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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르고 후회해도 결국엔 다 괜찮은 일들
이소연 지음 / 예담 / 2014년 11월
평점 :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다른 측면을 깨달았다. 혼자 하는 여행은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경험이라는 점. 세상 어디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대개의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친절하다는 점(...) 혼자 다니다 보면 필연적으로 '낯선 타인들'과 마주치게 된다. 낯선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어야 하고, 때로는 낯선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깊은 속이야기를 털어넣기도 한다. 익숙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타인들의 존재에 민감해진다. (...) 어느덧 혼자 여행 15년차에 접어든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람은 원래 친절한 존재다. 그 친절을 통해 우리는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혼자 하는 여행을 통해 나는 세상과 연결된다. (25~27쪽) 사람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평소처럼' 대답을 해야 했다. 내 속은 나를 이런 자리로 끌고 온 친구에 대한 원망으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전염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점점 그 자리가 편안해졌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기억이 났다. 아련한 추억처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런 외출이 얼마 만이었던가. 나는 잊고 있었던 거다. 혼자 거대한 우울을 끌어안고 씨름하던 시간 동안, 사람들과 나누는 떠들썩한 만남의 즐거움을,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처럼 까맣게 기억에서 지우고 있었던 거다. (42~43쪽) 10년 전에 내가 만나던 사람들과, 현재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명단은 거의 겹치지 않는다. 즉 주변 사람들의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52쪽) |
이 책을 펴들고 맨 처음 읽은 장은 '쏘가리-옛 선생님께 전화를 걸다'라는 장이었다. 우연히 떠오른 옛 선생님,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서 연락했던 선생님은 바로 저자를 기억해주진 않았지만, 사실 선생님 앞에서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려고
29살짜리 젊디젊은 선생님을 당혹스럽게 했던 그 여고생을 선생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은 퇴직을 하고 쏘가리를 직접 키우고 계셨다는. 내가 이 장을 고른 것은 실제로 얼마 전에 내가 바로 은사 님을 17년 만에 직장에서 재회하는
독특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나를 기억하실까?'
하는 묘한 기대와 설렘, 그리고 어떻게 변화하셨을까 하는 궁금증... 그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서 몇 날 며칠을 기다리고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뵈었을 때, 선생님은 용케도 중학교 때의 나를 기억하고 계셨고 나는 주름살만 늘었을 뿐 변함이 없는
선생님의 젠틀한 모습과 나를 반가워하는 표정에 그 때의 중학생처럼 단숨에 달려가 선생님을 감격어린 눈으로 쳐다보며인사를 했다.
교감 선생님이 되어 다시 뵙게 된 나의 옛선생님은 이젠 존댓말로
"오랜만이네요. 정말 반갑습니다."라며 악수를 권하셨고 나는 선생님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감격에 겨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이 책의 여러 일화들과 저자의 생각들은 누구라도 경험했을 법한, 그리고 누구라도 한번쯤은 생각해봤을만한 것들이 저자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담담하게 그려져있다. 한 때는 죽자살자 사랑했을 연인과의 이별,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우연처럼
다른 곳에서 만나 그와 악수를 나눴을 때 느껴진 서늘한 감촉, '오래갈 사이'라는 애매한 관계 안에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묘한 포장지로 묶어 두고 바라보는
시선들...
드라마 PD인 작가의 말처럼, 때로는 드라마에서처럼 우연이지만 때로는 간절한 바람이 끌어온 것만 같은 기적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길 꿈꿀 때가 있다. 그렇게도 미워하고 그리워했던 그 사람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게 면박을 주고 떠나버렸던 얄미운 그 썸남은 뭐하면서 살고 있을까, 딱히 연락을 하고 수소문을 해서 만나려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나기는 그런 사이라면 결국 '우연'에 기대어 서로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으로 어떤 인력에 의해 스르르 밀려오듯, 그렇게 끌려와 마주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과 눈빛을 가진 사람이 매력있다고 느끼는데
이 책의 작가가 딱 그런 느낌이다. 얼굴을 본 적도 없지만, 그냥 엄청 매력있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잘 입은 채 나이들어가고 있는 여성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독특한 색깔을 뿜어내는 글을 쓰고 있겠지.
나이가 들면서 이제 존재만으로 싱싱함을 뿜어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은 나와 거리가 멀어졌고, 이젠 지나온 나의 찌질하고 바보같은 삶 조차도 그냥 그렇게 잘 어우러져 '나'라는 인간을 조금은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색깔을 지닌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아우라를 감싸고 있는 이 책과 같은 글을,
나도 언젠가는 쓰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