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 글쓰기에 대한 사유와 기록 조선 지식인 시리즈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 지음 / 포럼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말 그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TV프로그램, 무한도전. 대한민국 평균이하를 자처하는 6명의 출연자들의 의미 없는 도전은 1위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의 카타르시스를 만족시키며 웃음을 자아낸다.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시도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며 좌절하는 이들의 모습이 시청자에게 우월감마저 주니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은 구성의 매력 외에 이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출연자들의 거침없이 내뱉는 대사에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들은 공중파 상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없는 자리에서는 험담을 하는 등, 과도한 솔직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의 이런 솔직함은 종종 방송에 부적합하다는 평을 받으며 심의위원회의 경고를 받기도하지만 이미 그것은 부작용보다는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서로에 대한 비난이 담긴 말의 내용과 조금이라도 더 튀기 위해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어법. 이것은 비단 TV프로그램의 인기전략을 넘어서 사회의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마당에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포럼. 2007)라는 책은 시대에 흐름을 역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함축된 의미를 싫어 말할 소양이 현재의 우리에게 부적하다는 것은 차치물론하고 그것을 듣고 속뜻을 살필만한 여유조차 없는 까닭이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조선의 지식인은 말하는 법은 말을 아까는 것에서 출발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했던가? 아니, 적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그 존재조차 부정당하기 일쑤다. 이런 마당에 말을 아끼라니? 이것은 구태의연하다 못해 더 이상 맞지 않는 가르침인가?

결론부터 말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한다. 큰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쏘아붙여야 눈에 띠고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유머로 통용되는 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1인 미디어 시대에 단어마다에 함축적의미를 실어 대화하기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표현하는 말에 불필요한 부분은 없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몇 번을 곱씹어 보면 그 의미가 달라지는 조신 지식인의 말보다 참을 가릴 정도로 많은 비유와 역설, 즉 불필요한 꾸밈이 난무하는 이 시대의 말이 더욱 이해불가능 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전달이라는 1차적인 말의 목표를 넘어 그 태도는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다. 이에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는 말로 희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우리는 그 희롱을 재치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흠을 드러내어 농담의 소재로 삼고 되레 그 농담에 분개하는 당사자를 속 좁은 위인으로 만드는 재치 말이다. 이러한 재치는 앞서 예로 든 무한도전이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성격상의 단점이나 비밀이 웃음소리와 솔직함이 미덕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재치 있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명백히 조선 지식인이 경계한 희롱일 뿐이며, 현대의 우리가 판단하더라도 불쾌한 앙금이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크다. 일회성의 웃음을 위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인해 말을 뱉은 당사자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요즘의 재치는 해학이 아닌 희롱일 뿐이다. 때문에 조선 지식인은 말한다. 해학도 희롱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면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말 자체가 많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을 하지 않고 해선 안 될 말만 하는데 있다. 이 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조대왕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간언하는 신하가 없는 당시를 한탄하고 있다. 이는 무엇이 해야 할 말이고 아닌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정도가 지나쳐 오히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아첨을 버리고 기분이 상하더라도 결국엔 옳다고 생각되는 간언을 하라는 말인데, 이는 요즘의 우리에게도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동갑내기 친구끼리라도 아첨, 적어도 과도하게 반복되는 칭찬은 지양해야한다. 듣기 좋은 말도 여러 번 반복하면 하지 않느니만 못할 진데, 속내가 의심스러운 아첨이야 두 말할 나위 없지 않은가. 이렇게 말이란 아끼는 것도 중하지만 할 말을 하는데 정수가 있다.

문학의 추격을 멀찍이 제치고 서점가를 장악하고 있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는 자신을 포장하는 말을 가르친다. 이제는 그 정도를 더해 타인을 기만하는 말, 처세에 능한 말,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는 말을 하라고 한다. 물론 이 책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 역시 노선이 다른 인생지침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한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받아들일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TV를 켜는 순간 호통과 비난이 난무하고 그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목을 베는 칼이다.’라는 말을 되새기게 해준다는 것, 말 한마디 내뱉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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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밀리언셀러 클럽 6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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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은 창작동화가 인기이지만 나의 어린 시절엔 수십 권이 한 질인 소년 소녀 명작동화를 집집마다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것은 기분 좋은 추억이기도 하지만 미화된 틀에 박제된 경험을 뜻하기도 한다. 그나마 창작동화라 불리며 눈길을 끌었던 책들도 역사를 비틀어 자존심 세우기 정도였다. 예를 들면 곰이 아닌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참고 인간이 되었다면 일본에 침략당하기 전에 정벌한 호전적인 한국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나마 교조적인 어투를 벗어나 갈증을 풀어주었던 것은 동화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주제인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그 중 한 테마가 바로 공포이다. 유머가 섞인 것이라면 홍콩 할미 귀신이라든지 귀여운 소년소녀 흡혈귀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꼽을 수 있지만 사실 광적으로 빠져있었던 것은 잠들기 전 어두운 방 창가에 비치는 조그만 불빛에도 움찔하게 만드는 자극적이고 여운이 긴 무서운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었다.

비단 소설만은 아니다. 꼭 어린 시절만은 아니다. 귀신보다 세상이 더 무섭다는 사실에 가까워진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시절 무서운 이야기를 한밤중에 홀로 떠올리면 점잖은척하지만 이내 우스꽝스럽게 갈라지는 헛기침을 연신 내뱉는다.

<암보스 문도스>(황금가지. 2007)를 읽는 동안,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되새긴 감정은 그 시절 무서운 이야기와 조금은 겹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책에 실린 7편의 단편이 모두 무서운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럼 어디 개개의 단편을 살펴보기로 할까?

처음을 여는 단편, <식림>은 사회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소위 말하는 외톨이의 일상을 세밀하게 좇는다. 이로써 잊혀진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단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한 인간이 겪는 잔인한 일상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곧 기억하지 못하는,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기에 묻어둔 기억이 만든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종래엔 어떻게 전이되는 지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루비>는 어느 노숙자의 아침과 함께 시작한다. 주변의 노숙자들은 사회비판적인 인물에서 생물학적인 사회부적응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주인공의 경우는 그저 노숙자의 평온한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자유는, 초연한 삶은 몸을 팔아 잠자리를 청하는 가출소녀의 등장으로 무너진다. 즉, 욕정 앞에서 고개를 드는 본능이 구매하고 구매되는 인생을 버린 그들의 일탈이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 번째, <괴물들의 야회>에서는 불륜으로 맺어진 위태로운 관계와 그 관계 이상의 불안함을 지니고 있는 한 여인을 초초하게 뒤쫓아 그 끝을 보여준다. 뒤이은 <사랑의 섬>에서는 상처 깊은 경험에서 자극을 느끼는 세 여자의 수다가 나열되고, <부도의 숲>에는 현재의 자신을 만든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고 자신의 자식의 모습에서 접점을 찾으며 놀라는 소설가의 딸이 있다.

마지막에 배치된 <독동>과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암보스 문도스>는 그야말로 기묘하고 무서운 이야기이다. <독동>은 묘지에 둘러싸인 절을 무대와 계부라는 뒤이은 무서운 이야기를 암시하는 전통적인 소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암보스 문도스>는 잔망스러움을 넘어서 섬뜩한 악의를 가진 초등학생의 제자에게 짓눌리는 여교사의 시점을 통해 짧지만 탄탄한 맺음이 있는 의심스럽고 무서운 이야기가 완성된다.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본명은 하시오카 마리코라고 한다. 그녀는 이 필명을 쓰기 전에는 다른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이나 청소년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구태여 작가의 이력을 밝히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7개의 단편이 가진 상이한 주제 때문이고 서로 다른 주제를 가졌음에도 같은 냄새를 풍기는 까닭이다.

대표작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이 책, <암보스 문도스>만으로 그녀의 색깔을 보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앞서 말한 무서운 이야기하면 떠오르는 추억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 억측일지 모르는 섣부른 판단에 신뢰감을 실어준다.

사회문제와 그 속에 소외된 인간의 모습에 몰두하는 듯 보이다 이내 기묘한 이야기로 독자를 긴장시키고 틈 없이 짜여진 본격 추리의 맛을 내기도 하는 작가, 기리노 나쓰오.

무지개는 7가지의 각각의 색을 가졌지만 우리가 그것을 무지개 색 혹은 무지개 그 자체로 부르는 것처럼 기리노 나쓰오의 이 단편집은 각각 다른 색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그녀만의 고유한 색이라 부를 수 있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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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노라 에프런 지음, 박산호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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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가 샐리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나면 입가에 배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다. 그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이 들고 자리를 뜰 수가 없다. 그리곤 상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지된 해피엔드가 아닌 계속되는 행복한 삶을.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고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만약 요즘 영화에서 이런 결말을 대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랑이 영원하다는 말을 쉬 믿지 않을뿐더러 되레 촌스럽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오히려 사랑하지만 현실의 벽에 서로의 길을 가는 헤어짐이 도시적이고 세련되게 느껴져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영원한 사랑을 꿈꾸기 마련,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 작가 이자 뒤이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감독 노라 에프런이 쓴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2007. 브리즈)에서 혹시 그런 모습이 비단 상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를 했다. 그래서 결론은?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그녀의 인생은 아지랑이 같은 로맨스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더구나 한 남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그것으로 평생을 달콤한 행복 속에서 보낸 것도 아니다. 그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행하는 화장품은 꼭 손에 넣고, 첫 눈에 반한 아파트에 살기위해서는 정신적 스트레스도 기꺼이 이겨내는 등,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삶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근거를 만들어서라도 꼭 갖고야 만다. 그래, 그녀는 자기합리화의 달인이다.

로맨스로 가득 찬 삶은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은 현실에서 가당치도 않을뿐더러, 그것이 실현되었다고 해도 얼마나 갈 것인가? 로라 에프런의 세면대 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행 지난 기능성화장품들이 말해주는 것은 그녀가 또한 우리가 변덕쟁이이라는 사실이다.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던 핸드백(내 경우는 카메라), 때문에 온갖 장점을 만들어 그것을 손에 넣었지만 과연 몇 시즌이나 들 수 있었나?

그래서 반성? 그런 즉흥적인 구매욕을 반추해 정신적 성장을 꾀하자고? 소비의 노예가 된 자신을 돌아보자고? 쳇, 웃기는 소리. 노라 에프런이 했을 법한 대답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목이 꼴도 보기 싫다. 여자의 나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그녀의 목. 그것을 감추기 위해 성형수술을 고려해 보았으나 얼굴 전체를 시술한 뒤에 야만 가능하다는 소리에 포기하고 만다. 이것이 로맨스로 가득 찬 그녀의 인생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은 여자의 당연한 심리. 그로 인한 소비심리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능력이 된다면 가능한 사치를 누리는 것이 죄일 수는 없다는 것. 반면 살아온 나이를 부정하는 듯 얼굴의 주름을 지우고 팽팽함을 갖는 것은 수치스럽기까지 하단다. 어떻게 보면 이런 그녀,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독설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혹여 그럴지라도 부정하고 싶다. 그녀가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로맨스를 꿈꾸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환갑을 지났다. 더 이상 주변의 주목을 받는 아름다운 청춘의 생기는 없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고 있다. 로맨틱코미디의 주인공이 대부분 젊은 남녀이듯 그녀의 삶은 이제 로맨틱한 영화의 결말을 한참 지나왔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이 서럽기 짝이 없다. 인생에 황금기라는 것이 정해져 있고, 그것이 생물학적 한계라면 말이다. 이에 그녀는 끝까지 상반된 결론으로 변덕스럽지만 솔직한 대답을 한다.

나의 황금기는 지났다. 케네디가 추파를 던지지 않은 유일한 인턴이었지만 그때가 자신의 황금기였고 아름다움의 절정이었다는 아쉬움. 반면 여전히 로맨스는 끝나지 않았다는 상반된 결론. 늙은 육신과 과거의 추억에 슬퍼지지만 오늘도 그녀는 소박한 사치를 위해 쇼핑몰을 찾을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피부의 매끄러움을 더해주는 오일을 사기 위해서 말이다. 고로, 그녀의 로맨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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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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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꽤나 오랫동안 여전한 인기에 흔들림 없는 미국드라마, CSI과학수사대. 그중에서도 라스베가스 시즌을 보면 증거 위주의 과학수사의 진수를 보여준다. 감정에 흔들리는 인간이기에 범할 수밖에 없는 실수를 최소화하는 과학적인 초동수사. 그들은 말을 할 수 없는 죽은 자의 한을 구체적인 장비와 체계적인 이론으로 풀어준다. 뭐 드라마 이야기이기에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가능하다고 해도 매 사건마다 그와 같이 되리라 장담할 수 없다. 사실이 이럴진대, 과거 호롱불에 의지해 밤길을 가야했던 시대에는 억울하게 죽은 혼을 누가 달래주었을까?

<반야>(문이당. 2007)는 그 시대의 길 그리섬 반장(CSI 라스베가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감정을 배제한 채 과학적 수사에만 몰두하는 그보다는 심증을 굳히고 증거를 보충하는 호레이쇼 반장(CSI 마이애미)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이다. 신통방통한 무녀 반야, 그녀의 신기는 죽은 자가 묻힌 곳에 닿고 거슬러 올라간 추악한 인간의 감정과 전생을 아우른다.

그렇게 반야가 세상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정작 그녀 자신의 한은 누가 풀어줄 것인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지는 않기에 정확한 시대를 알 수는 없지만 사도세자의 등장으로 미루어, 소설의 현재를 영조의 조선시대라 봐도 무방하다. 헌데,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귀천이 명백한 시대이다. 그 속에서 무녀 반야와 그녀의 식솔은 층을 이루지도 못하는 천민 중의 천민이다. 비록 반야의 점괘가 반가의 권세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지만 신분의 한계는 그보다 앞선다.

일상적 말보다 먼저 신기를 내뱉었던 반야, 그녀는 이런 계층의 무력 앞에 파리 목숨에 불과하다. 작가 송은일은 이에 반야에게 두 가지 힘을 선사한다. 하나는 앞서도 언급한 신기이고 이것은 곧 세상을 호령하게 될 것이라는 전설의 만파식령으로 구체화된다. 또 다른 하나는 계급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을 법한 사신계의 존재이다. 반야는 자신에게 내린 신에 의해 인생을 빼앗기지만 그로 인해 전생을 알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탄생은 현생의 삶을 위해서가 아닌 전생의 한을 풀고자 함이다.

더불어, 만민평등을 주창하며 긴 세월 역사의 그림자로 살아온 사신계의 일원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상에 해가되는 무리를 제거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한다. 바로 이들은 전생과 그에 얽힌 관계로 개인의 위기와 나라의 위기를 알게 된 반야를 물리적 힘으로 뒷받침한다. 아니, 그 관계는 어느새 역전되어 사신계의 일원이 된 반야의 모습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추리적 장치와 무녀로 대변되는 계급사회의 폐해와 더불어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등장인물간의 사랑이야기이다. 그것은 계급의 차이와 개인의 행복을 넘어선 집단의 이익에 희생되기에 더욱 위험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비극적이다.

소설의 첫머리의 작가의 변이나 말미의 해설을 보면, 작가가 소설에서 그리고자 한 것은 사회의 부조리를 통사적으로 다룬 역사소설이 아닌 개인의 한을 녹여 만든 소소한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해설이 없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작가 송은일은 아마도 그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두 마리 중 무엇을 잡았는지, 혹은 모두를 잡았는지는 책을 읽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명분이 있어야만하고 무겁게 파헤쳐야만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듯 보이는 우리 문학 동네에 하나의 이야기로 책을 내고 승부를 건 그녀의 결정이 빛바래지 않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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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다산, 통하다 - 동서 지성사의 교차로
최종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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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 시절 남부럽지 않았던 책장엔 몇 가지 전집에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당시 인기 있었던 출판사의 기획물로 가가호호 유행처럼 배치되었던 무리를 기억해보면 <세계위인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전집이 좁은 집의 책장 한쪽을 차지하게 된 연유야 자식의 교육을 생각한 부모님의 식견 혹은 당신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다소 불순한 의도였으리라 마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는 확신이 있다. 그렇다면 난 무엇 때문에 그 대단한 위인들의 자취에 감동하고 즐거워했던가?

이 역시 책이 자리 잡게 된 부모의 기대에 부합한 영악한 자식의 심산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런 잔머리가 없었다면 그 책들을 꺼내보지도 않았을 것이니 그렇게 단언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소년소녀를 위한 위인전은 대단한 업적과 성품, 그리고 교조적인 어투로 가득차있어 나이를 먹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는 지금에서 추억하면 맥이 풀리다 못해 거부감마저 드니, 사준 부모보다 읽는 자식의 의중이 더 불순하다할 수 있겠다.

이렇게 불순한 의도임에도 위인전이 재미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연한 기회로 대단한 업적을 세운 이들도 적지 않고, 이제 와서 평가하지면 대단하다는 칭호가 과분한 이들도 있지만 인생 자체가 출판물로 후대에 읽힌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함을 가진 위인이라 부를만하다. 하지만 책장을 차지하고 있던 그 전집이 세월에 못 이겨 과도한 책 먼지를 날린다는 이유로 분리수거함에 처박히고, 수험서와 전공서적에 파묻혀 그것이 현실이고 똑똑한 행동이라 자위하는 삶에 익숙해졌듯이 어린시절의 그 특별한 감흥은 빛바랜 추억이 되어버렸다.

다산과 괴테 역시 마찬가지, 붕어빵 장사로 번 돈을 주식에 투자해 강남 어디 초고층 빌딩에 살며 억 소리 나는 차를 굴린다는 이름 모를 사람의 인생역전이 더욱 가치를 발하는 세상에 그들 또한 철지난 유행의 위인쯤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보다는 <Vocabulary>를 봐야하고, 목민심서 정도로만 알았던 다산 정약용은 참고서의 꼭지에서나 만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거친 우리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 <괴테와 다산, 통하다>(추수밭. 2007)를 읽고 이렇게 개인사마저 들먹이며 감상에 빠진 것인가. 그것은 후회 때문이다. 그들의 가치를 한때는 자신의 가치에 투영시켜 보기만 했고, 지나서는 일반적인 기준에 어긋나는 불유쾌한 재능을 가진 존재로 애써 외면했던 것에 대한 후회 말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빠져 읽으며 슬퍼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고, <파우스트>에는 나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산은 어떤가. 그는 인생 자체가 가르침이 될만한 여전히 스승의 모습이다. 그런 그들을 시험문제의 해답의 틀에 가둬버렸으니 후회가 밀려올 수밖에.

다시 찾은 다산은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저서를 통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오랜 귀향길,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뚫릴 만큼 연구와 저작을 멈추지 않았던 그. 세상의 시선을 받을 길이 요원한 외롭고 고된 삶은 그의 끊임없이 읽고 쓰고 행동하는 인생에 있어 장애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활발한 저술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정보와 학자의 자세는 후대의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며, 과연 공부는 왜하는 것이냐는 반복되는 불만에 종지부를 맺는다.

그 다산 정약용과 비극적 사랑의 대명사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누구나 시놉시스 정도로는 알고 있는 <파우스트>를 남긴 괴테가 서로 통했다니, 이것 참 궁금하다. <괴테와 다산 통하다>의 제목이 암시하는 그들의 연관성이 참으로 궁금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 외에 확연히 드러나는 둘의 공통점을 책에서 찾기는 무리다. 작가, 최종고는 책의 초반 두 인물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면서 두 인물이 통함을 설명하고자 하지만 이는 괴테가 적어도 코리아의 존재를 알았다는 정도로 불발탄에 그치고 만다. 오히려 그들의 가족사와 사랑 등의 삶을 궤적을 더욱 면밀히 쫓다보면 그간의 차이점, 즉 서로 관계가 없음이 극명해질 뿐이다. 따라서 괴테에 대한 애정으로 다산을 보고, 반대의 경우로 괴테를 본다면 한쪽에 치우친 실망만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인물을 같은 선상에 놓고 따로 보는 것, 다시 말해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각자의 인생을 비교하며 즐기는 것이라면 둘의 특별한 매력에 충분히 빠질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을 소개 글에서처럼 학술적 가치가 부각된 연구 성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에 대한 방대한 자료의 옥석을 가려 가치 있게 만드는 작가의 노력을 학술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또한, 두 지성인을 비교하여 효과적으로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은 참신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다만, 괴테와 다산의 통함을 논하는 것에 주제를 맞춘 연구 성과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위인의 삶을 집약 전기. 어린 시절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누군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말했던 꿈의 앞 글자를 차지한 그들의 이름. 더 이상 그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외면했던 그들의 인생. 이제 그것을 다시 한번 꺼내보는 것은 어떨까? 괴테와 다산이 통하는 장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며, 큰 가르침을 주는 위인전의 의미만으로도 가치 있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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