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 듯 말 듯 내리는 비부터 시작해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내리는 비도 있잖아요? 비의 세기에 따라 붙인 이름들은,"

 아이들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은 칠판에 비의 이름들을 쓰기 시작했다.

 "우선 안개비, 아주 가는 비예요. 안개비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

 

보다 조금 가는 비를 는개라고 해요. 그럼 는개 다음은 이슬비겠죠? 이슬비는 보슬비라고도 불러요."

 이슬비 옆에 괄호를 치고 보슬비라고 쓴 다음, 선생님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하품을 하다가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쳐서 괜히 눈을 비볐다.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는 억수라고 해요. '억수로 나쁘다, 억수로 좋다', 그런 말들 들어본 적 있어요?"

 몇몇 아이들이 짝꿍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억수처럼 눈물이 솟구친다, 그런 표현도 있어요. 세차게 내리는 비처럼 울고 있는 거지요. 더욱 굵은 빗발이 끝없이 내리는 것을 장대비라고 해요. 장대는 나무로 만든 긴 막대기니까. 빗줄기가 막대기만큼이나 굵다는 거죠. 그러면,"

 선생님은 막대기를 상상하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막대기 때문인지, 하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계절에 따라 부르는 비의 이름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예를 들어 봄에 오는 비는?"

 "봄비?"

 정답이 이렇게 쉬울 리는 없는데, 하고 머뭇거리는 대답이 어디선가 흘러 나왔다.

 "맞았어요."

 

 

 선생님이 활짝 웃었다.

 "그럼 가을에 내리는 비는?"

 "가을비!"

 "밤에 내리는 비는?"

 "밤비!"

 "그래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낮비라는 말은 없어요. 왜 없는지는 선생님도 잘 모르겠는데,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볼래요?"

 그리고 선생님은 지금 내리는 비를 '봄장마'라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봄철에 오는 장마다. 제철이 지난 뒤에 오는 장마는 '늦장마', 초가을에 쏟아지다 개고, 개었다가 다시 내리는 비는 '건들장마'라고 부른단다.

 "건들건들 내리는 거예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와아아 하고 웃었다.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퍼붓는 장마는 그럼 뭐라고 할까요? 우리가 아까 배운 말이에요."

 아이들은 열심히 칠판에 쓰인 단어들을 살폈다.

 "억수장마?"

 누군가의 자신없는 대답에, 선생님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이외에도 비는 많은 이름을 갖고 있어요. 여우비, 소나기, 단비,

 

 

 약비, 웃비, 먼지잼이나 개부심 같은 어려운 이름도 있고, 칠석물처럼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름도 있어요."

 전설이라는 단어에 아이들이 반응했다. 이건 뭔가 옛날이야기 같은 거다.

 "칠월 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이에요. 그날 오는 비는, 두 사람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해서 칠석물이라고 불러요."

 갑자기 말똥말똥해진 아이들의 눈망울이 선생님을 이겼다. 결국 나머지 수업시간 동안, 선생님은 우리에게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세어보았다. 그냥 비가 아니라 봄장마다. 오전까지는 억수비가 내렸는데, 지금은 이슬비다. 이슬비, 괄호 열고 보슬비, 괄호 닫고. 이름을 붙여주니 다정해진다. 그러고 보니 외할머니는 '비가 온다'라 하지 않고 '비가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봄장마 님, 이슬비로 오시는 봄장마 님,하고 비의 이름을 부르며 걷다가, 보아뱀에게 얼른 알려주고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차박차박, 장화 아래로 빗방울들이 몸을 뒤척여 자리를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P.125~128 )

 

 

 

 

 

 질문을 하면, 자신의 멍청함을 들킬 거라고 생각한다. 멍청하게 보이면 손해니까 그건 안 될 일이라고 장화 신은 고양이의 계획이 성공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있잖아,"

 보아뱀의 말을 곰곰이 더듬으며 내가 말했다.

 "그 마법사가 마음에 걸려.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쁜 마법사였을까? 책에는 그런 이야기는 안 나와. 만약 그랬다면 고양이가 꾀를 내서 마법사를 처치하는 걸 수도 있잖아. 마법사가 부려먹는 사람들도 행복해졌을 테고."

 "설사 그랬다 해도 고양이한테는 그런 의도가 없었어. 고양이는 정의나 도덕의 가치관으로 움직인 게 아니야. 사람들이 마법사의 손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행복해진다는 보장도 없고 어쩌면 사정이 더 나빠질 수도 있지. 고양이는 사람들의 행복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어. 그렇다면 주인을 위해 그런 일을 한 걸까?"

 보아뱀은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기를 죽여 장갑을 만들 생각부터 했던 사람을 좋아했을 리가 없잖아."

 "바로 그거야. 마지막에 고양이는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지. 고양이 신분으로 왕은 될 수 없지만, 고양이로서는 최고의 권력을 잡은 거야. 어떻게 보면 막내아들은 이용을 당한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막내아들도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어. 아버지한테 방앗간을 물려받은 큰형과 나귀를 물려받은 둘째형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잖아. 막내아들의 가치관은 그런 거였어. 고양이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끼리끼리 만난 거지. 서로의 이익이 맞았던 거야."

 "그럼 백작에다 부자라는 이유로 막내아들을 인정한 왕도, 젊고 잘 생기고 돈도 많다는 이유로 그 남자랑 결혼한 공주도, 다 끼리끼리인 거겠네? 왜 그런 사람끼리 뭉쳐서 잘 되고 마는거야?"

 보아뱀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강물처럼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이야. 세상이 왜 그지경인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별 다를 게 없지. 그러니까,"

 보아뱀은 말을 멈추고 한동안 내 눈을 가만이 바라보았다.

 

 

 "너는 항상 질문을 해야 해. 어른이 되어서도 말이야. 질문을 하는 건, 절대로 창피한 게 아니야. 제대로 된 질문은 대답보다 힘이 세니까."

 그나저나 비가 끈질기게도 오시네, 보아뱀은 혼잣말을 하며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라, 보아뱀도 비가 오신다고 표현하는구나. 나는 조금 놀라고 기뻐서 히히, 웃고 백과사전을 펼쳤다. 선생님이 어렵다고 했던 비의 이름들을 찾아볼 작정이었다. 어째서 밤비란 말은 있고 낮비란 말은 없는 건지, 비는 왜 그렇게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나는 어떻게 자라 누구와 끼리끼리가 되어 어느 마음에 무슨 이름의 비로 내릴 건지, 어린 마음의 질문들이 빗방울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P.134~136 )/  아홉 번째 이야기. 장화 신은 고양이

 

 

 

 

                                                                -황경신 연작소설 <한입 코끼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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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17: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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