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낙원 - 현대 도시 문화와 삶에 대한 성찰
정윤수 글.사진 / 궁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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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7 한마디로, 발로 쓴 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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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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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아내가 쓴 이 책의 서문을 꼭 읽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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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키 바트만 - 19세기 인종주의가 발명한 신화
레이철 홈스 지음, 이석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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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종주의’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끔찍한 것들 중 하나다. 유럽인들이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신체적 특징을 가진 원주민들을 만나게 된다. 다른 인종 간의 만남은 역사적인 경이로 기록될 수도 있었다. 유럽인은 그러는 대신 원주민을 하등인간으로 정의 내리고, 정복하고 착취했다. 인종주의는 새로운 땅과 인종을 정복 가능하게 만드는 합리화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신의 계시, 과학적 탐구, 영토 확장에 대한 제국적 욕망 등, 당대의 건전하지 못한 모든 사상들이 인종주의를 뒷받침했다. 아프리카가 쌓아온 오랜 문명을, 유럽인들은 삽시간에 망가트렸고,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 인들을 자신의 발아래 놓았다. 피부색은 다르지만 같은 인간임을 유럽인들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사르키 바트만’은 그런 인종주의가 낳은 끔찍한 신화다. 남아프리카 코이산족의 처녀였던 사르키는 유럽인들에 의해 노예로 끌려갔다. 비록 노예이긴 했지만, 그녀의 고향 땅 케이프타운에서 생활이 그리 끔찍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유민 흑인 밑에서 유모로 일했고, 군가대 군인과 가정을 꾸미기도 했다. 하지만 노예상은 매력적인 외모의 사르키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를 아프리카 희귀종으로 포장하여 런던에서 인종 전시(freak show)를 계획한 것이다. 
 

아프리카 인으로서는 그리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지만, 유럽인들의 눈에는 그녀의 엉덩이를 비롯한 몸매가 비정상적으로 커다랗게 보였다. 전신 스타킹을 신고, 기린 가족을 걸치고, 가면을 쓰자 그녀는 육감적인 매력을 지닌 검은 비너스로 변했다. 전시 기획자는 그녀를 ‘호텐토트의 비너스’라고 선전했다. 호텐토트는 코이산족을 저열하게 부르는 명칭이었다. 이상하고 불안정한 것, 성적으로 변태적이란 의미도 있었다. 유럽인들에게 사르키는 관음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커다란 엉덩이와 긴 음부를 구경하고 관찰했다. 엉터리 과학자들은 그녀의 몸매를 ‘불량한 진화의 증표’라 여겼다. 그녀는 동물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 아닌 인간 취급을 받으며 치욕스런 삶을 살았고, 그렇게 죽었다. 


그녀가 사후에 밀랍으로 박제되어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의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저널리스트인 레이철 홈스는 철저한 사료조사를 통해 남아프리카에서 영국, 다시 프랑스로 건너간 사르키 바트만의 비극적 삶을 추적했다. 이 책은 그동안 막연하게 알려졌던 사르키의 삶을 자세히 묘사한다. 


그녀는 한 인종이 다른 한 인종에게 휘두른 폭력의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기억되어야 한다. 남아공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프랑스에 사르키의 반환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용서할 수 있지만 잊지는 않겠다.” 인종주의란 이름의 차별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녀를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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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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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운동이 지금처럼 산발적이고, 또 그 여파가 치명적인 시기는 없었다. 물론 여기서 대중운동이 반드시 거리의 가두행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의 대중운동은 훨씬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방식, 말하자면 인터넷 공간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여론 형성은 주류 언론의 그것을 뛰어넘기 일 수다. 과거의 카페와 광장이 대중운동에 기여했던 역할을 인터넷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 의한 대중운동의 진정한 대중화에도 장단이 있다. 접근이 쉬워지고 소통이 활발해진 만큼, 각자의 입장에 더 잘 몰입하게 됐다. 그리고 과몰입은 무비판적인 맹신을 낳기 마련이다. ‘황우석 사태’는 대중운동의 맹신이 낳은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전문가와 언론이 제시하는 의문에 대항해 오히려 황우석의 편을 들었다. 그의 사기행위가 낱낱이 밝혀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황우석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황우석 사태에서 보인 대중의 맹신은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떤 집단적인 최면이 그들로 하여금 황우석을 맹신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미국의 부두 노동자였던 에릭 호퍼는 ‘종교운동이 되었건 사회혁명이 되었건 민족운동이 되었건 모든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중운동이 파급되는 과정에 비슷한 심리유형의 사람들이 대중운동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이다. 에릭 호퍼는 이들 맹신자들의 유형을 살펴보고 그들의 심리 상태를 파악했다. 가난한 사람, 부적응자, 이기적인 사람, 야심가, 소수자, 권태에 빠진 사람, 죄인. 에릭 호퍼는 이들을 맹신자들의 유형으로 손꼽았다.  


에릭 호퍼의 이 책은 대중의 비정상적인 심리상태에 기반한 전체주의를,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파악하려 했던 한나 아렌트나 에리히 프롬과는 크게 다르다.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이 유발되는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밝히는 대신,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맹신하는 심리 상태를 파악하려 했다. 그는 맹신자들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들이 기꺼이 대중운동에 목숨을 바치며 뛰어드는 것은 대중운동 속에서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해소할 희망을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호퍼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맹신자들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희망을 꿈꾸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운동에 대한 에릭 호퍼의 생각이 완전히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 책은 엄밀한 태도로 논리를 전개하는 사회학 책이 아니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이라는 부제처럼, 『맹신자들』은 논리가 아닌 단상으로 대중운동의 실체 파고든다. 어떤 부분에선 획기적이지만 또 어떤 부분에선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호퍼가 자신의 이론 속에서 대중운동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를 (은영 중에) 회피하기 때문에, 대중운동에 대해 그가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그는 대중운동이 지닌 변혁의 역동성을 오히려 긍정하는 여지를 보인다. 노골적인 무신론이 종교에 대한 무관심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한 치혼 주교의 말을 빌려서 말이다.
우리는 에릭 호퍼가 이 책을 썼던 1940년대보다 훨씬 더 대중운동과 밀접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한동안 우리나라의 정치계를 뒤흔들었던 ‘안철수 현상’도 어느 정도 안철수 개인에 대한 우리의 맹신이 한몫했음을 고백하자. 우리는 대중운동의 맹신자가 아니라 비판적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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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조현 지음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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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단정적일까?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시가 세상을 바꿔왔다면, 세상이 지금의 모습은 아니어야 한다. 충분히 아름답지는 않아도, 비유와 은유가 넘치는 그런 세상이어야 할 텐데,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가장 큰 증거, 세상을 보라.

말하자면, 시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 바에야,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상상이다. 문학은 줄곧 세계의 창이나 거울 노릇을 자임해 왔지만,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투과되거나 반사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길 더 좋아했다. 아니면 현실에 매몰돼 현실 밖에 보질 못했다. 문학의 자리는 좁아졌고, 앞으로도 좁아질 것이다. 하물며 시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이나 시가 처한 현실이 암담하긴 하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세상엔 여전히 시의 힘을 믿는 이들이 있다. 적어도 시인들은 그럴 것이고, 시 애호가들은 그럴 것이다. 그들에겐 대다수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는 현실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세계는 시로 요동치고 있으므로, 그 운동을 어떻게 전이할 것인가가 진정 문제일 따름이다.
그런 믿음은 상상력이 더해져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조현의 소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와 같은 작품이 그런 노골적인 믿음을 숨기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는 이른바 평행우주를 다룬 작품이다. 작가가 다소 뻔뻔하게 전개해 나가는 작중의 우주는, 우리가 사는 우주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비틀스의 멤버가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라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차이일 뿐이다. 이 우주에 태어난 마이클 햄버거라는 시인은, 이본 마멜이라는 편집자의 완전히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펭귄현대시인선집’에 이름을 올리게 되고, 대형 햄버거 프렌차이즈 때문에 경영난에 허덕이는 소형 햄버거집 아들이었던 커닝스 주니어는 서점에서 가서 ‘햄버거’란 키워드가 들어간 모든 책을 사들이게 됐다. 그 속에 마이클 햄버거의 시선집이 끼어 있었던 것도 우연이었고, 이 책이 이태원 헌책방으로 굴러 오게 된 것도 우연이었고, 맥도널드 햄버거의 새로운 광고기획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기획c 부팀장 김경주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도 전적으로 우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우연이 빚어낸 우주의 모습은 참으로 시적이다. 비록 시가 대형 패스트푸드 프렌차이즈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는 모습이 한편으로 애처롭기도 하지만, 결국 정크푸드 회사는 이를 계기로 친환경·친인간적 기업으로 거듭하게 된다. 하여간, 시가 세상을 바꾸긴 한 것이다.

비록 우연으로 점철되긴 했지만, ‘미시적 사건의 연속’이야 말로 ‘역사적 필연’이라고 누군가 주장할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시가 세상을 바꾸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들, 그걸 꿈꾸는 것 조차 불가능할까. 조현은 이른바 ‘시적 상상력’으로 시가 세상을 바꾼 평행 우주를 그린다. 한편으로 애처롭지만, 또 한편으로 경이롭다. 우연이 낳은 우연은 필연이 되고, 그 시점에서 기형(畸形)의 음식인 햄버거는 오히려 모든 사물의 역사를 대변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의 역사를.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아무래도 인간에게 세계는 사랑의 기억에 대한 애틋한 연민이나 가족에 대한 이해심, 혹은 시적 상상력과 진보에 대한 점진적인 확신이 적절하게 버무려지면서 조금씩 사랑스러워지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우주도 있을 터이지만 말이다.

소설이 그렸던 그 모든 필연적 우연과 만유하는 시적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 일장춘몽이고, 불가능함이라니! 그러나 조현 작가는 ‘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단정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 깊이 시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우연의 우연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다만 이 우주에선 아직 시적 필연이 될만한 애틋한 삶의 ‘얼룩’들이 부족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려거든, 시인이 되던가 아니면 사랑하던가. 어쩌면 난해할지도 모르는 그의 사유 속에 깃든 메시지는 이 한가지일 지도 모른다. 하여간, 사랑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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