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아군으로 쉽게 나누는 프레임은 타인을 단순하고 폭력적으로 규정하게 되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
요즘 지나치게 유행하는 MBTI에 대한 저자의 조심스러운 비판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제가 MBTI가 P이다보니 계획적이지 못해서 과제를 늦게 낼 예정이에요'라는 환원론적이고 결과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부터 특정 MBTI를 지정해서 채용을 하거나 혹은 배제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보다보면 유독 한국인들은 타인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규정하는 틀을 좋아하구나 싶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건 섬세한 관찰을 동반한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사랑하겠다는 것은 그 존재를 쉽게 규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류하기보다는 존재의 작은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애쓰고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에 가까울 것이다."(25)
오히려 누군가를 굳이 깊게 이해하고 싶지 않을 때, 혹은 그런 노력이 귀찮을 때 쉽게 어떤 틀에 넣어서 '아, 그 사람은 이런 성향이니 이런 행동을 하는 수밖에 없어'하고 결론을 내려버리고 내 관찰과 사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타인을 쉽게 규정하지 않고 섬세하게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저자의 시선과 노력은 그간 오랫동안 인문학을 공부해온 데에 기반할 것이고,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깊이 있는 통찰력과 따뜻한 온도는 그런 데서 오는 듯하다.
3.
타인을 쉽게 비난하고 규정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상대를 비난하는 논리로 '그건 너의 선택이니 그걸 책임지는 것도 너의 몫이야'라는 잔인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비판도 뼈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선택지 자체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선택은 자유롭지 않고 강요된 선택이 더 많다. 저자는 이렇게 선택이란 "완전히 자발적인 경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으므로 "타인의 선택을 나와 무관한 거라 생각하고 비난하기보다는 타인의 선택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고 공감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주장한다.
몇 살에는 결혼을 해야하고, 몇 살에는 어느 정도 돈을 모아야 하고, 집은 어느 정도로 마련해야 하고, 소비는 이 정도는 되어야한다는 기준이 온갖 SNS와 재력을 갖춘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매체를 통해 전시된다. 그걸 보는 동안 개인들은 한없이 위축되고 이 사회는 끊임없이 기준에 미달되어 있고 뒤처져있다고 엉덩이를 떠밀며 이들을 재촉한다. 나는 어느 순간 그 강도가 더 세지고 가혹해져가는 것 같아 갑갑함을 느끼면서도 거기에 저항해야할 힘이나 나만의 논리 같은 걸 내 안에 견고하게 갖추고 있지는 못해 더욱 괴로울 때가 있었다. 정지우 작가는 그걸 갖춘 단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던 건, 이번에 아예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게된 후였다.
인문학을 오래 공부해왔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정말 사회에 맞서 싸울 실질적인 논리나 힘을 갖추지 못해서 어딘가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 결혼 후 책임져야 할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다 안정적으로 지켜주고 싶다는 간절함, 이런 것들이 그를 인문학과는 정반대의 접근을 취하고 있는 법의 세계에 발을 담그게 했다. 정지우 작가가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고 변호사가 되었다니... 사실 좀 충격적이었지만, 이 땅에 더 비짝 몸을 붙인 채 세상과 싸울 무기를 고민하고 갖추게 된 뒤 쓴 글이라 그런지 더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내용이 많았다. 그는 여전히 SNS로 오가는 피상적인 관계 대신 책읽기와 글쓰기로 연결된 모임들을 이어나가고 직접적으로 사람들과 부딪치며 세상과 맞서 싸우는 힘을 계속 안에서 길러가며 전투를 벌여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에게는 타인들에게 덜 민감한, 나 스스로 자족하는 자리가 얼마나 있는가. 또 그런 공간이 내 안에서 어디쯤 있는가를 확인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저 내가 나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호숫가 오두막같은 자리 하나가 내면에 지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279)
나의 내면에는 그런 자리가 얼마나 확보되어 있을까. 중년을 바라보게 된 지금에 와서야 그런 오두막 같은 자리를 내 안에 어떻게든 만들어놓지 않으면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회의 목소리에 휩쓸려나가버리고 말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대가 왔다고. 저자는 그런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이면서 세상의 목소리에 맞서 싸울 힘을 실질적이고도 치열하게 만들어나가고 다른 이들에게 퍼뜨려나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글이 그런 의미에서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