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작지 않은 마을 하나를 상대로 사기 치고 도망갔다는 수프 남자 이야기를. 하지만 그 떠돌이가 실은 오래전 그 마을에서 이 집 저 집 오래도록 돌아가며 노역을 해 주고 임금을 받지 못한 자였으며

변복하고 나타나 보복을 한 거라는 속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 그럼에도 그를 사기꾼으로 알던 너나 네 가족 모두, 따지고 보면 착각에 빠진 황제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소녀는 몰랐던, 그보다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진실을 이제와서 알려 주는 남자가 하나도 고맙지 않을뿐더러, 어찌어찌 살아남은 마을 이웃도 아닌 외부인인 듯한 남자가 왜 떠나지 않고 자기 옆을 맴도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설마 당신이 수프 남자냐고 묻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대로 우리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요? 누구네 집에든 으례 생기는 억울한 일이 이번에는 우리 집에 왔을 뿐이라고 체념하면 되나요? 하지만 온

 

 

마을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경우가 또 좀 다르잖아요. 우리는 시신을 묻은 게 죄라고 치고 마을 사람들은, 소 말 닭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남자는 쇠스랑을 땅에 집고 몸을 일으킨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서로 목적은 다를테지만."

 그가 돌아서서 소녀에게 내미는 한 손은 거칠고 못이 박인 데다 피 냄새가 난다. 소녀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마도 너와 네 가족에겐 잘못이 없을 거다. 잘못이라면 하나, 뽑은 순무를 굳이 갖다 바치려던 것이지. 바란 것 달리 없다 하지만 실은 세금의 일부라도 어떻게 해 볼 요량으로 말이야. 어째서 우리는 좋은 것, 큰 것,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을 마땅히 황제에게 갖다 바치는 법이라고 인식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 적 없어? 애당초 황제가 저 반도까지 뻗어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전쟁 따위 없었다면 다른 세상에서 그런 귀신들이 몰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근본적인 문제를 찾기보단 어차피 내야 할 세금 이걸로라도 때우자 싶었던 생각이 안일했을 뿐이고, 그 안일한 의도와 그걸 수용하는 자의 아량에 차이가 있었던 거겠지."

 그저 기진한 상대를 일으켜 주려는 뜻 외에 다른 의도는

 

 

없을테지만, 소녀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공을 튕겨보내듯 바라보기만 한다. 상실감으로 온몸에 금이 간 이에게 어디서부터 올이 풀렸는지를 충고하는 일은 부질없다.

 "그러고 앉아 있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시간은 꺾이지도 역류하지도 않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도모해야 할 것은 등뒤가 아닌 눈앞에 있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곳에는 각자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 무언가란 대개 땅이거나 그 땅에서 난 작물, 그 땅에서 기르던 동물들, 또는 그 땅에 붙어살던 가족이라 한다. 조상 대대로 자신들이 일구어 씨를 뿌리고 거두면서도 남의 것임이 당연했던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을, 각자 다른 이유로 잃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보습을 갈고 있다 한다. 그들은 머지않아 맥박의 움직임에 귀 기울일 테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일어날 것이다. 이 마을에서 무사히 살아 나간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주로 어린이와 젊은이들인데- 세금 도둑들의 삶터에도 똑같이 불을 놓겠다는 결심으로 혼절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라 하며, 그는 몇몇 일행과 함께 마을에 아직 쓸 만한 식량이나 물건이 남은 게 있는지를 찾으러 왔다가 예상보다 심각한 마을의 상태를 보고 원래 목적을 접어 둔 채 곳곳에 굴러다

 

 

니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한다.

 소녀는 미소한 간지러움에서 시작하여 금방이라도 살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은 근육의 움직임을 느낀다. 분노인지 희망인지 모를 그것은, 동생을 버린 것을 자각한 뒤 처음으로 꿈틀거리는 감각이다. 소녀는 오래지 않아 내부에서 외부로 솟아오르는 파열음을 듣게 될 것이다. 비로소 소녀는 눈앞의 남자와 그의 손이 실제임을 믿는다. 팔을 뻗어 그것을 잡자 거칠고 난폭한 현실이 손안에 뿌듯하게 만져진다. 소녀는 그리로 다가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의 일행인 듯한 여러 사람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부터 가야 할 곳, 보습을 대기 위한 준비를 할 곳으로 빠르게 걷는 소녀의 찢어진 치맛자락 뒤에 한 조각의 뼈가 붙어 떨어질 듯 말 듯 달랑거리지만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P.120~123 ) /  [카이사르의 순무].

 

 

 

 

             -구병모 소설, <빨간구두당>-에서

 

 

 

       쫀득한 서사와 조용하지만 깊은 사유, 그리고 세련된 판타지소설을 읽는...지금 이 시  

       간들이 꽉차게 좋은, 9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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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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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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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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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8: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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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4: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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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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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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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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