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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평점 :
비단 자녀의 교육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종종 이중적 잣대를 양손에 들고 상황에 따라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들며 현상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자녀교육에 있어 빈번히 사용되는 이중적 잣대의 예를 들자면, 신체발부 수지부모로 대변되는 인식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라는 속담이 품고 있는 인식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 인식은 소유욕과 방임의 대립된 가치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말을 소유욕의 잣대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는 속담을 방임의 잣대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기에, 이 말들이 품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이나 실질적인 예를 들어 공격한다면 여지없이 무너질 빈약한 논리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논리를 자녀의 교육에 있어 그대로 맹신하는 부모가 많은 것은 분명한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처음하게 된 것은 ‘아동학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였다. 그 관심을 시작으로 점점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인간의 본성마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잔인한 현실을 야기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소유욕’과 ‘무관심’의 이중적 잣대에 있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기는커녕 소유물이란 개념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가 어떤 경우에는 돌보지 않는 화초 대하듯 방임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아동학대를 일삼는 부모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우리네 모두에게 확대해석할 수 있는 문제이다.
혹자는 이런 우려를 현실감 없는 문제로 치부할 지도 모른다. 요즘에 들어 자녀에 대해 관대하기만한 친구 같은 부모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으니 그러한 의견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일례로, 공공장소에서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예의 없는 아이들의 부모를 보며, 좀 더 엄격한 자녀교육의 필요성을 몸소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사회는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양 극단을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작가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배경이 되는 사회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미국과 유럽에 국한된다. 물론 그 어떤 나라에도 학대받는 아동에 대한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사회인식의 성장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발본색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는 상이한 입장, 즉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라는 개념과 부모의 권위의 붕괴를 우리보다 일찍 맞이했으며 아동의 보호를 위한 법제도의 정착 정도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사회의 작가가 인식하고 있는 사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주지했다시피 우리의 사회는 자녀교육에 대한 고질적인 병폐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그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작가가 말하고 있는) 소위 선진국의 문제 또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의 본질적인 문제는 자녀교육에 대한 범주를 넘어서 상실감에 빠진 국민성에 까지 그 원인을 넓혀갈 수 있으니 제쳐두더라도 작가가 문제시 하고 있는 현상이 현재의 우리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앞으로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그가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볼 가치는 충분하다.
레너드 삭스의 시선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와 그에 따른 교육방법의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그의 주장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녀교육에 이중적인 잣대를 서슴지 않고 들이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먼저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초공사가 없이 성별의 차이에 따른 효율적인 교육 방법을 논하고 접목시켜 봤자 결국 그 집은 다시지어야 할 것이다. 기울어진 기초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집 또한 기울어 질수 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또한 레너드 삭스 역시 학대에 대한 반대급부로 급격한 변화를 맞은 현재의 가족의 형태와 부모의 권위를 잃어버린 자녀교육 방법에 우려를 나타내며 그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교육적, 사회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과도기(?)적인 우리의 교육관에 제동을 걸어준다는 것에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유지되던 고압적인 자녀교육관에서 교사나 부모의 권위 상실의 극단에까지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치닫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에 제동을 걸어주는 것이다. 부모의 의지에 따라 자녀의 앞길을 결정짓는 고압적인 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고 자녀를 예의 없게 만드는 우리의 부모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고,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지역적 차이를 인정한 다해도 의식의 제고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비슷한 맥락이자 이 책의 주제인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압적인 양육관의 반대급부가 방종한 아이를 양산한 것처럼, 남녀간의 차별에 대한 무차별적인 의식개혁이 오히려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물론, 남자와 여자에 공평한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개혁에는 극약처방이 유효하다. 점진적인 개선을 약속하며 충돌 없는 변화를 꾀하는 사회의 중심에는 남자들이 있기에 때로는 그런 극단적인 대립이 필요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금녀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군대라는 집단에서 여군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녀들의 임무가 보조적인 위치에서 지휘관의 위치로 상승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며 상징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병역의 의무를 남녀 모두에게 지게 한다면 결과는 어떨까?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그것은 차별 타파가 아닌 차이를 무시하는 행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행동이 대부분의 부모와 교사들에게서 의식 없이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그러한 남녀에 차이를 두지 않는 교육방법을 통해 남아 여아의 의식을 개선하고 점진적으로는 사회의 성차별을 극복할 것이라는 신념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치관의 변화가 유전학적 변이를 일으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말하는 성별에 따른 자연스러운 교육방법이 남아와 여아를 이분법의 잣대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 같은 여아, 여자 같은 남아들의 교육은 그런 이분법으로는 전혀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우선 문제를 바로 보는 자세가 중요한데, 남아와 여아를 통합된 교육방법으로 양육하려는 견지는 그 시야를 흐르기 일쑤다. 더군다나 가족의 범주가 축소되고 그 의미마저도 퇴색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성에 따라 그은 선으로 나눌 수 없는, 선을 밟고 있거나 넘나드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남아와 여자의 유전학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서로 다른 교육방법으로 효과를 증대시키는 노력이 선위의 아이들에게도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그 노력의 첫 단추는 아이들의 차이를 바로 볼 수 있는 부모의 올바른 시각이다.
어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 물론 작가의 견지에 무조건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무지함과 무관심에는 이견이 없었다.
우리들의 아이는 혼자서 크는 것도, 부모의 고집으로 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저마다 타고난 특성이 있고, 그 특성을 바탕으로 부모와 교사 나아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한 아이들을 극단적인 잣대, 특히나 위험한 이중적 잣대로 양육하려는 것은 터무니없이 위험한 발상이다.
또한, 부모의 자질은 유전이 아니다. 물론 부모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이어받기에 그 자질을 어느 정도 환경적 요인이라 봐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못된 양육방식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는 것에 대한 핑계로 환경적, 유전적 요인을 든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자녀의 교육에 대하는 부모 역시 교육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려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선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는 잘못된 교육관은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전통이 아닌 악습에 불과하다.
이렇게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또 다른 가치는 부모로서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도록 안내하며, 자로는 젤 수 없는 자녀의 성장을 바로 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자를 우리의 인식에 성공적으로 그려주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