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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노라 에프런 지음, 박산호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해리가 샐리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나면 입가에 배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다. 그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이 들고 자리를 뜰 수가 없다. 그리곤 상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지된 해피엔드가 아닌 계속되는 행복한 삶을.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고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만약 요즘 영화에서 이런 결말을 대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랑이 영원하다는 말을 쉬 믿지 않을뿐더러 되레 촌스럽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오히려 사랑하지만 현실의 벽에 서로의 길을 가는 헤어짐이 도시적이고 세련되게 느껴져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영원한 사랑을 꿈꾸기 마련,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 작가 이자 뒤이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감독 노라 에프런이 쓴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2007. 브리즈)에서 혹시 그런 모습이 비단 상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를 했다. 그래서 결론은?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그녀의 인생은 아지랑이 같은 로맨스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더구나 한 남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그것으로 평생을 달콤한 행복 속에서 보낸 것도 아니다. 그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행하는 화장품은 꼭 손에 넣고, 첫 눈에 반한 아파트에 살기위해서는 정신적 스트레스도 기꺼이 이겨내는 등,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삶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근거를 만들어서라도 꼭 갖고야 만다. 그래, 그녀는 자기합리화의 달인이다.
로맨스로 가득 찬 삶은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은 현실에서 가당치도 않을뿐더러, 그것이 실현되었다고 해도 얼마나 갈 것인가? 로라 에프런의 세면대 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행 지난 기능성화장품들이 말해주는 것은 그녀가 또한 우리가 변덕쟁이이라는 사실이다.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던 핸드백(내 경우는 카메라), 때문에 온갖 장점을 만들어 그것을 손에 넣었지만 과연 몇 시즌이나 들 수 있었나?
그래서 반성? 그런 즉흥적인 구매욕을 반추해 정신적 성장을 꾀하자고? 소비의 노예가 된 자신을 돌아보자고? 쳇, 웃기는 소리. 노라 에프런이 했을 법한 대답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목이 꼴도 보기 싫다. 여자의 나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그녀의 목. 그것을 감추기 위해 성형수술을 고려해 보았으나 얼굴 전체를 시술한 뒤에 야만 가능하다는 소리에 포기하고 만다. 이것이 로맨스로 가득 찬 그녀의 인생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은 여자의 당연한 심리. 그로 인한 소비심리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능력이 된다면 가능한 사치를 누리는 것이 죄일 수는 없다는 것. 반면 살아온 나이를 부정하는 듯 얼굴의 주름을 지우고 팽팽함을 갖는 것은 수치스럽기까지 하단다. 어떻게 보면 이런 그녀,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독설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혹여 그럴지라도 부정하고 싶다. 그녀가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로맨스를 꿈꾸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환갑을 지났다. 더 이상 주변의 주목을 받는 아름다운 청춘의 생기는 없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고 있다. 로맨틱코미디의 주인공이 대부분 젊은 남녀이듯 그녀의 삶은 이제 로맨틱한 영화의 결말을 한참 지나왔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이 서럽기 짝이 없다. 인생에 황금기라는 것이 정해져 있고, 그것이 생물학적 한계라면 말이다. 이에 그녀는 끝까지 상반된 결론으로 변덕스럽지만 솔직한 대답을 한다.
나의 황금기는 지났다. 케네디가 추파를 던지지 않은 유일한 인턴이었지만 그때가 자신의 황금기였고 아름다움의 절정이었다는 아쉬움. 반면 여전히 로맨스는 끝나지 않았다는 상반된 결론. 늙은 육신과 과거의 추억에 슬퍼지지만 오늘도 그녀는 소박한 사치를 위해 쇼핑몰을 찾을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피부의 매끄러움을 더해주는 오일을 사기 위해서 말이다. 고로, 그녀의 로맨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