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꽤나 오랫동안 여전한 인기에 흔들림 없는 미국드라마, CSI과학수사대. 그중에서도 라스베가스 시즌을 보면 증거 위주의 과학수사의 진수를 보여준다. 감정에 흔들리는 인간이기에 범할 수밖에 없는 실수를 최소화하는 과학적인 초동수사. 그들은 말을 할 수 없는 죽은 자의 한을 구체적인 장비와 체계적인 이론으로 풀어준다. 뭐 드라마 이야기이기에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가능하다고 해도 매 사건마다 그와 같이 되리라 장담할 수 없다. 사실이 이럴진대, 과거 호롱불에 의지해 밤길을 가야했던 시대에는 억울하게 죽은 혼을 누가 달래주었을까?

<반야>(문이당. 2007)는 그 시대의 길 그리섬 반장(CSI 라스베가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감정을 배제한 채 과학적 수사에만 몰두하는 그보다는 심증을 굳히고 증거를 보충하는 호레이쇼 반장(CSI 마이애미)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이다. 신통방통한 무녀 반야, 그녀의 신기는 죽은 자가 묻힌 곳에 닿고 거슬러 올라간 추악한 인간의 감정과 전생을 아우른다.

그렇게 반야가 세상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정작 그녀 자신의 한은 누가 풀어줄 것인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지는 않기에 정확한 시대를 알 수는 없지만 사도세자의 등장으로 미루어, 소설의 현재를 영조의 조선시대라 봐도 무방하다. 헌데,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귀천이 명백한 시대이다. 그 속에서 무녀 반야와 그녀의 식솔은 층을 이루지도 못하는 천민 중의 천민이다. 비록 반야의 점괘가 반가의 권세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지만 신분의 한계는 그보다 앞선다.

일상적 말보다 먼저 신기를 내뱉었던 반야, 그녀는 이런 계층의 무력 앞에 파리 목숨에 불과하다. 작가 송은일은 이에 반야에게 두 가지 힘을 선사한다. 하나는 앞서도 언급한 신기이고 이것은 곧 세상을 호령하게 될 것이라는 전설의 만파식령으로 구체화된다. 또 다른 하나는 계급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을 법한 사신계의 존재이다. 반야는 자신에게 내린 신에 의해 인생을 빼앗기지만 그로 인해 전생을 알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탄생은 현생의 삶을 위해서가 아닌 전생의 한을 풀고자 함이다.

더불어, 만민평등을 주창하며 긴 세월 역사의 그림자로 살아온 사신계의 일원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상에 해가되는 무리를 제거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한다. 바로 이들은 전생과 그에 얽힌 관계로 개인의 위기와 나라의 위기를 알게 된 반야를 물리적 힘으로 뒷받침한다. 아니, 그 관계는 어느새 역전되어 사신계의 일원이 된 반야의 모습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추리적 장치와 무녀로 대변되는 계급사회의 폐해와 더불어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등장인물간의 사랑이야기이다. 그것은 계급의 차이와 개인의 행복을 넘어선 집단의 이익에 희생되기에 더욱 위험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비극적이다.

소설의 첫머리의 작가의 변이나 말미의 해설을 보면, 작가가 소설에서 그리고자 한 것은 사회의 부조리를 통사적으로 다룬 역사소설이 아닌 개인의 한을 녹여 만든 소소한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해설이 없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작가 송은일은 아마도 그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두 마리 중 무엇을 잡았는지, 혹은 모두를 잡았는지는 책을 읽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명분이 있어야만하고 무겁게 파헤쳐야만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듯 보이는 우리 문학 동네에 하나의 이야기로 책을 내고 승부를 건 그녀의 결정이 빛바래지 않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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