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 다산, 통하다 - 동서 지성사의 교차로
최종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남부럽지 않았던 책장엔 몇 가지 전집에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당시 인기 있었던 출판사의 기획물로 가가호호 유행처럼 배치되었던 무리를 기억해보면 <세계위인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전집이 좁은 집의 책장 한쪽을 차지하게 된 연유야 자식의 교육을 생각한 부모님의 식견 혹은 당신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다소 불순한 의도였으리라 마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는 확신이 있다. 그렇다면 난 무엇 때문에 그 대단한 위인들의 자취에 감동하고 즐거워했던가?

이 역시 책이 자리 잡게 된 부모의 기대에 부합한 영악한 자식의 심산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런 잔머리가 없었다면 그 책들을 꺼내보지도 않았을 것이니 그렇게 단언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소년소녀를 위한 위인전은 대단한 업적과 성품, 그리고 교조적인 어투로 가득차있어 나이를 먹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는 지금에서 추억하면 맥이 풀리다 못해 거부감마저 드니, 사준 부모보다 읽는 자식의 의중이 더 불순하다할 수 있겠다.

이렇게 불순한 의도임에도 위인전이 재미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연한 기회로 대단한 업적을 세운 이들도 적지 않고, 이제 와서 평가하지면 대단하다는 칭호가 과분한 이들도 있지만 인생 자체가 출판물로 후대에 읽힌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함을 가진 위인이라 부를만하다. 하지만 책장을 차지하고 있던 그 전집이 세월에 못 이겨 과도한 책 먼지를 날린다는 이유로 분리수거함에 처박히고, 수험서와 전공서적에 파묻혀 그것이 현실이고 똑똑한 행동이라 자위하는 삶에 익숙해졌듯이 어린시절의 그 특별한 감흥은 빛바랜 추억이 되어버렸다.

다산과 괴테 역시 마찬가지, 붕어빵 장사로 번 돈을 주식에 투자해 강남 어디 초고층 빌딩에 살며 억 소리 나는 차를 굴린다는 이름 모를 사람의 인생역전이 더욱 가치를 발하는 세상에 그들 또한 철지난 유행의 위인쯤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보다는 <Vocabulary>를 봐야하고, 목민심서 정도로만 알았던 다산 정약용은 참고서의 꼭지에서나 만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거친 우리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 <괴테와 다산, 통하다>(추수밭. 2007)를 읽고 이렇게 개인사마저 들먹이며 감상에 빠진 것인가. 그것은 후회 때문이다. 그들의 가치를 한때는 자신의 가치에 투영시켜 보기만 했고, 지나서는 일반적인 기준에 어긋나는 불유쾌한 재능을 가진 존재로 애써 외면했던 것에 대한 후회 말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빠져 읽으며 슬퍼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고, <파우스트>에는 나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산은 어떤가. 그는 인생 자체가 가르침이 될만한 여전히 스승의 모습이다. 그런 그들을 시험문제의 해답의 틀에 가둬버렸으니 후회가 밀려올 수밖에.

다시 찾은 다산은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저서를 통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오랜 귀향길,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뚫릴 만큼 연구와 저작을 멈추지 않았던 그. 세상의 시선을 받을 길이 요원한 외롭고 고된 삶은 그의 끊임없이 읽고 쓰고 행동하는 인생에 있어 장애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활발한 저술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정보와 학자의 자세는 후대의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며, 과연 공부는 왜하는 것이냐는 반복되는 불만에 종지부를 맺는다.

그 다산 정약용과 비극적 사랑의 대명사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누구나 시놉시스 정도로는 알고 있는 <파우스트>를 남긴 괴테가 서로 통했다니, 이것 참 궁금하다. <괴테와 다산 통하다>의 제목이 암시하는 그들의 연관성이 참으로 궁금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 외에 확연히 드러나는 둘의 공통점을 책에서 찾기는 무리다. 작가, 최종고는 책의 초반 두 인물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면서 두 인물이 통함을 설명하고자 하지만 이는 괴테가 적어도 코리아의 존재를 알았다는 정도로 불발탄에 그치고 만다. 오히려 그들의 가족사와 사랑 등의 삶을 궤적을 더욱 면밀히 쫓다보면 그간의 차이점, 즉 서로 관계가 없음이 극명해질 뿐이다. 따라서 괴테에 대한 애정으로 다산을 보고, 반대의 경우로 괴테를 본다면 한쪽에 치우친 실망만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인물을 같은 선상에 놓고 따로 보는 것, 다시 말해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각자의 인생을 비교하며 즐기는 것이라면 둘의 특별한 매력에 충분히 빠질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을 소개 글에서처럼 학술적 가치가 부각된 연구 성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에 대한 방대한 자료의 옥석을 가려 가치 있게 만드는 작가의 노력을 학술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또한, 두 지성인을 비교하여 효과적으로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은 참신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다만, 괴테와 다산의 통함을 논하는 것에 주제를 맞춘 연구 성과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위인의 삶을 집약 전기. 어린 시절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누군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말했던 꿈의 앞 글자를 차지한 그들의 이름. 더 이상 그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외면했던 그들의 인생. 이제 그것을 다시 한번 꺼내보는 것은 어떨까? 괴테와 다산이 통하는 장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며, 큰 가르침을 주는 위인전의 의미만으로도 가치 있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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