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살을 반성함




1

 스물다섯살, 카피라이터 일할 때 농약 광고 많이 만들었

지. 아직도 잊히지 않는 상표....고올, 키타진..... 배추 한

포기 키워보지 못한 사람이 흰소리를 막 했다네. 잡초와 해

충을 말끔히 없애 준다고, 일등품 수확을 약속한다고. '밝아

오는 농어촌' 그런 프로에 날마다 광고를 했네. 박수를 받았

네, 카피 잘 쓴다고.



2

농부들 곧이듣고 콩밭에 파밭에 마늘밭에 고추밭에

배밭에 사과밭에..... 흘리지 말고 먹어라

흠씬 뿜고 뿌리고 듬뿍 쏟고 부으며

풍년을 그렸을 거야



이 나라 순박한 흙과 나무들, 순순히

들이켜고 마셨겠지, 풀도 나무도

저 죽는 약이란 걸 알면서도

가만히 머금고 삼켰겠지

농사가 딱해서

농부가 가여워서



"우리에게 약 먹인 자가 저기 간다"

저무는 국도 변 저수지 둑길

늙은 전답, 검버섯 들판이

목덜미를 잡네



여전히 농약병 구르고 검은 비닐 날리는

농수로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나, 참회의 문장을 

땅에다 묻네



용서하십시오, 죽는 약인 줄 몰랐습니다

나도 죽는 줄 몰랐습니다   (P.18)





시민 김창수씨





김연수 명창은 판소리 한바탕의 끝을 으레 이렇게 맺었다



"고수(鼓手) 팔도 아플 것이오.

김연수 목도 아플 지경이니

어질더질"*



남산 공원 백범 동상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누가 날 좀 지상으로 내려다오

나를 올려다 보는 사람들 목도 아플 것이오,

김구 팔도 아플 지경이니"



평생 누구도 내려다본 일 없는 시민 김창수씨를

높다란 돌 받침 위에 외로이 올려 세운 것은

잘못한 일이다

허공중에 한 팔을 치켜들고 있게 한 것은

송구한 일이다



서울 시민 김창수씨는

해방 조국의 공원

긴 의자에 앉아

뺑덕어미나 곽씨 부인이 건네는 인절미를 먹으며

소풍 나온 향단이 이야기를 듣거나

남대문 시장 계단참에서

딴 사람이 된 흥부의 형과

은퇴하여 시민으로 돌아온 변학도씨와

담배 한대 나누어 피기를

소망했다      (P.30 )






트럭을 타고 온 사람





1

그해 오월 광주 사진에는 부처님 오신 날

광고탑과 현수막이 보인다


오셨을까? 안 오셨을까?


의견은 둘로 갈릴 것이다

- 오셨다면 그 난리가 났겠어요?

- 오셨어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2

사실은 이렇다, 그분은 다녀가셨다



황금 가사는 무등산 깊숙이 숨겨두고

서둘러 변복을 하고

머리띠를 두르고 총을 잡았다

당신이 본 사진 속

그 사람이다


웃통을 벗어부치고 깃발을 흔들었다

피 묻은 청년을 들쳐 업고 내달렸다

가두방송을 하고 구호를 외쳤다

당신이 들었던

그 목소리다


겨우 총성이 멎고. 집으로 혹은

다른 세상으로

모두 흩어지고 난 아침에

비를 들고 광장을 쓸었다



3

여러 큰절에서 연꽃 처소를 마련해놓고

서로 모셔 가려 했으나

그는 너릿재 넘어가는 트럭을 타고

굳이 이 골짜기에 와

누웠다     

화순 운주사  (P.38 )






표표히 떠나가는





 등장인물 한 사람이 조용히 퇴장했다. 심야에 119를 불러

타고 무대 밖으로 아주 나가버렸다. 내 인생의 갈림길

마다 길을 가리켜주던 중요한 인물이 예고도 없이 빠진 것

이다



 남은 사람들 모두, 대사는 적었으나 작별의 인사는 그윽

했다. 당신으로 인하여 스토리 전개가 느려지고 느슨해지긴

했지만, 덕분에 봄날의 노들강변 소풍객처럼 평화로웠다면

서 흐느꼈다.



 우이동 솔밭 풍경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컷백으로 끊

임없이 반복 되던 회상 장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서부영화에서 배운 것처럼, 표표히 떠나는 자의 가는 곳

이 남는 자의 세상보다 당연히 멋지고 행복할 것이라고 믿

기로 한다.



 술을 사러 가야겠다. 내 인생에서 사라진 등장인물과 줄

어든 내 배역을 위하여 여러 잔을 마셔야겠다 그가 떠남으

로 나또한 해고 되었으니.     (P.59)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




"자리 잡으면 연락할게"



먼 길 떠나는 사람들이 곧잘 던지고 가는

이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영 소식이 없으면 아직도 자리를 못 잡았거나

아주 잊어버린 까닭이라 생각하자


제법 잘 지켜지는 약속도 있다



"먼저 가보고 좋으면 부를게"



삼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간 언니가

자꾸 부른다며, 엄마가 먼 길을 갔다

혼자 갈 수 있다며

언니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며

새벽길을 갔다



이모는 약속을

지켰다



좋으니까 불렀을 것이다   (P.54 ) 




/ 윤제림 詩集, <스물다섯살을 반성함>에서








   [시인의 말]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 김수영[금성라디오]



이것이 저것을 저만치 밀치고,

오래지 않아 또다른 무엇이 와서

저 자리의 주인이 된다.

점입가경, 타락과 승격이 순식간이다.

폭포의 전율과 급류의 공포가 마을로 내려오고

꽃과 나무들조차 성실 근면의 미덕을 버렸다.

산신령이 집을 잃고

물귀신이 거처를 구걸하리라.


위태로워라, 사람의 자리.


멀리서 휠덜린이 말한다.

"근심하고 섬기는 일,

시인들에게 맡겨진 일이로다."


만신(萬神)과 손을 잡아야겠다.


시인과 무당은 이쪽저쪽 두루 통하는

우주의 엔터테이너.


할 일이 더 늘 것 같다.


                                     2026년 입춘 즈음

                             남산 시옹암(是翁庵)에서

                                                 윤제림






반가운 시인의 반가운 詩集이, 진달래 동산처럼 반갑게 봄처럼 도착했다. 가슴을 광광 울리는 아름답고

너른 들판 같은, 풍성하고 뜨겁고 다정한 마음들의 合唱 같은 시공간의 회귀와 희망에 대한 노란 손수건들 같은

詩들 덕분에 뱃머리 오색 깃발처럼... 덕분에 사노라면 가끔씩 찾아오는 작은 근심들을 잠시 여기 내려놓는다.

좋은 시집을 읽는 기쁨을, 토요일의 봄맞이 술 한잔으로 벗해야겠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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