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인가,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교 뒤 밭길을 걸어 걸어가 얕은 언덕을 넘어 친구의 집으로 가곤 했다. 금호동 산꼭대기 낮은 집들이 오손도손 앉아 있던, 담요나 이불들이 볕 좋은 날 널려있던 그 동네가 왠지 참 이유없이 좋았다. 우리 집이 있던 을지로 6가와는 달랐던 정서가 있어서였을까.
친구네 집으로 가면 우리는 그녀의 대학생 언니와 오빠들의 방에 들어가 턴테이블에 패티김의 LP판이나 돈 맥클린의 '빈센트',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림잉'들을 들었고 때론 장독대의 포도주를 국자로 떠가지고 와 마시고 그 방의 책들을 꺼내 읽으며 둘 만의 재미있고 오붓한 시간을 즐겼었다. 그러던 어느날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을 한 권 꺼내 읽었는데, 무엇인지 몰라도 빛처럼 그 시들이 내 마음으로 들어 왔다. 시인 고은의 詩集. 친구에게 부탁해 그 시집을 빌려온 그 날부터 나의 첫 시인은 高銀이 되었다. 본명 고은태(高銀泰), 법명 일초(一超) 환속시인. 불분명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아이에게 그의 시들은 하나의 출구였을까, 하나의 도피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우주(宇宙)였을까. 그 이후 내 노트에는 그 황홀하고도 탐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시들로 가득하였다. ' 폐결핵' ' 천은사운(泉隱寺韻)' ' 해연풍(海軟風)' ''내 아내의 농업(農業)' '애마(愛馬) 한쓰와 함께' '저문 별도원(別刀原)에서' '저녁 숲길에서' '예감(豫感)'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삶' '봄밤의 말씀' 等等. 그리고 또 한 쪽에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敵)'이 자리잡고.
우리는 그때부터 고은이란 시인의 추종자가 되어 장편소설 '어린 나그네'를 시작으로 산문집 '환멸을 위하여'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등을 종로서적으로 나가 사 모으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때인가는 역시 시험이 끝나면 588번 버스를 타고 시인이 살던 화곡동의 집을 찾아가 목련꽃이 만발하던 시인의 담장 밖을 맴돌다 가쁜 숨을 내쉬며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대학생이 되어선 그 친구가 유학을 떠나 우리의 시인원정기는 끝났다. 그리고 1991년 장편소설 '화엄경'과 세월이 또 지나 시집 '어느 바람'을 지나 2001년 '순간의 꽃'과 '만인보'가 아직 내 책장에 꽂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젠, '순간의 꽃' 속에 들어 있는 '그 꽃' 을 끄덕이는 나이가 되었다.
돌아보니 시인 고은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각인시켜 준 분이었고, 때묻고 어리숙한 아직도 사는 일의 정답을 잘 모르는 한 사람의 기나긴 시간을 함께 한 시인이었다.
이제 고은 시인은 '마치 잔칫날처럼' 내 곁에 다시 오신다. 잔칫날이란 모두가 어우러져 흥겹게 삶을 누리는 날이 아닌가. 우리에게 산맥이 되고 젖줄이 되신 시인께 아련한 날의 기억을 더듬어 감사드린다. '밤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새 세상이 되가는구나.' (詩, '패러수트' 에서)
과육(果肉)
1
마침내 빈 말수레들이 돌아간다
빈 수레라 해도
거기에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실려 있다
이상한 노릇이다 과일이 벌써 익었다
그 캄캄한 살이 싱싱하게 아프리라
저 남쪽에서 소묘(素描)한 반원(半圓)이 겹겹이 사라진다
내 둘레에서 방금 사용한 단어(單語)들이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일손을 놓은 처녀의 은(銀)방울도 떨어진다
그녀의 입술은 또다시 위아래가 해후(邂逅)처럼 닫히리라
2
벗이 왔다 둘이 올 것을 하나는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을 여기까지 떠올 까닭은 없다
여기는 벗 하나로도 충분하다
과일이 절로 떨어진다
그것이 감인지 사과인지 모른다
그렇다 마지막에 추상(抽象) 감탄사(感歎詞)로 길이 끝
난다
벗이여 더 고백(告白)하지 말아라
너무 많은 진실은 허황하구나
저녁 햇빛에 고백이 모여 고백을 태운다
이제부터 나는 벗에게 과수원으로 인도한다
가을이 떠나간다
과일로 꽉 찬 과수원은 빈 과수원의 과거이다
과일 속의 살의 무지(無知)에 다다르고 싶다
그 삶의 암흑! 충실! 그리고 그 살 속의 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