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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르고 후회해도 결국엔 다 괜찮은 일들
이소연 지음 / 예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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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다른 측면을 깨달았다. 혼자 하는 여행은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경험이라는 점. 세상 어디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대개의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친절하다는 점(...) 혼자 다니다 보면 필연적으로 '낯선 타인들'과 마주치게 된다. 낯선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어야 하고, 때로는 낯선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깊은 속이야기를 털어넣기도 한다. 익숙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타인들의 존재에 민감해진다. (...) 어느덧 혼자 여행 15년차에 접어든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람은 원래 친절한 존재다. 그 친절을 통해 우리는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혼자 하는 여행을 통해 나는 세상과 연결된다. (25~27쪽)

 

 사람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평소처럼' 대답을 해야 했다. 내 속은 나를 이런 자리로 끌고 온 친구에 대한 원망으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전염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점점 그 자리가 편안해졌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기억이 났다. 아련한 추억처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런 외출이 얼마 만이었던가. 나는 잊고 있었던 거다. 혼자 거대한 우울을 끌어안고 씨름하던 시간 동안, 사람들과 나누는 떠들썩한 만남의 즐거움을,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처럼 까맣게 기억에서 지우고 있었던 거다. (42~43쪽)

 

10년 전에 내가 만나던 사람들과, 현재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명단은 거의 겹치지 않는다. 즉 주변 사람들의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52쪽)

 

 

 

 

 이 책을 펴들고 맨 처음 읽은 장은 '쏘가리-옛 선생님께 전화를 걸다'라는 장이었다. 우연히 떠오른 옛 선생님,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서 연락했던 선생님은 바로 저자를 기억해주진 않았지만, 사실 선생님 앞에서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려고

29살짜리 젊디젊은 선생님을 당혹스럽게 했던 그 여고생을 선생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은 퇴직을 하고 쏘가리를 직접 키우고 계셨다는. 내가 이 장을 고른 것은 실제로 얼마 전에 내가 바로 은사 님을 17년 만에 직장에서 재회하는

독특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나를 기억하실까?'

하는 묘한 기대와 설렘, 그리고 어떻게 변화하셨을까 하는 궁금증... 그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서 몇 날 며칠을 기다리고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뵈었을 때, 선생님은 용케도 중학교 때의 나를 기억하고 계셨고 나는 주름살만 늘었을 뿐 변함이 없는

선생님의 젠틀한 모습과 나를 반가워하는 표정에 그 때의 중학생처럼 단숨에 달려가 선생님을 감격어린 눈으로 쳐다보며인사를 했다.

교감 선생님이 되어 다시 뵙게 된 나의 옛선생님은 이젠 존댓말로

"오랜만이네요. 정말 반갑습니다."라며 악수를 권하셨고 나는 선생님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감격에 겨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이 책의 여러 일화들과 저자의 생각들은 누구라도 경험했을 법한, 그리고 누구라도 한번쯤은 생각해봤을만한 것들이 저자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담담하게 그려져있다. 한 때는 죽자살자 사랑했을 연인과의 이별,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우연처럼

다른 곳에서 만나 그와 악수를 나눴을 때 느껴진 서늘한 감촉, '오래갈 사이'라는 애매한 관계 안에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묘한 포장지로 묶어 두고 바라보는

시선들...

 

 

 

 

드라마 PD인 작가의 말처럼, 때로는 드라마에서처럼 우연이지만 때로는 간절한 바람이 끌어온 것만 같은 기적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길 꿈꿀 때가 있다. 그렇게도 미워하고 그리워했던 그 사람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게 면박을 주고 떠나버렸던 얄미운 그 썸남은 뭐하면서 살고 있을까, 딱히 연락을 하고 수소문을 해서 만나려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나기는 그런 사이라면 결국 '우연'에 기대어 서로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으로 어떤 인력에 의해 스르르 밀려오듯, 그렇게 끌려와 마주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과 눈빛을 가진 사람이 매력있다고 느끼는데

이 책의 작가가 딱 그런 느낌이다. 얼굴을 본 적도 없지만, 그냥 엄청 매력있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잘 입은 채 나이들어가고 있는 여성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독특한 색깔을 뿜어내는 글을 쓰고 있겠지.

나이가 들면서 이제 존재만으로 싱싱함을 뿜어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은 나와 거리가 멀어졌고, 이젠 지나온 나의 찌질하고 바보같은 삶 조차도 그냥 그렇게 잘 어우러져 '나'라는 인간을 조금은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색깔을 지닌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아우라를 감싸고 있는 이 책과 같은 글을,

나도 언젠가는 쓰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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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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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전화. 그 전화조차도 우리를 더는 연결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노폴리에서 바깥세상으로 나갔을 때, 그 관계를 지탱해준 것이 이 모노폴리의 룰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채고 말았다. 우리 사이에는 이미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건 끝나 있었다. 단지 정해진 룰 안에서 그 게임을 지속했을 뿐이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낸 그 며칠 간이 그 룰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닫게 해버린 것이다.

다만, 내 안에는 작은 아픔이 남아있다.

그때.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그 비행기 안에서 우리에게 전화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74쪽)

 

 

 "죽음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게 있지. 그건 바로 삶이야." (86쪽)

 

 

내 인생이 영화라면. 나는 엔딩롤이 끝난 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화이고 싶다. 작고 밋밋한 영화일지라도 그 영화에서 위안과 격려를 받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엔딩롤 후에도 인생은 계속된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내 인생이 계속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111쪽)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게 아니고, 미래에서 현재로 흘러온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분명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무한한 미래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미래가 유한하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내 안에서는 미래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진즉에 확정된 미래를 내가 걸어간다. 그런 감각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생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선고받은 데다 시간이 없는 세상에 내던져진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난생처음 내 의지로 미래를 바라보려 하는 것이다. (138쪽)

 

 

 가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은 '행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단지 피로 이어져 있을 뿐, 두 사람의 개인이었다. (...) 급기야 마지막 순간, 나는 어머니 곁에 있는 것에 연연했고, 아버지는 시계를 고치는 데 연연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죽음을 사이에 두고도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었다. (176쪽)

 

 

 내가 존재한 세상과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 거기에 있을 미세한 차이.

거기에서 생겨난 작디작은 '차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증거인 것이다. (204쪽)

 

블로그 이웃님 한마루님을 통해 이벤트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작고 예쁜 책을 받았다. 속표지도 무척 이쁜데(아마도 악마 '알로하'가 첫날에 입은 옷차림이 이 모양이었으리라^^)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려는 지금 사진기가 고장났다는 사실을 알았고,  

핸드폰 카메라는 요새 USB에 뭐가 문제가 생겼는지 사진 전송이 잘 되지 않는다...ㅠㅠ 

 

 

 

2014년 한 해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아는 후배가 죽었고, 같이 스터디를 하던 멤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밖에도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사건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매일 생각을 했다. 내가 오늘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면,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몸이 썩고 자연의 일부가 된다면 1980년대에 태어나 2010년대까지 살다 죽은 나의 보잘 것 없는, 서른 남짓한 인생은 그냥 그걸로 동시에 사라지고 마는걸까.

 

 

 

이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시한부를 선고받는다. 그런데 기적같이 악마가 나타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하나씩 없애면 대신 삶이 하루씩 연장될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내어놓는다. 그렇게 주인공을 삶의 종료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의미와 그것이 사라지게 된 후에 나타나게 될 상황, 그리고 그를 둘러싼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점검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처음에는 전화가, 그 다음 날에는 영화가, 그리고 시계가 사라진다.

전화는 그의 첫사랑이, 영화는 소중한 친구가, 시계는 그의 아버지와 연결이 되는 매개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양이를 없애라고 악마가 종용하는 순간, 그는 주저하기 시작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토록 아꼈던 고양이,

힘든 순간에 그의 곁을 지켜준 고양이 양배추... 이것을 없앨 수 있을까.

그런데 정작 고양이를 통해 그가 떠올린 것은 관계가 단절된 '아버지'였다.

 

 

 

 

주인공은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에야, 그 후회가 느껴지는 삶이기에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고 인정하고 결국 인간은 100%의 치사율로 언젠가는 죽는다, 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며칠 전에 보았던 영화 <자학의 시>에서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원래는 만화가 원작이나 만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이제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

 

적어도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그의 여자친구와 친구,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고양이 양배추와의 만남과 기억의 순간 등을 점검하며 그 의미를 찾아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마지막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그리고 죽은 뒤 고양이 양배추를 맡길 사람이 바로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고 고양이 양배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주인공...

검은색 터치로 길게 그려진 그 마지막 순간의 그림은 여운이 꽤 길게 남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계속 걸려 있지만 이 소설은 무겁지는 않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위트있고 경쾌하게 잘 그려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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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6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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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말하면서 언급한 '타자'는 반드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잘못된 사고를 하게 만든 동인이나 대상물만 가리키지 않는다. 어쩌면 더 중요하게, 타자란 그것이 있음으로써 그 자리에 서면서 이해와 공감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존재로서의 타자보다도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타자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타자화'라는 용어를 재개념화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일한 범주에서 벗어나서 더욱 자유롭고 공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볼 방법과 전략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204쪽)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은 보편이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 실천-자기 제어와 자기 판단-에서 오고 이 제어와 판단을 위한 성찰력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타인의 타자성이 아니라 자기 속의 타자성과 친숙해지고 이 타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개인은 상호주관적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개인의 자기동일성이란 정체성이다. 타자와의 만남이란 그 자체로 자기동일성의 확대이자 그 교정과 갱신이고, 이렇게 갱신된 자기 정체성에는 타자성이 이미 자리한다. 주체는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인간적인 것의 보편적 영역으로 나아간다. 모든 나의 진술의 '나'자리에, 시간이 지나면, '너'와 '우리' 그리고 '그들'이 들어서지 않는가? 나의 진술을 너와 우리와 그들의 진술로 바꾸어 말해도 타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퇴장 당한다. 예술은 주체의 이 보편화 과정을 매개한다. (259쪽)

 

전공이란 결국 전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전제이지 그 자체로 수호될 만한 가치일 수는 없으며, 언어의 문제도 번역을 통해 해결될 수 없는 무언가에 본질적인 것이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면(다시 말해, 꼭 원문으로 읽어야 비로소 제대로 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외국에 살면서 그쪽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또 그쪽 학술지에 글을 싣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제대로 된 연구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280쪽)

 

근대문학 연구에서 비교 연구 또한 오리엔탈리즘에 가깝다. 영향사와 전파론에 의존하는 비교 연구는 연구자를 보는 쪽의 위치로 특권화하고 스스로 시선의 주체가 됨으로써 근대문학을 타자화한다. 조선의 근대문학과 서구문학을 비교하고 있는 대부분의 근대문학자들은 스스로를 서구적 주체화 동일화하면서 우월한 위치에 서는 사디즘적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 근본에 있어 서구에 대한 노예적 위상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402쪽)

 

언젠가 독문학을 전공한 지인과 '번역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외국문학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가 반영된 타국의 언어를 통하지 않은, 번역이라는 불순물이 포함된 언어로 그 나라의 문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상대방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국문학을 창작해내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외국의 어떤 작가들의 책을 주로 읽고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외국문학을 '번역'을 통해 읽어낸다고 해도, 심지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나라의 문학을 감상할 수 있는 나의 독자로서의

능력과 번역자의 노고가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학문적 관심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같은지를 비교하고 항목에 따라 나누면서 학문 체계가 성립이 된다.

국문학에서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시작되었지만, 독문학이나 영문학, 불문학 등 다른 나라의 문학도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렇다면 그 탄생지가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공통범주로 묶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가운데 한국문학의 위치나 입지는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해마다 10월이 다가오면 노벨문학상을 누가 타는가를 점치고, 아시아권에서 문학상을 타면 '한국은 또 노벨문학상 수상자에서 당분간 제외되겠구나'라며 통탄해하는 목소리의 반복을 보면 정말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이라는 공간으로 나아가면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가, 라는 의문도 많이 생긴다.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는 문학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을 담고 있다. 그 스펙트럼도 넓고 참여한 필자들의 전공도 다양하다보니 그 광범위한 논의에 압도되어 버리는 부분도 있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쉽지 않은 학술적 논의들을 따라가면서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학을 둘러싼 다양한 고민들을 되짚어보고, 나 또한 '그렇다면 제3세계문학으로서, 동아시아에서도 이중으로 주변화된 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이 나아가야할 길은 무엇일가?'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프레드릭 제임슨, 파스칼 카자노바, 모레티와 같은 영미의 비교문학자들은 철저하게 서구학자의 위치에서 비서구 국가의 문학들을 재조명하고 거대한 '세계문학의 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들을 위치시키려고 애쓴다. 대놓고 서구문학의 월함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은 서구 학자들의 학문적 편의를 위해 비서구 문학을 제3세계 문학으로 지명하고 자의적으로 위치를 정해놓는 느낌이 다분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주장한 지가 30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이론은 식민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특히나 전세계의 시간의 표준을 정하는 '그리니치 자오선'의 개념을 문학의 장에 끌어들여와서 미학적으로 근대적인 형식성을 시간적으로 확보한 공간을 문학에서의 표준적 지표로 정해놓고 중심부 밖의 작가들은 이 안으로 들어와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식의 설명을 접하면 불쾌함까지도 느껴진다.(우리도 오랜 기간동안 글을 써온 전통이 있는데 왜 너네한테 인정을 받아야 해? 하는 식의)

 

 

 

이에 대해서 국내의 학자들은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피상적인 논의의 수준에 머무른다는 느낌도 있다. 결국은 또다른 '보편성'으로의 수렴으로 끝나는 것 같은데, 그 보편이 무엇인지도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세계문학에 논의에 담긴 오리엔탈리즘의 무한 복제라든지, 이를 전복시키려는 주변부들의 노력 조차도 사실은 또다른 열등한 타자를 설정하거나 자기중심주의에 빠지는 자기복제적 오리엔탈리즘이며, 한국이 노벨상에 집착하는 것도 지위획득을 위한 '문화적 컴플렉스'에 근거한 투쟁의 다른 얼굴이라는 지적들은 꽤 뼈아프게 다가온다.

 

사실 가장 흥미로웠던 장은, 너무 솔직하고 직설적이어서 때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는 조영일 평론가의 글이었다. 한국 문단계의 속살을 보아버린 느낌이랄까. 90년대 초반에 일어난 하루키 열풍에 대해서는 짐짓 점잔을 빼며 인스턴트에 가까운 장르문학이라며 무시하던

한국문단계가, 세월이 흐르면서 하루키가 영미문학권에서 인정받고 상을 수상하고 심지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이르자, 생색이라도 내듯이 다시 하루키를 인정해주는 척하는 한 편이 있고, 문학동네는 시대적 흐름을 보는 눈이 있었는지 하루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윤대녕 작가를 내세우고, 하루키에 대한 특집을 펴내면서 지금은 거의 주류로 자리잡을 정도로 성장했다. (심지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도 문학동네에서 나왔으니 정말 시대적 흐름을 읽는 혜안이라도 그들 내에 있는걸까?)

 

 

 

어쨌거나 한국문학계는 장르 문학을 폄하하고 번역을 창작의 아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몇몇 필자들은 이 부분을 문제 삼는다. 하루키 현상을 보면, 영미문학을 꾸준히 번역하고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창작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가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마지막 장에는 동아시아라는 지형적 공간에서 한국문학이 위치한 특수성, 그리고 제3세계의 여성(서발턴)의 목소리가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작품들을 통해 살피고 있다. 어쩌면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낮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윤리적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제목에는 '가장자리'가 들어있다. 중심부가 아니라 가장자리에 한국문학이 속해있지만, 그 중심부로 들어가려는 노력보다는,계속해서 가장자리를 돌면서 또다른 가장자리에 속한 타자들과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국문학계를 풍부하게 일궈나가야 하는 것이 이 책을 쓴 필자들의 문제의식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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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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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신비하게 만드는 즐거움이 너희에게 보호막이 돼 주었을 거야. 하긴 그게 우리 모두의 작전이기도 했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96쪽)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147쪽)

 

 

 

'밀란 쿤데라'라는 대가의 책을 읽는 것은 사실 조심스럽다.

게다가 이 책은 신작이라 아직 많은 해석이 나와있지 않은 편이고,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읽은 해석이 맞는지 확신할 수도 없으며

내가 읽은 그의 전작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뿐이라

비슷한 주제를 여러 작품을 통해 변주하고 있는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리도 없다.

 

얇지만, 아주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두껍고 많은 분량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좀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그들의 에피소드가 서로 얽혀있는 고리처럼

제 멋대로 이어져있다. 처음에는 스탈린의 일화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이거 현대 러시아에 관한 역사도 알아야 하나?'하며 겁까지 먹었던 것도 사실..

솔직히 이동진의 빨간책방 1부를 듣고 책을 읽는 맥을 잡아나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그 분들과 내가 책을 읽고 같이 토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물론 당연히 그럴 만한 수준도 안되지만) 누군가와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책을 읽고 그 생각을 비슷한 시간에 머릿속에 맴돌 수 있도록 하는 경험 자체가 꽤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졸업을 한 지 하도 오래 돼서 누군가와 같은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는 경험 자체가

너무 오래된 것도 있겠지.

 

어쨌거나,

이 책은 더이상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이 세상을 견뎌나가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과거엔 '혁명'이라는 엄청나고 압도적인 깃발이 눈앞에 장엄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민주화'와 '혁명'이라는 깃발은 사라지고

(지금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냥 접어두기로 하고)

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개개인들은 그래도 뭔가 독특한 방식으로 의미가 먼지처럼 무의미하게 흩어져버린 공간 속에서 의미를 나름대로 부여해야만 할까?

민중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던 스탈린까지도 나중에는 허무해하듯,

결국 삶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거창한 혁명이나 시대정신이라는 대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거짓말'과 '농담'이다.

뭔가 무겁게 보였던 스탈린도 자고새 일화라는 (별로 재미는 없는) 거짓말을 꾸며내고,

다르델로는 라몽에게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칼리방은 자신이 파키스탄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라몽은 다르델로에게 그와 프랑크 부인의 모습이 멋진 연인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진지하지는 않게, 하지만 너무 우울해하지도 않으면서

'사과쟁이'가 되더라도 유쾌한 거짓말과 농담 정도는 간직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아름다운 '무의미한 삶의 축제'가 된다.

이것이 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 노작가의 삶의 연륜과 지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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