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의 멜랑콜리
잠시 눈을 감는다
이건 기도하는 자세와 같구나
하지만 내겐 손이 없다
슬픔과 기쁨의 날개를 달고
뒤뚱거리는 늙은 새처럼
나는 울퉁불퉁한 얼굴로
눈을 감고
그건 어쩌면 기도하는 자세와 같고
아무려나 내겐 손이 없으니
어느날 꼭 맞잡았던 두개의 손
검게 벌어진 시간의 틈새로 흘러나간 건
기쁨의 젖은 입술인가
희게 굳은 너의 슬픔인가
죽기 전에
눈을 꼭 감은 채
나는 더 둥글어지고
조금 더 밤에 가까워졌다 (P.64)
망각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돌아오는 밤이
있다
영혼이라는 말을 들으면 검은 돌처럼 가슴이 뛰는 것
금지된 책들이 여기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아는 경이로운
밤처럼
내게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흰 종이처럼 무한할 것이고
마지막 문장에 찍힐 검은 점처럼 한없이 떨며 차가울 것
이었지만
이제 아무도 책을 가졌다고 잡혀가지 않으니 책들도 나도
영혼을 잊었다
종이처럼 부스러지는 나의 얼굴에서 사라진 것이 무엇인
지 영영 알지 못한다 (P.68)
작별
작별 인사를 하지 말자, 눈송이야
이제 사랑은 끝나고
작은 상자 속에 넣어둔 망각이
먼지에 덮인 채 검게 굳고 있다
어느날 그것을 한점 떼어 입에 넣으면, 눈송이야
그건 오래된 음악, 흑백사진, 낡은 종이 위에 쓴 시
천천히 사라지는 너의 맨발
이제 죽음의 새하얀 혓바닥 위에서
희게 녹아버리자, 눈송이야 (P.79)
이기정 詩集, <감자의 멜랑콜리>에서
대형 쇼핑몰에서 2+1으로 산 오뚜기 '마포식 차돌된장찌개'속 감자를 건져 먹으며 저녁을 먹은 후, <감자의 멜랑콜리>를 읽는다. 어떤 시집은 펼치기도 전에 알 수 없는 '떨림'이 오기도 하는데 이 詩集도 그런 시집 중의 하나였다.
'해설' 중,
1970년 재단사의 죽음은 성큼 다가와 있다.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전태일의 죽음은 어떻게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있나."입안 가득한/ 재의 맛"을 지금 여기서 감각하는 한, 전태일은 역사적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나의 얼굴이 된다.
지나간 슬픔과 상처를 기억하고 싶지만 기억할 수 없는 까닭은 단지 물리적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다. 아직 구현되지 못한 근로기준법, 규명되지 못한 도청의 학살, 치유되지 못한 여공의 희생은 기억 속에 파묻혔고, 기계적 노동과 무심한 일상은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 상처의 생생한 감각 대신 과거의 사건을 관념화하면서 낭만화하는 까닭이다. 한순간에 지상의 모든 것을 검은 구멍 속으로 쓸어 넣는 싱크홀처럼. (P.80-81)
어두운 창고 구석에서 힘없고 말없이 그저 존재할 뿐인 것. 그래서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 그래도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것이 거기에 틀림없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 그래서 가만히 숨소리를 듣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그것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 목이 멘다. (P.91)
"눈이 녹은 뒤에도 남아 있는 것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남/은 것 네가 떠난 뒤에도 남은 것 어둑한 너의 눈동자처럼 아/
직은 있는 것" '한 시에 남아 있는 것'(P.49)
앞으론 감자를 먹을 때마다, "정작 쓰지 못한 마음은 주머니 속에서 쓰디쓴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때 시계는 정지하고 남아 있는 것은 박동하지 않/는다"를 생생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