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길의 왼쪽 - 황선미 산문집
황선미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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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을 쓴 바로 그 황선미 작가의 산문집이다.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인기를 끌었지만, 나는 8년 전쯤 책만 읽어봤다. 하지만 결론부에 가서 받았던 충격 만큼은 잊혀지질 않는다.

아동 소설인데 이렇게 처절한 비극으로 끝맺어도 될까? 뭐 이런 의아함이었는데,

그것도 편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운 끝맺음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비극적인 세계인식을 하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황선미 작가를 섭외할 일이 있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어딘가 차분하고 냉랭해보이는 목소리를 지닌 작가는 단호하고 정중하게 내 청을 거절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한참 인기를 끌 때라 바쁠 거라 생각은 했기 때문에 크게 기대도 안했지만 너무나 여지를 주지 않는 거절이었다. 하지만 이후 만나게 된 황선미 작가에게 글을 배웠다던 분들은 그분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정도로 다들 스승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이 보여서 원래 그렇게 차분하고 단정한 분이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좀더 인간적인 날것 그대로가 나타난 작가의 모습이 궁금해져서 책을 집어들었다.

1부는 지금의 작가를 만든 상처나 어린 시절의 결핍, 가족 이야기들이 나오고 2부는 일상, 3부는 여행에세이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1부가 좋았다.

작가 본인도 쓰고 있지만, 이렇게나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데다가 다정하고 지지적인 남편과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우울하고 쓸쓸하단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많이 쓰냐고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의 성향이나 근본적으로 지닌 고독감이나 외로움은 개인차가 있는 것이어서 그런 식으로 밖

에서 재단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나 역시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톡홀름 대학 강연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미 첫 책으로 강연을 두 차례 했으니 새로 번역된 작품으로 행사를 하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당연한 제안인데 문제는 내가 원작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 왜 이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책이 번역돼 있으니 서점에서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책을 공수받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서점에 들러 내 책을 찾아보았다. 소설 코너. 두툼한 틈에 <푸른 개 장발>이 꽂혀 있었다. 책을 빼내자 직원이 웃으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설명을 한다. 나는 내 사진이 실려 있는 부분을 펴서 보여주며 이게 나라고 말해주었다. 그가 놀라서 또 뭐라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하더니 서명을 해달란다. 내 이름을 한글로 커다랗게 남겨주었다.

(194~195쪽)

이런 장면은 어째 부러움이 꽤나 크게 몰려왔다. 외국의 서점에 가서 "이게 나요!"하고 책날개의

표지 사진을 보여주는 인증이 가능하다니!! 역시 세계적인 작가이긴 하다.

***

앞서 언급했듯, 1부를 읽다 보면 작가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가난으로부터 겪은 상처나 결핍이 꽤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을 서릿한 언어로 담담하게 표현해내는 걸 보면, 역시나 글

잘 쓰는 작가가 맞구나 싶고.

남의 둥지에 뻐꾸기가 새끼를 낳고나면, 그 새끼들이 자라서 원래 주인의 새끼들을 둥지밖으로

밀어버리는데 그것에 대한 맹렬한 분노를 표현한 걸 보면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고, 어머니에 대

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새끼를 핥는 짐승 어미처럼 눈을 혀로 핥아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눈병을 낫게해 준 어머니의 일화를 떠올리는 부분은 정말 '동물적'으로 '감각적'이란

생각도 든다.

참담하고 슬프다.

우리의 눈은 어떤 등에 가려져 있나. 진실에 접근해갈수록 얼마나 더 배신을 당해야할까.내 둥지에서 내 새끼가 떨어져 죽는 이 현실에 뼈가 아프다. 부끄럽고 분노가 치민다. 얼룩덜룩한 뻐꾸기의 그 깃털과 부리가 찢어져라 벌려대는 그 붉은 입에 구토가 인다. 나를 어지럽히는 뻐꾸기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다.

(29쪽)

 

엄마는 그날 왜 그랬을까.

그날 처음으로 엄마를 뜨겁게 , 동물적으로 기억하게 됐다.

다래끼 때문에 여러날 고생하던 중이었다. 병원도 약도 쉽지 않았던 가난한 집이라 결국 종기가 눈을 덮어버렸는데 새벽녘 잠결에 엄마의 행위를 경험하고 말았다. 엄마의 뜨겁고 거친 혓바닥이 내 눈을 핥았던 것이다. 개가 새끼를 핥아주듯 곪고 짓무른 상처를 구석구석. 혀끝이 농으로 붙어버린 눈꺼풀을 녹이고 파고들어 욱신거리는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나의 온 신경이 깨어나 뻣뻣하게 마비되고 소름이 돋았다.

"밤새 입속에는 독이 고여서 곪은 걸 잡을 수 있어."

엄마의 지독한 입 냄새. 뜨거운 체온. 꼭 짐승의 혓바닥처럼 거칠던 감촉. 물도 못 마셔 바삭하게 들리던 숨소리. 어둡고 긴 동굴처럼 느껴지던 목구멍의 공명. 그 모든 게 동시에 나를 뒤덮었다. 나는 두려웠고 동시에 온전하게 무방비의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을 맞았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지독한 사람이었고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입을 연 적이 없다. 나을 때가 돼서 나았는지 다래끼의 독을 엄마 입 속의 더 지독한 독이 잡았는지 알 수 없으나 내 눈은 멀쩡하게 1.5 시력을 한동안 유지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

(32~33쪽)

 

이 장면 하나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사실 뒷부분은 읽으면서도 크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청소년, 아동 소설들이 지닌 말랑하고 옅은 분위기,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는 '성인 화자가 아이인

척'하는 어색한 목소리 때문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물론 잘 쓴 몇몇 소설들은 그렇지 않다)

황선미 작가는 애초에 그런 '척' 같은 건 하지도 않는 듯하다.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 자체를

하지 않으니까.이렇게 동물적인 감각으로 접근하는 어린 시절의 세계가 오히려 더 직접적으로 닿

 아있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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