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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 글쓰기에 대한 사유와 기록 ㅣ 조선 지식인 시리즈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 지음 / 포럼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말 그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TV프로그램, 무한도전. 대한민국 평균이하를 자처하는 6명의 출연자들의 의미 없는 도전은 1위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의 카타르시스를 만족시키며 웃음을 자아낸다.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시도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며 좌절하는 이들의 모습이 시청자에게 우월감마저 주니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은 구성의 매력 외에 이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출연자들의 거침없이 내뱉는 대사에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들은 공중파 상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없는 자리에서는 험담을 하는 등, 과도한 솔직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의 이런 솔직함은 종종 방송에 부적합하다는 평을 받으며 심의위원회의 경고를 받기도하지만 이미 그것은 부작용보다는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서로에 대한 비난이 담긴 말의 내용과 조금이라도 더 튀기 위해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어법. 이것은 비단 TV프로그램의 인기전략을 넘어서 사회의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마당에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포럼. 2007)라는 책은 시대에 흐름을 역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함축된 의미를 싫어 말할 소양이 현재의 우리에게 부적하다는 것은 차치물론하고 그것을 듣고 속뜻을 살필만한 여유조차 없는 까닭이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조선의 지식인은 말하는 법은 말을 아까는 것에서 출발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했던가? 아니, 적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그 존재조차 부정당하기 일쑤다. 이런 마당에 말을 아끼라니? 이것은 구태의연하다 못해 더 이상 맞지 않는 가르침인가?
결론부터 말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한다. 큰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쏘아붙여야 눈에 띠고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유머로 통용되는 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1인 미디어 시대에 단어마다에 함축적의미를 실어 대화하기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표현하는 말에 불필요한 부분은 없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몇 번을 곱씹어 보면 그 의미가 달라지는 조신 지식인의 말보다 참을 가릴 정도로 많은 비유와 역설, 즉 불필요한 꾸밈이 난무하는 이 시대의 말이 더욱 이해불가능 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전달이라는 1차적인 말의 목표를 넘어 그 태도는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다. 이에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는 말로 희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우리는 그 희롱을 재치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흠을 드러내어 농담의 소재로 삼고 되레 그 농담에 분개하는 당사자를 속 좁은 위인으로 만드는 재치 말이다. 이러한 재치는 앞서 예로 든 무한도전이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성격상의 단점이나 비밀이 웃음소리와 솔직함이 미덕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재치 있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명백히 조선 지식인이 경계한 희롱일 뿐이며, 현대의 우리가 판단하더라도 불쾌한 앙금이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크다. 일회성의 웃음을 위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인해 말을 뱉은 당사자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요즘의 재치는 해학이 아닌 희롱일 뿐이다. 때문에 조선 지식인은 말한다. 해학도 희롱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면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말 자체가 많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을 하지 않고 해선 안 될 말만 하는데 있다. 이 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조대왕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간언하는 신하가 없는 당시를 한탄하고 있다. 이는 무엇이 해야 할 말이고 아닌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정도가 지나쳐 오히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아첨을 버리고 기분이 상하더라도 결국엔 옳다고 생각되는 간언을 하라는 말인데, 이는 요즘의 우리에게도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동갑내기 친구끼리라도 아첨, 적어도 과도하게 반복되는 칭찬은 지양해야한다. 듣기 좋은 말도 여러 번 반복하면 하지 않느니만 못할 진데, 속내가 의심스러운 아첨이야 두 말할 나위 없지 않은가. 이렇게 말이란 아끼는 것도 중하지만 할 말을 하는데 정수가 있다.
문학의 추격을 멀찍이 제치고 서점가를 장악하고 있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는 자신을 포장하는 말을 가르친다. 이제는 그 정도를 더해 타인을 기만하는 말, 처세에 능한 말,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는 말을 하라고 한다. 물론 이 책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 역시 노선이 다른 인생지침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한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받아들일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TV를 켜는 순간 호통과 비난이 난무하고 그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목을 베는 칼이다.’라는 말을 되새기게 해준다는 것, 말 한마디 내뱉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