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오늘날은 길의 시대다. 사통팔달로 새 길이 뚫리건만, 아직도 길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교통방송이라는 것이 생길 만큼 길은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지만, 아쉽게도 그 방송에서 다루는 소식은 '어디어디가 잘 뚫린다'가 아니라 '어디어디가 많이 막힌다'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다. 운수업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반 월급쟁이도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도인(道人)이다. 하루중에 많은 시간을 '길위에 서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본래 길이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생살이를 길 가는 행인에 자주 비유해왔고 또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가사도 있지만, 실은 '길을 가는 사람'은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이었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농경민족이던 조상들에게 일반적인 삶의 패턴은 고향 땅에서 나서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을을 스쳐 지나가는 방물장사나 보부상들은 깃들일 곳이 없어 피치 못해 움직이는 사람들. 즉 처지가 곤란한 사함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눈길이 밴 표현이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것이지, 결코 길 떠나는 삶을 좋게 본 것은 아니었다.

 보기 드물게 길 걷는 사람과 그 길을 아름답게 묘사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도 "이번 걸음만 끝나면 어디에 정착하리라"는 소망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우리네 길 떠난 사람은 언제나 고향(정착)에 대한 그리움을 한(恨)처럼 품고 살았다. 더욱이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겪으면서 고향의 상실은 더더욱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표현되었다. <고향무정> <강촌에 살리라> 등등의 노래제목들이 다 그런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신작로이며 철도와 같이 새로 난 길은 다 남(일본인)의 손에 의해 뚫렸기에, 길이란 바깥의 가치를 안에 강요하는 위협의 통로로 여겨졌다. 그러니 길은 더더욱 불안과 두려움의 촉수일 수밖에 없었고, 길가에는 매양 우리네 눈물자국이 아롱져 있었던 것이다. 정든 곳(사람)과의 이별,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불안한 첫걸음이 동네 어귀의 길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제 길은 더이상 목메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정착하는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랑하는 유목민족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한 두해 어느 아파트에 정착해 살다가도 문득 캥거루 모양이 그려진 이삿짐 트럭에 여행가방 싸듯 짐을 꾸려 떠난다. 보내는 이들은 다시 못 만날까 염려하지 않으며, 떠나는 이들도 결코 눈물짓지 않는다. 핸드폰, 이메일과 같은 다양한 만남의 길이 곁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누구도 이곳을 뿌리내릴 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둥둥 떠다니는 존재가, 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방물장사가 된것이다.

 '길위에 서 있는 존재'인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길이란 자연히 삶의 의미를 헤아리게 만드는 계기이기에. 동양에서는 길(道)을 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삼아왔던 것이리라. 이를테면 노자의 "길을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 길이 아니다"([도덕경])라는 말이 그러하고, 공자의 "사람이 길을 넓히는 것이지, 어찌 길이 사람을 넓힐 수 있으랴"([논어])라는 말이 그러하다.

 길이란 이렇게 걸어가는 통로이면서 또 사람의 인생길이라는 뜻도 가진다. 길을 넓히면 광장이 될 것이고, 길을 좁히면 외줄이 될 것이다. 외줄타기야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광장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탁 트인 저 하늘과 바다에도 길이 따로 있어서 비행기나 배가 제 마음대로 다니지 않듯, 광장도 제 마음대로 달리다가는 남과 부딪히기 마련이다. 인생길을 넓은 광장 내달리듯 가는 사람도 있는 듯하지만, 그러나 또 우리는 많이 보아왔던 터다. 그러다가는 머지않아 사고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이처럼 사람의 인생길은 아무 데나 함부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생길이야말로 그 어는 길보다 좁고 험한 길이다. 그런 점에서 조상들이 삶을 외줄타기에 비유한 것은 아주 건강한 처방으로 여겨진다. 아니 "새하얀 작둣날 위에 설 수는 있어도, 중용의 길에 서기는 어렵다"([중용])고 하였으니, 사람다운 삶의 길의 길을 외줄은 커녕 칼날보다 더 좁은 길로 여겼던 셈이다. 이럴진대 어찌 삶의 길을 술 취한 사람의 걸음처럼 방만하게 휘청거리며 걸어갈 수 있겠는가.

 해발 일 미터 위로 난 평평한 이 길은, 세상에서 제일 깊은 저 마리아나 해구로부터는 일만일천 미터 위의 고지(高地)에 난 길이며, 에베레스트 산으로부터는 팔천팔백 미터 아래의 심연(深淵)에 난 길이다. 터질 듯한 가벼움과 찌부라질 듯한 무거움이 엉킨 해발 일 미터에서 걷는 걸음이여!  억누르는 기압과 떠올리는 부력을 이기며 걷는 이 역설의 걸음걸음이여! 그렇다면 우리는 가끔 함부로 걸어가는 이 '일상'의 길이 결코 '평상'하지 않은, 무섭도록 '비상'한 길임을 깨달아야 할 일이다. 그런 각성에서야 사람의 인생길이란 것이 정녕 새하얀 작둣날보다 더 좁은 길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리라. (p.92~95)           

                                

 

     -배병삼,<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에서.

 

 

/ 제3부 고전의 주변 

 

  .새 세기, 글쓰기(P.254~263)

 

 .고전 읽기(P.264~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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