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먼 집







 당신...... ,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

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

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 당신을 부릅니다 단

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 킥킥거리며 세

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

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

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 그러나 킥킥 당신

(65)





              시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챙긴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도 먹고

드러눕고

(73)






            

            이 지상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이 있고 해변 모래밭에는

아린 마늘잎이 돋아 흰 꽃은 우수수 바다를 건넌다



  환幻을 기꺼워하는 마음은 수치를 껴안고 수천 개의

물결 속으로 들어간다 오오 나의 그리움은 이제 자연사

할 것이다

(125)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평행의 우주

까지 가는 일



 그곳에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부모를 가지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내 육체는 내가 가진 다른 이름을 이루어내고



 그곳에서 흰빛의 남자들은 검은빛의 여자들에게 먹히고

 (그러니까 내가 살던 다른 평행에서는 거꾸로였어요

검은빛의 여자를 먹는

 흰빛의 거룩한 남자들이 두고 온 고향으로 들어가는 꿈

을 자꾸 꾸며 우는 곳이었지요)

 나는 내가 버렸던 헌 고무신 안에

 지붕 없는 집을 짓고 무력한 그리움과 동거하며

 또 평행의 우주를 꿈꾸는데



 그러나 그때마다 저 너머 다른 평행에 살던 당신을 다

시 만나는 건 왜일까,

 그건 좌절인데 이룬 사랑만큼 좌절인데

 하 하, 우주의 성긴 구멍들이

 다 나를 담은 평행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면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

면 시간을 거슬러 가서 아무것도 만나지 못하던 일, 평행

의 우주를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던 일

(164)






           농담 한 송이






한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257)











농염한 과일들이 이제 때를 지나 흐물흐물해져 가고 과육의 즙이 땀을 흘리는 연휴 마무리에, 오체투지, 하듯 자신의 한 생애를 살과 피와 씨앗으로 써 내려간 허수경 詩人(1964~2018)의 <허수경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를 읽었다.


허수경 시인의 여섯 권의 詩集들 속의 詩들을, 56 명의 시인들이 고르고 저마다의 단상을 적은 이 시선집의 시들을 읽는 시간은, 생전의 시인이 그의 삶과 영육과 詩들로 차려준 '잘 차려진 밥상'을 받고 차가워진 숭늉까지 받아 마시니 배가 부르고 마음이 든든해지고 문득, 허방 같은 삶이 제법, 눈 밑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그저 매달려만 있는 눈물같이 어쩌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다리로 남은 길을 걸어 나갈 힘이 생긴다.


허수경 시인의 시들을 읽는 동안, 풍성했고 서러웠고 절절했고, 어느 정갈한 영혼의 어깨에 몸을 기대는 듯했다.

'현재라는 책장 속에 저마다의 묘옥을 지은 우리, 다시 자라기에는 미리 늙은 아가들'.

'알아볼 수 있어서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허수경 시인이 가 있을 '먼 곳'을 向 해 가을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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