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보스 문도스 밀리언셀러 클럽 6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창작동화가 인기이지만 나의 어린 시절엔 수십 권이 한 질인 소년 소녀 명작동화를 집집마다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것은 기분 좋은 추억이기도 하지만 미화된 틀에 박제된 경험을 뜻하기도 한다. 그나마 창작동화라 불리며 눈길을 끌었던 책들도 역사를 비틀어 자존심 세우기 정도였다. 예를 들면 곰이 아닌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참고 인간이 되었다면 일본에 침략당하기 전에 정벌한 호전적인 한국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나마 교조적인 어투를 벗어나 갈증을 풀어주었던 것은 동화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주제인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그 중 한 테마가 바로 공포이다. 유머가 섞인 것이라면 홍콩 할미 귀신이라든지 귀여운 소년소녀 흡혈귀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꼽을 수 있지만 사실 광적으로 빠져있었던 것은 잠들기 전 어두운 방 창가에 비치는 조그만 불빛에도 움찔하게 만드는 자극적이고 여운이 긴 무서운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었다.

비단 소설만은 아니다. 꼭 어린 시절만은 아니다. 귀신보다 세상이 더 무섭다는 사실에 가까워진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시절 무서운 이야기를 한밤중에 홀로 떠올리면 점잖은척하지만 이내 우스꽝스럽게 갈라지는 헛기침을 연신 내뱉는다.

<암보스 문도스>(황금가지. 2007)를 읽는 동안,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되새긴 감정은 그 시절 무서운 이야기와 조금은 겹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책에 실린 7편의 단편이 모두 무서운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럼 어디 개개의 단편을 살펴보기로 할까?

처음을 여는 단편, <식림>은 사회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소위 말하는 외톨이의 일상을 세밀하게 좇는다. 이로써 잊혀진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단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한 인간이 겪는 잔인한 일상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곧 기억하지 못하는,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기에 묻어둔 기억이 만든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종래엔 어떻게 전이되는 지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루비>는 어느 노숙자의 아침과 함께 시작한다. 주변의 노숙자들은 사회비판적인 인물에서 생물학적인 사회부적응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주인공의 경우는 그저 노숙자의 평온한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자유는, 초연한 삶은 몸을 팔아 잠자리를 청하는 가출소녀의 등장으로 무너진다. 즉, 욕정 앞에서 고개를 드는 본능이 구매하고 구매되는 인생을 버린 그들의 일탈이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 번째, <괴물들의 야회>에서는 불륜으로 맺어진 위태로운 관계와 그 관계 이상의 불안함을 지니고 있는 한 여인을 초초하게 뒤쫓아 그 끝을 보여준다. 뒤이은 <사랑의 섬>에서는 상처 깊은 경험에서 자극을 느끼는 세 여자의 수다가 나열되고, <부도의 숲>에는 현재의 자신을 만든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고 자신의 자식의 모습에서 접점을 찾으며 놀라는 소설가의 딸이 있다.

마지막에 배치된 <독동>과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암보스 문도스>는 그야말로 기묘하고 무서운 이야기이다. <독동>은 묘지에 둘러싸인 절을 무대와 계부라는 뒤이은 무서운 이야기를 암시하는 전통적인 소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암보스 문도스>는 잔망스러움을 넘어서 섬뜩한 악의를 가진 초등학생의 제자에게 짓눌리는 여교사의 시점을 통해 짧지만 탄탄한 맺음이 있는 의심스럽고 무서운 이야기가 완성된다.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본명은 하시오카 마리코라고 한다. 그녀는 이 필명을 쓰기 전에는 다른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이나 청소년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구태여 작가의 이력을 밝히는 이유는 앞서 살펴본 7개의 단편이 가진 상이한 주제 때문이고 서로 다른 주제를 가졌음에도 같은 냄새를 풍기는 까닭이다.

대표작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이 책, <암보스 문도스>만으로 그녀의 색깔을 보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앞서 말한 무서운 이야기하면 떠오르는 추억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 억측일지 모르는 섣부른 판단에 신뢰감을 실어준다.

사회문제와 그 속에 소외된 인간의 모습에 몰두하는 듯 보이다 이내 기묘한 이야기로 독자를 긴장시키고 틈 없이 짜여진 본격 추리의 맛을 내기도 하는 작가, 기리노 나쓰오.

무지개는 7가지의 각각의 색을 가졌지만 우리가 그것을 무지개 색 혹은 무지개 그 자체로 부르는 것처럼 기리노 나쓰오의 이 단편집은 각각 다른 색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그녀만의 고유한 색이라 부를 수 있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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