의 시가 어쩔 때는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어쩔 때는 식상함과 지루함을 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그 메시지가 올바름을 지니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든다면.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짧은 시편들이 사실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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