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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대중운동이 지금처럼 산발적이고, 또 그 여파가 치명적인 시기는 없었다. 물론 여기서 대중운동이 반드시 거리의 가두행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의 대중운동은 훨씬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방식, 말하자면 인터넷 공간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여론 형성은 주류 언론의 그것을 뛰어넘기 일 수다. 과거의 카페와 광장이 대중운동에 기여했던 역할을 인터넷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 의한 대중운동의 진정한 대중화에도 장단이 있다. 접근이 쉬워지고 소통이 활발해진 만큼, 각자의 입장에 더 잘 몰입하게 됐다. 그리고 과몰입은 무비판적인 맹신을 낳기 마련이다. ‘황우석 사태’는 대중운동의 맹신이 낳은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전문가와 언론이 제시하는 의문에 대항해 오히려 황우석의 편을 들었다. 그의 사기행위가 낱낱이 밝혀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황우석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황우석 사태에서 보인 대중의 맹신은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떤 집단적인 최면이 그들로 하여금 황우석을 맹신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미국의 부두 노동자였던 에릭 호퍼는 ‘종교운동이 되었건 사회혁명이 되었건 민족운동이 되었건 모든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중운동이 파급되는 과정에 비슷한 심리유형의 사람들이 대중운동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이다. 에릭 호퍼는 이들 맹신자들의 유형을 살펴보고 그들의 심리 상태를 파악했다. 가난한 사람, 부적응자, 이기적인 사람, 야심가, 소수자, 권태에 빠진 사람, 죄인. 에릭 호퍼는 이들을 맹신자들의 유형으로 손꼽았다.
에릭 호퍼의 이 책은 대중의 비정상적인 심리상태에 기반한 전체주의를,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파악하려 했던 한나 아렌트나 에리히 프롬과는 크게 다르다.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이 유발되는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밝히는 대신,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맹신하는 심리 상태를 파악하려 했다. 그는 맹신자들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들이 기꺼이 대중운동에 목숨을 바치며 뛰어드는 것은 대중운동 속에서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해소할 희망을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호퍼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맹신자들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희망을 꿈꾸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운동에 대한 에릭 호퍼의 생각이 완전히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 책은 엄밀한 태도로 논리를 전개하는 사회학 책이 아니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이라는 부제처럼, 『맹신자들』은 논리가 아닌 단상으로 대중운동의 실체 파고든다. 어떤 부분에선 획기적이지만 또 어떤 부분에선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호퍼가 자신의 이론 속에서 대중운동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를 (은영 중에) 회피하기 때문에, 대중운동에 대해 그가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그는 대중운동이 지닌 변혁의 역동성을 오히려 긍정하는 여지를 보인다. 노골적인 무신론이 종교에 대한 무관심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한 치혼 주교의 말을 빌려서 말이다.
우리는 에릭 호퍼가 이 책을 썼던 1940년대보다 훨씬 더 대중운동과 밀접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한동안 우리나라의 정치계를 뒤흔들었던 ‘안철수 현상’도 어느 정도 안철수 개인에 대한 우리의 맹신이 한몫했음을 고백하자. 우리는 대중운동의 맹신자가 아니라 비판적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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