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문단속을 마치고 집 밖으로 나와 태일의 차에 올라타자, 그의 가문과 일가친척들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강문태 고문은 집안의 최고 어른이고, 그 아래로 작은아버지와 수많은 자손들, 더 나아가 방계 친족들까지 모두 오늘 밤 서울 시내 호텔 연회장에서 한자리에 모일 예정이라 했다.


그녀는 묵묵히 귀담아듣는 척했으나, 머릿속은 줄곧 짙은 안갯속을 헤매고 있었다. 태일은 힐끔 그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힐난하듯 입을 열었다.


-왜 그래? 화났어?

-아뇨.

-아까는 미안했어.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외로울 때가 있지.

-미안해요. 제가 좀 예민했어요.

-그럴 수 있지 뭐. 여자는 가끔 자존심을 세워줘야 해. 너무 쉽게 보이면 재미없지. 그래서 네가 더 고급스럽고, 질리지 않잖아. 그게 나를 더 미치게 하거든.

-아, 그렇군요.

-그런데 얼굴이 좀 탔네. 자전거 너무 많이 탄 거 아냐? 그 상처는 어쩔 거야?

-화장으로 잘 가려볼게요.

-서울 도착하면 백화점부터 가자. 내 여자는 어디서든 가장 눈부셔야 하니까.


태일의 농담 섞인 말에 서윤은 마지못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의 끝자락에는 씁쓸함조차 희미해지고, 남은 것은 깊은 회의와 체념뿐이었다.


사과 과수원 앞을 지나 축사가 늘어선 오솔길로 접어들자, 저 앞 길목을 가로막은 한 대의 차가 눈앞에 나타났다. 도준의 랜드로버였다. 태양 아래 연병장에 선 성난 황소처럼, 길 한가운데를 점령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윤의 가슴이 일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천근의 무게 같은 절박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세상이 빠르게 회전하는 듯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랜드로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단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그 차는 한 사내의 고뇌와 이글거리는 분노를 한꺼번에 응축해 놓은 형상처럼 보였다.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과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고, 그 고통의 화살이 날아와 그녀의 가슴을 꿰뚫는 듯했다.


태일이 운전하는 BMW가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차창 너머, 도준의 모습이 더욱 또렷해졌다. 운전대 앞에 앉은 그는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다. 격분과 좌절의 먹빛 그림자가 얼굴 깊숙이 드리워졌다. 그가 일부러 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잘근잘근 씹히는 듯 아려왔다.


‘내가 떠날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별장으로 오지 않고 여기서 날 기다린 거야.’


왜 이곳에 있는지, 그 마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숲속 비포장도로 양옆으로 산기슭과 절벽이 이어져 있었다. 길이 좁아 두 대의 차가 나란히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태일이 차를 비켜 세우려 하자, 도준이 먼저 랜드로버를 둔덕 아래쪽으로 바짝 붙였다.


-예의는 좀 있는 사람 같군. 근데 히피인가? 저 머리 꼴 하고는… 쯧쯧.


태일은 상대 운전자의 꽁지머리를 힐끗 보며 비아냥거렸다.


도준은 그늘진 눈빛으로 정면만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부동의 자세는 어떤 암시를 주는 듯했다. 그녀의 선택만을 기다리겠다는 비밀스러운 사인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당장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조수석 문을 열고, 태일의 BMW에서 내려 재빨리 도준의 낡은 차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본능적으로 요동쳤다.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운명의 마차를 갈아타듯, 그렇게 해치워 버릴 수도 있다는 예감이 강력한 전류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태일이 운전대를 왼쪽으로 틀었다. 덧없는 그림자처럼 희망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시간의 테두리를 살짝 비튼 듯, 그 찰나의 흐름이 기묘하게 굴절했다.


-와, 진짜 오래된 차다. 아직도 저런 고물이 굴러다닌다는 게 신기하네. 외제 차 너무들 좋아하셔.


태일은 빈정거리듯 말하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마침내 두 대의 차가 스치듯 엇갈렸다.


그 순간, 서윤은 도준과의 시간을 떠올렸다. 비록 짧았으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장면들. 가슴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아쉬운 꿈처럼,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제 그들의 인연은 서로를 등진 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안타깝게 멀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물방울이 뺨 위로 흘렀다. 태일이 눈치챌까 조마조마했지만, ‘잘 가요. 내 마지막 인사는 이것뿐이에요. 오래 기억할게요. 안녕.’ 서윤은 속으로 조용히 작별을 고하며 눈물을 삼켰다.

태일은 백미러를 슬쩍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저긴 막다른 길이잖아? 길을 잘못 든 거겠지.


서윤은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막다른 길, 잘못 들어선 길… 그 위를 끝없이 배회하는 너와 나, 우리들. 흘러간 시간과 속절없는 세월 속에서, 당신의 얼굴과 끝내 이어지지 못한 사연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꿈같던 시절의 오후 한때가, 마치 주인을 잃어버린 편지 한 장처럼,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못한 채 서서히 스러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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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 2026-08-2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날짜를 착각해 연재가 제시간에 올라가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 중 하나였습니다. 기다리신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지금 막 1부의 마지막 화인 「52. 막다른 길, 잘못 들어선 길」을 올렸습니다.
그동안 침묵 속에서 이 이야기를 함께 걸어와 주신 모든 분들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 화부터는 2부가 시작됩니다.
저도 한 회 한 회,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그림 김미진


하나, 둘, 셋.


그것은 어떤 응답이었을까. 처절한 절규가 멀리 번져갔다가, 낯선 기척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그 정적 속에서 처음 깨어난 것은 마음을 가로지른 기묘한 예감이었다. 어쩌면 이 우주의 어딘가에는 간절한 소망을 실어 나르는 이름 모를 메신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때, 절망 끝에서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는 한 줄기 섬광처럼 어둑한 공간을 갈랐고, 깊이 잠들었던 영혼의 시계를 다시 일깨웠다. 그 신호는 유일한 희망이자, 동시에 한 인간의 생애를 산산이 부숴버릴 수도 있는 무자비한 운명의 심판이었다.


태일에게 떠밀리듯 끌려가던 그녀는 익숙한 벨 소리에 순간적으로 발을 멈췄다. 차갑게 식어가던 심장이 다시 고동쳤고, 혼미했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태일도 전화 소리를 듣고는 잠시 멈춰 섰다. 그 짧은 틈 사이, 그녀는 탈출 본능에 이끌리듯 층계를 휘청이며 내려갔다. 부엌 입구에 무심히 걸려 있던 그 전화기는 이제 한 생명을 붙드는 구원의 징표처럼 빛났다.


그녀는 수화기를 움켜쥐며, 태일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만요. 작품 전시와 관련된 중요한 전화일지도 몰라요.


귓가에 수화기를 가져다 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전화, 이 목소리가 부디 저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들려온 다정한 이름, 살가운 목소리. 제이였다. 그 음성이 그녀 안에서 말라붙었던 무언가를 되살렸다. 눈물이 불쑥 솟구쳤다.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건져 올린, 마음 깊숙한 곳의 온기 한 조각이었다.


-태일 씨가 또 전화했어. 너랑 통화 안 된다고 난리 치더라.

-청소하다가 전화선이 빠졌나 봐.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지. 얼른 전화해 봐. 걱정하던데.

-태일 씨, 지금 여기 와 있어.


제이의 전화로 가까스로 숨을 돌렸지만, 태일은 여전히 층계 위에서 그녀를 향해 갈증과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서 여기로 돌아와. 우리 비즈니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말은 없었지만, 그의 표정은 위협의 언어로 가득했다.


그녀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의 잔가지를 뻗어나갔다.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고, 그 방법은 이런저런 수다뿐이었다. 손문기 선생의 초대전을 화제로 꺼내자, 제이도 반가운 듯 대화에 힘을 실었다.


-나도 한번 가 보고 싶어. 너의 스승님이잖아.

-전시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내가 있을 때 와.

-다음 주 어때? 인사동 그동안 많이 변했지?

-응. 요즘은 전통 등불 콘셉트로 가로등 공사하더라.

-골목길에 맛집도 많이 늘었겠지?

-그럼, 많이 늘었지. 너 부추 넣은 보리 비빔밥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고모네 삼합 어때?

-좋지. ‘가을 나그네’도 가자. 내가 딸기빙수 살게.

-와, 신난다. 히히.


그 순간, 위층에서 난간을 두드리는 쿵쿵 소리가 터져나왔다. 태일이었다. 서윤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렸다.


태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층계를 내려왔다. 쓰레기봉투를 집어 드는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문짝에 화풀이라도 하듯 쾅 닫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쓰레기를 처리하고 돌아왔을 때, 서윤의 눈가는 이미 눈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급히 화장실로 몸을 피하고는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짐 다 꾸렸어? 더 챙길 거 있으면 말해. 차에 실어 줄게.

-거기 문 옆에 있는 배낭이 다예요. 어서 차로 가서 기다려 주세요.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 그녀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찬물로 얼굴을 식히며 그녀는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슬렀다.


별장을 떠나기 전, 실내를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도착 당시의 설렘과 충만하던 감각은 자취를 감추고, 짙은 불안과 뒤엉킨 감정의 잔향만이 허공을 떠돌았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 거울 속 얼굴은 분명 그대로였지만, 그 눈빛에는 낯선 계절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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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 니코 그리고 지금 🌿
#Arong #Nico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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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태일의 시선이 쓰레기 봉지 속을 훑는 동안, 서윤은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처럼, 싸늘한 공포가 목구멍 깊숙이 차올랐다.


일부러 박박 구겨놓은 듯한 그 종이가 유독 태일의 눈에 띄었다. 결국 태일의 손끝에서 그 노트 종이가 딸려 나왔다. 그는 구겨진 종이를 펴더니, 그 위에 적힌 숫자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네?

-누구 번호야? 이건 나서윤의 글씨체가 아닌데.


서윤의 얼굴빛이 삽시간에 하얗게 변했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바르르 떨렸다.


-전, 전시회에 관련된 작가 전화번호예요. 명… 명희 씨, 잘 아시죠?

-명명희? 알지. 우리 집에도 그림 몇 점 있잖아. 남미 여행 중 그린 거랑,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전시했던 것도 있지.

-맞아요. 이번에 초대전을 기획 중이에요. 혹시 후원하실 생각 있어요?


태일은 서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불편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 나도 명명희 씨 팬이니 기꺼이 돕지.


그는 구겨진 노트 종이를 다시 쓰레기봉투 속에 넣고, 봉투째 손으로 꽉 비틀었다.


-리온에 전화했더니 화요일부터 휴가라던데, 왜 나한테는 출근한다고 거짓말한 거야?


태일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갤러리 일정이 갑자기 바뀌었어요. 돌아가는 길에 명 선생님을 찾아뵈려고요.

-오늘?

-아니, 내일 뵈면 되죠. 그래서 휴가를 받은 거예요.

-그런데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통화만 됐어도 내가 이렇게 바쁜 와중에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미안해요. 청소하다가 전화선이 빠진 줄도 몰랐어요.


서윤은 어색하게 말을 더듬었다. 입안이 메말라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태일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더니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그녀를 향해 불쑥 손을 뻗어왔다. 어색하게 몸을 사리는 그녀를, 그는 노련한 종마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거짓말 한 벌은 받아야지? 안 그래?


그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끈적거리는 숨결을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손끝이 닿는 자리마다 피부는 긴장으로 굳어졌고, 뼛속 깊이 불쾌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그 깊고 흐릿한 감정의 틈새로, 도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 안 돼요. 턱이 아파서 그래요.


상처 난 턱을 손으로 감싸며 한 발 물러선 그녀의 눈빛에는, 태일이 끝내 읽어내지 못한 불신과 원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남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 너 때문에 내가 새벽부터 장거리 운전했잖아.


태일은 잠시 주춤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집요하게 굴었다.


-침대에 가서 좀 쉬자, 피곤을 풀어야지. 잠깐만이라도.


자신을 한낱 피로를 풀기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는 뻔뻔함이, 그의 말투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


‘미쳤어… 제발, 나한테서 떨어져.’


그녀는 다시 뒷걸음질했지만 태일은 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서서히 간격을 좁혀왔다. 그 눈빛엔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광기가 번뜩였다. 한 발, 또 한 발 뒤로 물러설수록 벼랑 끝이 가까워지는 듯했다. 한 남자의 폭력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현실이 폐쇄된 어둠 속으로 그녀를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도망쳐야 해. 이 더러운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해.’


이를 악물며 속으로 외쳤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를 지켜내야만 했다. 숨결보다도 가느다란 희망 하나를 붙잡고, 서윤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하느님, 제발.’


그 순간, 시간마저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세상은 끝없는 정적 속으로 잠겨 들었다. 한없는 어둠 속,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손끝으로 붙든 무언의 기도는 끝내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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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현관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도준의 차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숨통을 점점 조여왔다. 서둘러 배낭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돌층계를 단숨에 뛰어 올라온 태일이 초인종을 거세게 눌러댔다. 그녀는 피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턱은 그게 무슨 꼴이야? 어쩌다 다친 거야?


집 안으로 들어선 태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게… 자전거 타다 넘어졌어요.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이 얼굴로 어떻게 사람들 앞에 나설 생각이야?


태일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무슨 모임이요?

-저녁에 아버지 생신 파티가 있어. 금천 강 씨 집안에선 공식 행사나 다름없는 날이지. 아버지가 당신을 친척들한테 소개하실 거야.


태일은 손을 내저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 얼굴 어쩔 거야. 우리 집안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신우건설의 강문태 고문은 권위와 겉치레, 가문과 혈통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자본과 권력은 혈연과 지연, 정략적 관계를 통해 치밀하게 축적되는 것이었고, 기성세대의 위신과 위계질서는 그 어떤 의심도 허용되지 않는 불가침의 체계였다.


강문태에게 서윤은 결코 아들의 배필로 적합하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는 그의 눈에 서윤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고, 아들이 그런 평범한 여자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 도무지 달갑지 않았다.

아들의 간청에 약혼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으나, 그 인연이 결국 오래가지 못할 거라 여기며 결혼식을 계속 미룬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약혼식을 치른 지 벌써 일 년하고도 육 개월이 지났건만 서윤을 향한 강문태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의심으로 가득했다. 무심한 듯,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독화살 같은 말들은 서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


-넌 얼굴에 그늘이 너무 많아. 젊은 애가 왜 그런 표정이니? 누가 죽기라도 한 거야?


-여자라면 싹싹하고 사근사근한 맛이라도 있어야지. 너처럼 울상은 곤란해. 없는 복도 달아난다니까.


실상 그는 이미 한 재력가의 외동딸을 아들의 배필로 점찍어두었고, 그 결합이 가져올 막대한 이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2년 전, 서윤이 짐바브웨 쇼나 조각상을 성북동 집에 배달하지 않았더라면, 태일은 지금쯤 아버지가 택한 여자와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약혼 이후, 강문태 고문은 집안의 각종 행사에서 서윤을 배제하며 그녀를 의미 없는 존재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일에게 직접 그녀를 데려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마침내 정식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러나 오늘 밤 생일 파티에서 강 씨 일문 앞에 서야 한다는 중압감보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서윤의 마음을 훨씬 더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아래 공터에 도준의 차가 멈춰 서고, 그가 현관문 앞까지 자신을 데리러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두 남자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태일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집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는 항상 눈치가 빠르고 직관이 예리한 남자였다.


서윤의 머릿속에서 압력밥솥 꼭지가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도계의 수은주가 치솟았다. 공기 입자의 밀도가 임계치에 도달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태일은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시에 그녀를 끌어당겨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화들짝 놀란 서윤은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쳐냈다. 황급히 돌아서서 테이블 주변을 정리하는 척 몸을 피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목소리는 메마른 톤으로 갈라졌다.


-아,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예요? 제 기분도 좀… 생각해 주세요.

-뭐야? 이건 좀 섭섭한데.

-중요한 행사라니 서둘러야겠네요. 거의 다 준비됐어요. 아, 쓰레기통을 안 비웠네요. 태일 씨가 제 짐을 들고 차에 가서 기다리세요. 금방 나갈게요.

-쓰레기 정도는 내가 버려줄 수도 있어. 얼른 마저 준비해.


태일이 부엌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어젯밤 서윤이 초록색 노트에서 찢어낸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도준이 전화번호를 적어 준,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메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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