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안에서 살던 천년의 세월 동안 내 이름은 평화였다.엄마가 평화야, 라고 부르면 바다가 출렁이고 하늘이 춤췄다. 나는 온몸으로 내 이름을 느꼈다. 평화는 눈과 귀를 통하지 않고도 세상을 이해했다. 평화는 동물과, 꽃과, 별과, 바람과도 대화했지만 사람과는 아무것도 나눌 수 없었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는 척만 할 뿐 그것을 진정으로 갈구하지 않았다. 나는 알았다.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순간 갈기갈기 찢겨질 나를. 갈기갈기 찢은 후 다시 온전한 나를 갈구할 그들의 기만을. 나는 그안의 평화로만 남고 싶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파괴당하고 싶지 않았으며, 돌이킬 수 없는 그들의 욕망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내 이름은 평화였다.

 오직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평화를 나는 그 안에서 다 이해했다. (P.106~107)

 

 

 

 내가 진짜엄마를 찾는 이유는 진짜엄마가 그리워서도, 진짜엄마가 필요해서도 아니다. 가짜를 가짜라고 확신하기 위해서, 이유는 그뿐이다. 진짜를 찾아내야 가짜를 가짜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세상이 온통 가짜뿐이라면, 가짜가 가짜임을 증명할 수가 없지 않나. 가짜가 진짜인 척해도 뭐라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꼭 진짜를 찾아내야 한다. 찾아내서 진짜인 척하는 가짜들을 진짜 가짜로 만들어 버릴 테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세상에 진짜란 게 하나도 없다면, 그러니까 온통 가짜뿐이라면 어쩌지? 그럼 세상에 진짜는 오직 나뿐인가? 정말 그럴 수도 있을까? 나는 진짜가 맞나? 내가 진짜임은 누가 확인해주지? 내가 진짜를 찾아 헤매듯, 세상의 어떤 진짜는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꼭 진짜를 찾아야 한다. 내가 진짜임을 학인하기 위해서라도.(P.111~112)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숨 쉬던 우주는 온통 까매서, 가끔 그 어둠에 치를 떨기도 했다. 시간도 공간도 내 안의 모든 감각도 소용없던 그때, 막막한 어둠에 짓눌려 구해달라고, 그 무엇도 흉내내지 못할 간절함을 품기도 했지만 나를 구할 것 또한 어둠뿐이었다. 암흑의 본질은 고독이었다. 나는 모든 구멍을 열고 내게 스미는 암흑을 응시하고 응시했다. 응시하는 그 곳에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기시감 같은 반짝임, 반짝이는 나를 보는 것 또한 나와 암흑뿐이었다.

 내 앞에 나타난 나는 지나치게 흔한 세계.

 그것만이 전부였던 그 시절.

 나는 반짝이는 나를 봤다. 내 불행의 시발점. 모든 행복의 이면.((P.161~162)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밤

  뜬눈으로 지새워도 밤

  천을 천 번씩 세는 내내 밤이다가

  아주 잠깐씩 환해질때가 있었어.

 

  그때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P.223)

 

 

  진짜엄마란 대체 뭐지? 나는 왜 그것을 찾지? 거리를 헤매며 많은 사람을 보면 볼수록, 나는 그 이유를 서서히 잃어갔다. 알맹이 없는 목적을 품고 걷는 길은 고되고 무의미했지만, 나는 끝없이 걸었다. 누군가가 너는 왜 이 거리를 떠돌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지금까지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P,243)

 

 

 나의 진짜엄마는.

 거리를 떠돌며 내가 정했던 진짜엄마의 조건은 모두 껍데기고 포장이며 환상이고 거짓말이다. 나의 진짜엄마는 어떤 얼굴이라도 가질 수 있으며 그래서 결국, 어떤 얼굴이라도 상관없는 그런 사람이다. 맞는 대신 때리는 자이고 때리는 게 번거로우면 죽여 없앨 수도 있다. 그 모든게 귀찮을땐 외면한다. 상관없는 척한다. 그 뿐이다. 오직 중요한 건 자신의 생존이다. 불행이나 행복 따위엔 관심도 없다. 이제야 알겠다. 그런 사람을 찾기는 너무나 쉽고, 너무 쉽기 때문에 나는 여태 못 찾고 있었다. 너무 흔하니까, 어디에나 있으니까.

 거울을 보면 그 속에도 있다. (P.274)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손바닥만 한 사진이 있었다. 그 속엔 젊은 아빠 엄마가 있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엄마는 아빠의 팔짱을 끼고 천사처럼 웃는다. 아빠의 얼굴엔 부끄러움과 만족감이 사이좋게 내려앉았다. 맑고 밝고 향기로운 봄날, 그 속엔 나도 있다. 엄마 배 속에서 작은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입을 하나로 모은 나.  평화야, 엄마가 배에 손을 얹고 나를 부른다.

 찰칵,

 카메라도 나도 사이좋게 윙크.

 

 그속에서나는 평화였다. (P. 295)

 

 

  천년의 세월 중 내가 들었던 가장 달콤한 말은,

  사랑하는 우리 아가.

  내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엄마의 자그맣고 부지런한 심장.

  가장 황홀했던 건,

  아빠가 엄마 안에 들어와 우리 셋이 완전한 하나가 되던 느낌.

  그 안에서 짐작했던 최고의 행복은,

  당신이 나를 안고

  내 눈을 보며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순간. (P.296)

 

 

                                     

              / 최진영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한겨레출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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