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프로젝트 - 얼렁뚱땅 오공식의 만화 북한기행
오영진 지음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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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문제(그것이 문제라는 것 자체가 안타깝다), 특히 통일이라는 단어가 놓이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한껏 움츠러들게 된다. 그리곤 자신의 입장에 따라 경직된 열변을 토해낸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우리가 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즉, 우리는 단일민족의 당위성을 들어 통일의 열렬한 지지 입장을 갖거나 유엔에 따로 가입된 국제적 의미의 개별 국가에 의의를 두는 등 남북문제에 대한 뚜렷한 의견만을 가지고 있을 뿐, 북에서 시선을 피한 채 우리만의 틀에 갇혀 있는 것으로 북을 바라보는 시선은 북을 향한 것이 아닌 우리 내부를 향한 것이다.
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이처럼 쉬워 보이지만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쩌면 눈을 크게 뜨면 보일 듯 가까이 있는 북은 우리에게 상상의 나라인 것인지도 모른다,

조그만 땅을 나눠 살고 있으며 불과 반세기 전에는 같은 울타리 안에 부대끼며 살아온 북을 바로 보는 시도를 한 책은 적지 않다. 또한 만화의 형식으로 보다 쉽게 다가서려는 시도 역시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특별할 것 없는 책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렁뚱땅한 소박함
먼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이유를 ‘얼렁뚱땅’이라는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얼렁뚱땅은 책 속의 주인공인 오공식의 성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 성격의 오공식이 바라본 북의 모습도 얼렁뚱땅하다. 그의 시선에 비춰보면 지도원 동지도 소박하다 못해 다소 엉성해 보이는 것이다.
입고 있는 옷을 벗어던지면 같은 피부색을 드러내는 것은 북과 우리 모두 매한가지임에도 그들에 대한 막연한 거리감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사이의 막연한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 조장했건 우리 자신이 자초했건 말이다. 이런 불안한 장벽을 녹이는 힘이 바로 다소 엉성한 모습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매력에 있다. 또한 바로 이것이 <평양프로젝트>(창비. 2006)라는 공식적인 냄새를 풍기는 제목 보다 부제인 ‘얼렁뚱땅 오공식의 만화 북한기행’에서의 얼렁뚱땅 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이유이다.

이웃나라, 먼 나라
학창시설에 <먼 나라 이웃나라>라는 책 불티나게 팔렸었다. 그 책은 아직도 꾸준히 팔리며 먼 나라를 우리의 책장에 가져다 이웃나라로 만들어준다. 북을 그저 이웃나라로 봤을 때 그들은 진정 우리와 가까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거리상 그렇다는 것이고 심리적인 거리감을 따진다면 어떤 나라 보다 먼 나라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심리적인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질 때가 있다. 우리가 북한 물품에 대해 갖는 묘한 안심을 예로 들어도 그렇다.
중국산 농산물이 판을 치는 지금 그것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히 고조되고 있는데 그와는 달리 북한산이라는 딱지가 붙은 농산물은 거부감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안심하고 찾게 된다. 마치 강원도산 감자, 이천 쌀 등의 지역 표기와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이 책에 언급된 바로서, 비록 중국을 통해서이지만 가짜 한국 상표의 양복이 대접을 받고 남쪽의 노래가 연변의 노래로 둔갑해 불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 두 경우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남북의 우리) 그 벽을 의식하건 아니건 부지불식간에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는 등을 돌리고 있기에 먼 나라이면서 등이 닿아있는 하나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서로의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 뿌리를 둔 언어임에도 경우에 따라 의사소통의 흐름이 끊길 정도로 서로의 문화가 다른 남과 북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엄연한 차이가 있고 조금 의미는 벗어나지만 선거철마다 두 동강 나는 여론을 봐도 남북의 차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차이를 좁히는 노력 보다 그 차이를 바로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차이를 차별로 볼 것이냐 단순한 차이로 볼 것이냐는 우리의 몫인 것이다.

끝으로,
남과 북을 가르는 것은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절되어 살아온 삶에 편안함을 느껴서이다. 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남북문제는 순식간에 곪아 터지는 종기가 아닌 벌겋게 달아올라 엄청난 크기를 한동안 유지하며 곪아 터지지도 않다가 가라앉는 종기이다. 그런 종기가 이마에 자리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없어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대고 만다. 결국 종기가 가라앉으면 그 자리에 작은 상처가 남는다.
종기가 남긴 상처에 비할 바가 아닌 상흔을 품고 사는 우리의 부모세대는 그 상처로 북을 생각하고 그런 부모세대의 손에 자란 우리는 단절된 삶에 익숙해져 부모의 종기가 유전되지 않기를 바랄 뿐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 종기가 더욱 커질지, 곪기 시작해서 바늘 끝을 들이대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터뜨릴 것인지 그대로 둘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아니 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기는 한 것일까?
순식간에 읽히는 만화였음에도 뒤에 남는 생각의 무게는 만만치 않은 것은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팔뜨기의 눈을 가진 나 자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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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에게 길을 묻다
송정림 지음, 유재형 그림 / 갤리온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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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을 생각하면 그와 함께 떠오르는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있다. 지방에서 전학을 와서 친구가 없었던 한 때 버스로 1시간 이상이 걸리는 등하굣길에 벗이 되어준 싱클레어와 데미안.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읽고 쓴 글을 칭찬해준 중학교 시절의 국어선생님. 그 시절 달뜬 추억이 고전문학을 떠올리면 같이 따라온다.


명작이라 불리는 고전문학의 당위성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힘에 있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중고등 교과과정의 주입식 교육의 잔재 때문일 수도 있다. 명작이라는 이름만으로 감동받기를 강요당한 경험이 떠오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 <명작에게 길을 묻다>(갤리온. 2006)가 주는 일말의 거부감은 바로 그런 점이다. 명작 속에 삶의 지혜가 있다는 식의 교조적인 제목과 글의 말미에는 꼭 따라붙는 진정한 사람과 사랑에 대한 계몽적인 어투. 그것이 내 속 어딘가에 있을 꼬투리를 잡아채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명작, 혹은 오래 읽히고 있는 순수문학은 이렇게 상이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한다. 사춘기 시절의 감수성에 젖은 달뜬 추억과 바르고 명백한 해석이 주는 불편함에 묻어나는 조장된 감동이 충돌하는 소용돌이에 말이다. 하지만 이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선을 싹둑 자르면 결국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명작이 있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단순하기에 깊이가 있고, 오래된 냄새를 풍기는 이 소설들은 자의식의 분열을 일삼는 근래의 소설들에 지친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그 제목과 요약된 스토리 정도는 익히 알 정도로 많은 문화컨텐츠에 차용되는 고전문학이 신선한 자극을 준다는 말에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개인적이 생각이지만 현대문학을 읽고 난 후 종종 보트에 몸을 싣고 넓은 호수에서 표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요즘의 문학작품이 우선 그 형식이 다양하고(물론 고정된 형식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함축적이다 못해 압축적이며, 모호한 문장을 세련되게 포장한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 굉장한 매력을 발산하기도 하지만 구태의연함을 지양하고 세련됨만을 지향한 나머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고전문학을 읽을 때는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우물이 주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그 속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적이 망설여지지만 일단 보게 되면 검은 수면위로 내가 살고 있는 나의 표상을 비춰보게 된다.


이것은 굳이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무게로 가르자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고전문학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도 아니다. 분면 고전문학 역시 그 시대의 현대문학이고 지금의 문학만이 비추어낼 수 있는 사회적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도 구태의연한 고전문학에서 길을 묻고 그 길의 안내자인 그것을 명작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망설임 없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작도 끝도 없이 수많은 여지를 남기기에 매력적인 작금의 작품의 매력은 결여되어 있을지 몰라도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질리지도 않고 인간에 대한 관심을 쏟아내는 명작.

우리가 이 명작에 길을 묻을 수 있는 이유는 감동을 권하는 바로 이런 끈기와 생명력 때문은 아닐까.


※ 유재형님이 그린 삽화가 굉장히 매력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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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젠트
가쿠다 미츠요 지음, 양수현 옮김, 마쓰오 다이코 그림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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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하다. 지인이 자주 쓰는 말이다. 내게 이 말은 왠지 낯간지럽고 기분을 들뜨게 해서, 조금은 가벼운 느낌이다. 마치 선남선녀가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헐리웃 로맨틱코메디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들을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
Presents를 읽으면서 그 달달하다 는 느낌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기쿠타 미쓰요의 따뜻한 필체와 마쓰오 다이코의 아기자기한 색을 가진 그림이 만나 조금은 가볍게 기분을 달뜨게 하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Presents 속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달콤한 상상에 젖게 만드는 선물의 포장지를 뜯으면 그 속에는 그리 녹녹치 않은 현실이 있다.

 

사람은 망각하기를 원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망각을 위해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책 속에 빠지기를 반복한다. 반복, 그것이 반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술이 깰 때의 숙취와 그토록 빠져있던 음악도 언젠가는 싫증이 나고 책 속의 활자가 무한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하기에 또 술에 취하고 새로운 책과 음악을 찾아낸다. 망각을 위한 반복이 거듭되는 것이다.
선물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그것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선물을 받을 때의, 포장지를 뜯을 때의 두근거림은 매한가지이다. 그 두근거림은 굉장히 ‘달달’해서 우리에게 손쉽게 현실도피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내 그 느낌을 흐려지고 사라지게 된다.
기쿠타 미쓰요가 말하는 선물이라는 것은 그렇게 잊혀져간 기억들이다. 그 추억속의 자신의 과거와 거기에 얽힌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인 것이다.

 

어쩌면 선물의 운명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주고받는 사람의 희열이란 포장지에 쌓여있을 때의 모습은 당당해 보이지만 그것도 잠시, 기억 속에서 조용히 퇴장하고 만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퇴장. 여기서 선물의 본질이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름다운 매개체라는 구태의연한 말은 하지 않겠다.(벌써 한 것일지도) 앞서도 말했듯 어쩐 방법으로 미화시킨다 할지라도 결국은 망각의 본성을 담고 있는 것이 선물이기에 말이다.
그것이 그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던지 혹은 갖고 있는 것인지 이내 잊히고 말아 가끔씩 꺼내보는 일 조차 힘든 선물. 하지만 우리는 그 선물을 다시 꺼내보려고 한다.
자의식으로 무의식으로 종래엔 망각을 반복하는 삶은 일상의 평온함을 보장해주는 듯 보이지만 그에 따라오는 상실감은 복리의 이자가 붙어 수위를 높여간다. 그 수위가 콧잔등에 닿아 까치발을 하지 않고서는 숨을 쉴 수 없을 때가되면 우리는 소중했던 선물을 다시 꺼내어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쿠타 미쓰요가 Presents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언젠가 우리가 받았고, 언젠가는 받을지도 모를 그런 선물이다.
평범하지만 부모님의 인생과 맞닿아있는 이름을 갖고 있고, 유년시전 하굣길에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엄습하면(어린나이에 조금 우습지만) 애꿎은 책가방만 빙글빙글 돌렸던 기억이 있으며, 처음 맞는 달뜬 기분에 캄캄한 밤 침대 위에서 되새겼던 첫키스의 추억이 있다.
그리운 사람과 그 관계속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냄비세트)이 있는가 하면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거듭했던 첫사랑의 잊히지 않는 전화번호(성게전병)를 간직했기에 그녀를 다시 찾기도 했다. 또, 반복되는 상처에 어리석을 정도로 휩쓸렸던 때에는, 편지상자(비상열쇠)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너무도 어리석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버리지 못한 자신을 감싸안아주는 베일 같은 새로운 사람에게 감화되기도 했다.
서로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고 생각했던 그림은 서로 다른 기억으로 갈무리 되어 그 관계를 지탱해주고 후일 다시 찾은 그 그림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지부진한 삶에 지쳐 처절한 기분에 잠겼다가도 다음날 아침 어머니의 된장찌개(요리)에 기운을 되찾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더 이상의 기대도 미련을 남기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버릴 수 있게 해준 선물(곰인형,눈물)도 있을 것이다.

 

그리워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잊기 위해 망각의 과정을 반복하는 우리의 시대는 명실 공히 상실의 시대이다. 단순히 단어만 같을 뿐 의미가 전혀 다르기도, 단어는 다르지만 의미가 닿아있는 가쿠라 미쓰요와 나의 12가지 선물은 그런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달콤하게 감싸주는 묘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
문득 꺼내보는 것만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달콤한 선물을 기억하게 해주는 실마리가 이 책 ‘Presents'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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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에 돈을 묻어라 - 5년 후 부자경제학
정종태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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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우선 무지에서 오는 약간의 공포감과 투자의 개념보다는 투기의 개념에 가깝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더구나 주식해서 돈 버는 사람 없다. 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기에 주식이라는 단어는 나와는 영영 인연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위험부담으로 인한 망설임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무지에서 오는 공포감은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열심히 까지는 아니지만 거부감 없이 주식에 관련된 책을 읽어 보고, 신문기사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나에게서 주식을 멀어지게 한 이유가 주식투자에 대한 투기성의 부정적인 시각과 가치 폭락의 리스크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주식에 투기의 개념이 아닌 투자의 개념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한 장기적인 투자의 개념으로 다가간다면 그 거리감이 상당히 좁혀질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이 책을 손에 잡게 되었다.

성공한 투자자들의 인터뷰 형식의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은 투자가들의 성공담 내지는 투자기관(?)의 홍보 정도였다. 또한 필자의 책 속에 소개된 투자가들에 대한 극찬은 나로서는 거부감이 들 정도로 과하다 싶은 부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을 어느 정도 감수하고 다가간다면 필자가 극찬하고 있는 것은 투자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그들의 투자방법과 투자 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을 짓는 것은 다분히 작가의 포션이고 텍스트를 독해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기에 이런 결론 없는 문제는 뒤로하고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단지 투자가가 아닌 그들이 주목하는 장기투자, 가치주투자에 있다는데 시선을 돌려보자.
책 속의 성공한 투자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투자의식에 있다. 주식이라면 투기를 먼저 떠올렸던 나에게는 그것이 다소 이례적인 사실이었다. 때문에 단기간의 수익을 위해 기업문화를 망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서 조금은 발을 뺄 수 있기도 했다. 또한 헤지펀드라면 증권가의 폭력 용역사로 치부하던 편협한 사고의 틀도 조금은 깰 수 있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왜 가치투자의 장기적 안목이 빛을 발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이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고 집어내는 것은 내 지식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와중에 몇 가지 이유를 꼽아보자면,
첫째, 위험부담을 줄일 수 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동의 가치주로 생각되던 주식이 재활용쓰레기가 된 경우도 많지만 단기적인 이익을 보고 시황에 휩쓸리는 투자 보다는 가치주에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안정적이다. 가치주의 경우 그 기업의 경영자의 경영의식과 기업의 내제된 가치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가가 폭락할 때가 매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가치주에 투자 한다면, 결국 기업의 성장과 주가의 성장의 측면에서 봤을 때, 크건 작건 이익을 손에 쥘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물론 개인의 이익추구를 우선으로 하는 주식투자에 있어서 투기적 성격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가치주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가 그렇지 않은 투자와 비교해 기업의 경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장기적인 가치투자는 기업과 투자자의 공생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주식투자에 대한 타고난 감(?)을 갖고 있거나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외한 일반투자가들에게는 급변하는 주식시장의 틈새에서 이익을 실현하는 일이 상당히 힘들다. 물론 꾸준한 관심을 갖고 경험을 쌓는다면 이익을 불러주는 노하우를 쌓을 수도 있겠지만, 종사하고 있는 생업을 생각한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충분한 사전조사나 저변의 지식이 없는 일시적인 판단으로 돈을 벌고자 한다면 그것은 도박이나 마찬가지 이다. 또, 그렇게 해서 이익을 실현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복권에 당첨된 것이라 생각하겠다.
결국 생업에 매달린 일반 소액투자자들에게 또는 노후를 위한 자금을 맡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위험부담이 적고, 매도와 매수의 적절한 타이밍에 덜 민감한 장기적인 가치주투자가 적격일 수 있다.

물론 이 몇 가지의 장점을 이익으로 연결하는 일 조차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 녹녹치 않은 일이다. 그 장점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투자의 장점과 그 장점을 백분 활용하는 투자가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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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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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자녀의 교육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종종 이중적 잣대를 양손에 들고 상황에 따라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들며 현상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자녀교육에 있어 빈번히 사용되는 이중적 잣대의 예를 들자면, 신체발부 수지부모로 대변되는 인식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라는 속담이 품고 있는 인식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 인식은 소유욕과 방임의 대립된 가치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말을 소유욕의 잣대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는 속담을 방임의 잣대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기에, 이 말들이 품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이나 실질적인 예를 들어 공격한다면 여지없이 무너질 빈약한 논리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논리를 자녀의 교육에 있어 그대로 맹신하는 부모가 많은 것은 분명한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처음하게 된 것은 ‘아동학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였다. 그 관심을 시작으로 점점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인간의 본성마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잔인한 현실을 야기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소유욕’과 ‘무관심’의 이중적 잣대에 있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기는커녕 소유물이란 개념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가 어떤 경우에는 돌보지 않는 화초 대하듯 방임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아동학대를 일삼는 부모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우리네 모두에게 확대해석할 수 있는 문제이다.
혹자는 이런 우려를 현실감 없는 문제로 치부할 지도 모른다. 요즘에 들어 자녀에 대해 관대하기만한 친구 같은 부모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으니 그러한 의견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일례로, 공공장소에서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예의 없는 아이들의 부모를 보며, 좀 더 엄격한 자녀교육의 필요성을 몸소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사회는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양 극단을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작가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배경이 되는 사회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미국과 유럽에 국한된다. 물론 그 어떤 나라에도 학대받는 아동에 대한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사회인식의 성장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발본색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는 상이한 입장, 즉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라는 개념과 부모의 권위의 붕괴를 우리보다 일찍 맞이했으며 아동의 보호를 위한 법제도의 정착 정도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사회의 작가가 인식하고 있는 사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주지했다시피 우리의 사회는 자녀교육에 대한 고질적인 병폐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그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작가가 말하고 있는) 소위 선진국의 문제 또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의 본질적인 문제는 자녀교육에 대한 범주를 넘어서 상실감에 빠진 국민성에 까지 그 원인을 넓혀갈 수 있으니 제쳐두더라도 작가가 문제시 하고 있는 현상이 현재의 우리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앞으로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그가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볼 가치는 충분하다.

레너드 삭스의 시선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와 그에 따른 교육방법의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그의 주장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녀교육에 이중적인 잣대를 서슴지 않고 들이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먼저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초공사가 없이 성별의 차이에 따른 효율적인 교육 방법을 논하고 접목시켜 봤자 결국 그 집은 다시지어야 할 것이다. 기울어진 기초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집 또한 기울어 질수 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또한 레너드 삭스 역시 학대에 대한 반대급부로 급격한 변화를 맞은 현재의 가족의 형태와 부모의 권위를 잃어버린 자녀교육 방법에 우려를 나타내며 그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교육적, 사회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과도기(?)적인 우리의 교육관에 제동을 걸어준다는 것에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유지되던 고압적인 자녀교육관에서 교사나 부모의 권위 상실의 극단에까지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치닫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에 제동을 걸어주는 것이다. 부모의 의지에 따라 자녀의 앞길을 결정짓는 고압적인 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고 자녀를 예의 없게 만드는 우리의 부모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고,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지역적 차이를 인정한 다해도 의식의 제고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비슷한 맥락이자 이 책의 주제인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압적인 양육관의 반대급부가 방종한 아이를 양산한 것처럼, 남녀간의 차별에 대한 무차별적인 의식개혁이 오히려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물론, 남자와 여자에 공평한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개혁에는 극약처방이 유효하다. 점진적인 개선을 약속하며 충돌 없는 변화를 꾀하는 사회의 중심에는 남자들이 있기에 때로는 그런 극단적인 대립이 필요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금녀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군대라는 집단에서 여군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녀들의 임무가 보조적인 위치에서 지휘관의 위치로 상승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며 상징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병역의 의무를 남녀 모두에게 지게 한다면 결과는 어떨까?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그것은 차별 타파가 아닌 차이를 무시하는 행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행동이 대부분의 부모와 교사들에게서 의식 없이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그러한 남녀에 차이를 두지 않는 교육방법을 통해 남아 여아의 의식을 개선하고 점진적으로는 사회의 성차별을 극복할 것이라는 신념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치관의 변화가 유전학적 변이를 일으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말하는 성별에 따른 자연스러운 교육방법이 남아와 여아를 이분법의 잣대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 같은 여아, 여자 같은 남아들의 교육은 그런 이분법으로는 전혀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우선 문제를 바로 보는 자세가 중요한데, 남아와 여아를 통합된 교육방법으로 양육하려는 견지는 그 시야를 흐르기 일쑤다. 더군다나 가족의 범주가 축소되고 그 의미마저도 퇴색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성에 따라 그은 선으로 나눌 수 없는, 선을 밟고 있거나 넘나드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남아와 여자의 유전학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서로 다른 교육방법으로 효과를 증대시키는 노력이 선위의 아이들에게도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그 노력의 첫 단추는 아이들의 차이를 바로 볼 수 있는 부모의 올바른 시각이다.

어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 물론 작가의 견지에 무조건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무지함과 무관심에는 이견이 없었다.
우리들의 아이는 혼자서 크는 것도, 부모의 고집으로 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저마다 타고난 특성이 있고, 그 특성을 바탕으로 부모와 교사 나아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한 아이들을 극단적인 잣대, 특히나 위험한 이중적 잣대로 양육하려는 것은 터무니없이 위험한 발상이다.
또한, 부모의 자질은 유전이 아니다. 물론 부모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이어받기에 그 자질을 어느 정도 환경적 요인이라 봐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못된 양육방식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는 것에 대한 핑계로 환경적, 유전적 요인을 든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자녀의 교육에 대하는 부모 역시 교육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려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선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는 잘못된 교육관은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전통이 아닌 악습에 불과하다.
이렇게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또 다른 가치는 부모로서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도록 안내하며, 자로는 젤 수 없는 자녀의 성장을 바로 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자를 우리의 인식에 성공적으로 그려주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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