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모여 세월이 되고, 작은 일들이 이어지고 쌓이면서 삶이 되고 인생이 된다. 소천하신 김수환 추기경님 농담처럼, 삶이란 삶은 달걀이지, 삶이라는 글자를 풀면 사람이 되지, 사람이란 살아가는 존재이지, 사람들이 사는 건 다 삶이지. 이런 가소롭고 시답잖은 글을 쓰는 나는, 가소롭고 시답잖은 시도에 대해 고백함으로써, 혹시 나처럼 가소롭고 시답잖게 살았다고 아파할 분들과 공감하고 싶다. 창밖 눈바람 속 앙상한 푸나무들이 열매 없이 살았어도 무의미하게 살았던 게 아니라고 우기면서. (P.19 )

 

 

 노장 피카소의 전시회를 본 한 기자가 "애들 낙서"같다고 남긴 촌평에 "그렇다 아이가 되는데 80년이 걸렸다."고 했다는 그의 재치가 떠올라, 종일 옛동요를 웅얼거리는 날도 있다. (P.54 )

 

 

  나는 지금도 밤이 좋다. 검은 어둠은 밝음으로 핏발 선 눈을 편안하게 해준다. 모든 색깔을 다 받아주어서 검정이다. 그 누구의 어떤 잘잘못도 다 받아주어서 검정이다. 모든 때와 얼룩을 다 받아주면서, 저 스스로 검정으로 바뀔지언정, 비난이나 비판, 평가하거나 비웃고 탓하기를 거부하면서, 뱉어내거나 배척하지 않는 어둠, 그래서 밤의 검은색은 모성이자 신성 같다.

 열정 넘치는 무한경쟁도 때로는 있어야 하지만, 검정의 어둠같이 그 어떤 실수나 실패, 잘못도 포용해주는 잊음과 용서의 밤夜같은 면도 갖춰야 하리라.  ( P.54~55 )

 

 

 추위를 몹시 타서, 겨울은 늘 힘들면서도 이상하게도 좋았지. 왠지 덤으로 받는 휴가처럼, 즐기는 일생 속에서 얻는 휴가나 여유, 유예처럼 느껴지곤 했지. 쉬어가며 살라는, 쉬면서 생각해도 된다는, 안 늦는다는, 그래야 제대로 된다는, 처음으로 돌아가 곰곰 생각하며 살펴보라는, 아무런 조건 없이 얻는 휴가가 겨울인 것만 같지. 우리 민속에도 겨울은 밤과, 비오는 날과 함께 삼여三餘 중에서도 가장 긴 여유였다지. 그래서 바쁘게 사는 이들에게 덕담으로 '잉어 세 마리'를 그린 그림을 선물하는 풍속이 있었으니, 겨울을 공짜 휴가로 느낀 것이 우리 민속의 맥락과도 통했던 게 아닐까. 잉어라는 물고기의 발음이 중국말의 '여유'의 발음과 비슷해서라는 것은 한참 후에 알았지만, 다른 물고기들과는 다르게 잉어의 우아한 기품이나 품위가 상징하는 바도 여유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라지.

 나는 잠자기를 좋아하고 게을러서 그런지, 밤이 대낮보다 더 좋고, 밝고 맑아서 눈이 부시고 어지럼증이 이는 갠 날 보다는, 시선이 아래로 휘어지고 살갗이 촉촉해지는 비 오는 날이 더 좋고, 겉치레나 바깥으로 확산되기에 바쁜 듯한 봄 여름 가을에는 정신도 산만해지고 헷갈리곤 하여, 한갓지고 호젓한 실내생활을 하는 겨울이 더 좋아졌지. (P. 62~63 )

 

 

 슬리퍼를 끌고 나가서 동네 한 바퀴를 휙 돌다가, 문득 서점이 눈에 들어오면, 동네를 읽고 책을 읽는 이중 즐거움을 누린다. 30년을 한 동네에 눌러 살면서 늘 같은 동네 길을 걷는 것인데도 왜 그런지 늘 좋다. 며칠 사이 헌 주택이 사라지고 새 건물이 고층으로 들어서고 있는데 상가 모양새를 하고 있다. 사유지인지 공유지인지 모를 자리에는 잡풀이 우거져 철마다 시골을 느끼게 하고, 무허가 건물들 옆의 감나무의 감도 붉었고, 텃밭에서 자라는 제철 푸성귀를 보면 쌈밥이 먹고 싶어지기도 하고, 무허가 건물들이 연출하는 짙은 삶의 냄새가 아파오기도 한다. 나물 캐던 어린 시절의 바로 그 나물들이 연두 울타리 너머에서 잘도 자라서 한참 서서 보곤 한다.

 그리고 언제나 마지막 코스로 큰 길로 나가면,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동네 서점이 눈길을 끈다. 들어가 서가를 훑어보다가 생각나는 책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렇게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게 서로 편해서 좋다. 주문한 책이 도착하면 전화해줘서 고맙고 편하다.

 이번에는 전화도 못 받았지만, 주문한 책이 왔느냐고 물어보니 마침 왔다고 해서 [램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를 사 들고 오다가, 개점 이래 한번도 들르지 못한 커피집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 잔 주문한다. 나이 들고 홀로 되고 가난해지면서, 세상과 인생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는지, 렘브란트는 신구약 성경의 사건들을 많이 그렸단다. 성경 공부와 그림 공부와 한 예술가의 삶이 한꺼번에 읽히고, 거기에 나 자신의 인생과 예술까지 포개어지기도 한다. 이유 없이 목이 메고, 눈쿨겨워지기도 한다. 특별한 취미나 특기도 없이 살아와서, 책밖에는 동무 되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사람보다 책이 더 좋다. (P. 124~125 )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서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한 손은 크고 굵은 손가락의 남자 손이고, 다른 한 손은 여자의 자그마한 손이다. 그것은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하느님의 자애를 절묘하게 그린 걸작이다. 우리 엄마도 늘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P.206 )

 

 

                                                         / 유안진 산문집, <상처는 꽃으로>에서

 

 

 

 

 

 

 

 

 

        책을 보내야 함으로,

        마음에 들어 왔던 문장들을 노트에 메모 대신

        이 공간에 빠르게 자판으로 적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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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9 1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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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9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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