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샤넬 백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건 호의를 가장한 훈육이었고, 자존을 길들이기 위해 계산된 값비싼 미끼였다. 수경의 눈빛은 서윤의 여리고 예민한 내면을 단번에 꿰뚫을 듯이 차가웠다.


-그래, 앞으로는 이런 데 익숙해져야 해. 알지? 우리 식구들과 함께하는 삶은 이런 게 기본이니까.


그 말은 서윤의 가슴 한가운데 미세한 균열을 남겼다. 입술을 한 번 달싹였지만, 민망한 낯빛으로 끝내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그 비싼 샤넬 백을 받자니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고, 거절하자니 자존심만 내세운 허세로 비칠까 두려웠다.


수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블랙 플래티넘 신용카드를 꺼내 매장 직원에게 건넸다.


-이걸로 한꺼번에 계산해 주세요.


이 세상에는 할부 인생과 일시불 인생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직원은 눈이 잠시 커졌다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았다. 태일은 지난주부터 해외 출장 중이었다. 자기 약혼녀가 장래 시누이 앞에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가 지금 곁에 있다고 해도, 이 난감한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린 피해 의식마저 낱낱이 드러낼 것 같은 갤러리아백화점의 거울 속 세상. 서윤은 자신이 그 안에서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현란하게 반짝이는 조명들은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그녀의 존재를 비추었다. 감추고 싶었던 감정의 응어리들까지, 표본실 안의 개구리처럼 낯설고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수경과 헤어진 뒤, 서윤은 서둘러 인사동으로 돌아왔다. 작은 종소리와 함께 리온 갤러리의 출입문이 열렸다. 서윤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전시장 실내에는 뉴에이지 풍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관람객은 많지 않았으나, 허공을 가르는 낮은 목소리와 바닥을 스치는 발소리가 늦은 오후의 고요를 가만히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뭔가 묵직한 것이 든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탓에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1층 카운터에는 보조 큐레이터 경숙 씨뿐이었다. 경숙 씨는 서윤이 들고 있는 봉지를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뭐예요? 혹시 쇼핑하러 갔다 온 거예요?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서윤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태일의 누이가 선물이라며 건넨 샤넬 백은 종이가방마저 지나치게 크고 화려했다. 한낮의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그 흰색 로고를 자꾸 힐끔거리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 겉포장을 벗기고 본품만 챙겨 올까도 잠시 망설였지만, 혹시라도 돌려줘야 할 일이 생길까 봐 끝내 손을 대지 못했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결정적인 치부라도 되는 양, 편의점에서 산 검은 쓰레기 봉지에 넣어 여기까지 들고 왔다. 그 샤넬 클래식은 태일 누이의 말들을 끝까지 견뎌낸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버릴 수도 없고, 손에 들고 있자니 더욱 꺼림칙했다.


-뭔데요? 어디 좀 보여줘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제 코는 못 속여요. 냄새가 난다니까.


경숙 씨는 자기도 한번 보자며 계속 졸라댔다. 서윤이 끝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그녀는 토라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요즘 세일하는 데 많던데… 나도 선배처럼 몰래 쇼핑이나 하러 갈까나?

-쇼핑은 주말에 하면 되지. 그럼, 수고해.


서윤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2층 사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네 명의 연구원이 함께 쓰는 공간은 오늘따라 유난히 어수선했다. 도둑질한 장물이라도 감추듯 사물함에 샤넬 백을 밀어 넣고 돌아선 순간,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며 도준의 얼굴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횡계 숲길에 멈춰 서 있던 랜드로버와 운전대를 움켜쥔 그의 얼굴은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도준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죄책감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그를 외딴 숲에 홀로 남겨두고 온 기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연인 듯 마주친 인연은 고작 나흘 만에 찰나의 불꽃이 되어 사그라졌다. 미처 서로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이별이 먼저 찾아왔다. 그날, 도준이 태일보다 먼저 별장 앞에 도착했다면 어땠을까.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도준의 랜드로버에 올라타고, 태일이 모는 BMW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길. 인생의 또 다른 갈래가 어쩌면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백일몽 같은 상상에 잠겨 있던 그 순간, 동료 직원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직원은 장난스레, 아무도 그녀가 오래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관장은 아직 갤러리에 나오지 않았고, 최 실장은 미팅 때문에 출타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 일로 불편한 말이 오갈 거라는 예감이, 그녀의 마음에 가벼운 그늘을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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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아무도 없는 횡계 숲길에 한 남자를 두고 떠나온 지 한 달 남짓 지난 1997년 4월의 봄이었다. 오늘도 갤러리아백화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화사한 조명 아래, 명품관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유명 디자이너의 신상품과 값비싼 제품들이 가지런히 놓인 공간은, 모든 욕망이 정당화되는 세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윤의 눈에 비친 이 찬란한 장소는 오늘따라 무기력한 권태를 불러일으켰다.


손에 든 쇼핑백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그녀의 마음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두운 터널에 갇힌 듯한 막막함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눈부시던 매장들은 어느새 출구 없는 미로로 바뀌었고, 그 속에서 서윤은 점점 옅어지는 존재감과 함께 깊은 허무에 잠식되어 갔다.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수경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잠시 외출을 나온 상태였다. 리온 사무실에는 오늘 안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최희숙 관장은 직원들이 지각을 하거나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갤러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수경은 느긋한 걸음으로 줄지어 늘어선 진열대들 사이를 오가며 쇼핑에만 몰두했다.


‘도대체 몇 시간째야. 빨리 인사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서윤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약혼자 태일의 누이인 강수경을 따라다니며, 수행 비서인지 짐꾼인지 모를 처지에 놓여 있었다.


어느 순간, 수경도 손목시계를 힐끔거리는 서윤을 의식한 듯했다. 구찌 매장에서 액세서리를 꺼내 살펴보던 그녀가 갑자기 환히 웃으며 서윤을 돌아보았다.


-서윤 씨, 힘들어? 내가 괜히 바쁜 사람 불러낸 건 아니지?

-아뇨,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서윤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강문태 이사장의 맏딸이자 태일보다 일곱 살 위인 수경은 생모가 집을 떠난 뒤 집안의 안주인 역할을 대신해 온 사람이었다. 강 씨 집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 또한 서윤에게는 이미 몸에 밴 습관이었다.

 

수경은 새로 단장한 샤넬 매장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명품 숍에서는 제품보다도 종업원들의 ‘의례적인 공손함’이 먼저 사람을 압도하곤 한다. 실내를 여유롭게 둘러보던 그녀가 유리 진열장 안의 검은색 가방을 가리켰다.


-여기요, 저것 좀 볼게요.


클래식 미디움은 샤넬의 시그니처 백이자, 이 가게에서 가장 고가의 제품 중 하나였다. 정장을 입은 남자 직원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가방을 꺼내 수경 앞에 값진 도자기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 모델은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는 클래식 아이템입니다. 1955년 코코 샤넬 여사가 디자인한 이후, 변치 않는 상징성을 지닌 작품입니다.


직원의 말투는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가방 안을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샤넬 클래식은 검은색 캐비아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내부는 짙은 버건디 색으로 고급스럽게 마감되어 있었다.


수경은 어깨에 걸친 가방의 레더 체인을 살짝 조정하듯 만지며, 거울 너머로 서윤을 주시했다.


-어때? 괜찮아 보여?

-네, 심플하니 괜찮은 것 같아요. 누님이 입고 계신 옷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요.


서윤은 가급적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대답했다. 그녀 앞에서는 감탄사조차 함부로 흘릴 수 없었다. 수경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가방을 서윤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순간 서윤의 가슴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얼떨결에 양손을 뒤로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이렇게 비싼 백을 들고 다닐 일도 없고…

-서윤 씨가 예뻐서 주는 게 아니야.


수경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싸늘하게 변했고, 날 선 목소리에는 어딘가 위태로운 기색이 숨어 있었다.


-저번에 아버지 생신 파티 때 신발도 그렇고, 백 하나도 변변한 게 없어 보이더라고. 이제 우리 집 식구가 될 텐데, 좀 품위와 격식에 맞게 살아야지. 쇼핑도 패션도, 예의범절까지… 모든 걸 제대로 따라와야 내 동생 체면에 흠이 가지 않지.


수경의 말이 끝나자, 서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가느다란 동요조차 감추듯 두 손을 맞잡고 시선만 아래로 떨구었다. 그날, 강문태 고문의 생일 파티에 갔을 때 신었던 신발은 태일이 백화점에서 직접 골라 준 것이었고, 조신하게 손에 들었던 가방은 뉴욕에 잠시 있을 때 점심값을 아껴가며 마련한 코치 백이었다. 금천 강 씨 집안 행사에 참석하려 강남 미용실에도 다녀왔고, 태일이 원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썼지만, 수경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부족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를 자기들 방식대로 바꾸려는 속셈이야. 화폐의 위력으로 내 기를 꺾으려는 거지.’


불판 곁에 다가간 듯, 서윤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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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문단속을 마치고 집 밖으로 나와 태일의 차에 올라타자, 그의 가문과 일가친척들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강문태 고문은 집안의 최고 어른이고, 그 아래로 작은아버지와 수많은 자손들, 더 나아가 방계 친족들까지 모두 오늘 밤 서울 시내 호텔 연회장에서 한자리에 모일 예정이라 했다.


그녀는 묵묵히 귀담아듣는 척했으나, 머릿속은 줄곧 짙은 안갯속을 헤매고 있었다. 태일은 힐끔 그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힐난하듯 입을 열었다.


-왜 그래? 화났어?

-아뇨.

-아까는 미안했어.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외로울 때가 있지.

-미안해요. 제가 좀 예민했어요.

-그럴 수 있지 뭐. 여자는 가끔 자존심을 세워줘야 해. 너무 쉽게 보이면 재미없지. 그래서 네가 더 고급스럽고, 질리지 않잖아. 그게 나를 더 미치게 하거든.

-아, 그렇군요.

-그런데 얼굴이 좀 탔네. 자전거 너무 많이 탄 거 아냐? 그 상처는 어쩔 거야?

-화장으로 잘 가려볼게요.

-서울 도착하면 백화점부터 가자. 내 여자는 어디서든 가장 눈부셔야 하니까.


태일의 농담 섞인 말에 서윤은 마지못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의 끝자락에는 씁쓸함조차 희미해지고, 남은 것은 깊은 회의와 체념뿐이었다.


사과 과수원 앞을 지나 축사가 늘어선 오솔길로 접어들자, 저 앞 길목을 가로막은 한 대의 차가 눈앞에 나타났다. 도준의 랜드로버였다. 태양 아래 연병장에 선 성난 황소처럼, 길 한가운데를 점령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윤의 가슴이 일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천근의 무게 같은 절박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세상이 빠르게 회전하는 듯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랜드로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단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그 차는 한 사내의 고뇌와 이글거리는 분노를 한꺼번에 응축해 놓은 형상처럼 보였다.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과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고, 그 고통의 화살이 날아와 그녀의 가슴을 꿰뚫는 듯했다.


태일이 운전하는 BMW가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차창 너머, 도준의 모습이 더욱 또렷해졌다. 운전대 앞에 앉은 그는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다. 격분과 좌절의 먹빛 그림자가 얼굴 깊숙이 드리워졌다. 그가 일부러 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잘근잘근 씹히는 듯 아려왔다.


‘내가 떠날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별장으로 오지 않고 여기서 날 기다린 거야.’


왜 이곳에 있는지, 그 마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숲속 비포장도로 양옆으로 산기슭과 절벽이 이어져 있었다. 길이 좁아 두 대의 차가 나란히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태일이 차를 비켜 세우려 하자, 도준이 먼저 랜드로버를 둔덕 아래쪽으로 바짝 붙였다.


-예의는 좀 있는 사람 같군. 근데 히피인가? 저 머리 꼴 하고는… 쯧쯧.


태일은 상대 운전자의 꽁지머리를 힐끗 보며 비아냥거렸다.


도준은 그늘진 눈빛으로 정면만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부동의 자세는 어떤 암시를 주는 듯했다. 그녀의 선택만을 기다리겠다는 비밀스러운 사인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당장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조수석 문을 열고, 태일의 BMW에서 내려 재빨리 도준의 낡은 차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본능적으로 요동쳤다.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 운명의 마차를 갈아타듯, 그렇게 해치워 버릴 수도 있다는 예감이 강력한 전류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태일이 운전대를 왼쪽으로 틀었다. 덧없는 그림자처럼 희망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시간의 테두리를 살짝 비튼 듯, 그 찰나의 흐름이 기묘하게 굴절했다.


-와, 진짜 오래된 차다. 아직도 저런 고물이 굴러다닌다는 게 신기하네. 외제 차 너무들 좋아하셔.


태일은 빈정거리듯 말하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마침내 두 대의 차가 스치듯 엇갈렸다.


그 순간, 서윤은 도준과의 시간을 떠올렸다. 비록 짧았으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장면들. 가슴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아쉬운 꿈처럼,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제 그들의 인연은 서로를 등진 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안타깝게 멀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물방울이 뺨 위로 흘렀다. 태일이 눈치챌까 조마조마했지만, ‘잘 가요. 내 마지막 인사는 이것뿐이에요. 오래 기억할게요. 안녕.’ 서윤은 속으로 조용히 작별을 고하며 눈물을 삼켰다.

태일은 백미러를 슬쩍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저긴 막다른 길이잖아? 길을 잘못 든 거겠지.


서윤은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막다른 길, 잘못 들어선 길… 그 위를 끝없이 배회하는 너와 나, 우리들. 흘러간 시간과 속절없는 세월 속에서, 당신의 얼굴과 끝내 이어지지 못한 사연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꿈같던 시절의 오후 한때가, 마치 주인을 잃어버린 편지 한 장처럼,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못한 채 서서히 스러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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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 2026-08-2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날짜를 착각해 연재가 제시간에 올라가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 중 하나였습니다. 기다리신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지금 막 1부의 마지막 화인 「52. 막다른 길, 잘못 들어선 길」을 올렸습니다.
그동안 침묵 속에서 이 이야기를 함께 걸어와 주신 모든 분들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 화부터는 2부가 시작됩니다.
저도 한 회 한 회,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그림 김미진


하나, 둘, 셋.


그것은 어떤 응답이었을까. 처절한 절규가 멀리 번져갔다가, 낯선 기척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그 정적 속에서 처음 깨어난 것은 마음을 가로지른 기묘한 예감이었다. 어쩌면 이 우주의 어딘가에는 간절한 소망을 실어 나르는 이름 모를 메신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때, 절망 끝에서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는 한 줄기 섬광처럼 어둑한 공간을 갈랐고, 깊이 잠들었던 영혼의 시계를 다시 일깨웠다. 그 신호는 유일한 희망이자, 동시에 한 인간의 생애를 산산이 부숴버릴 수도 있는 무자비한 운명의 심판이었다.


태일에게 떠밀리듯 끌려가던 그녀는 익숙한 벨 소리에 순간적으로 발을 멈췄다. 차갑게 식어가던 심장이 다시 고동쳤고, 혼미했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태일도 전화 소리를 듣고는 잠시 멈춰 섰다. 그 짧은 틈 사이, 그녀는 탈출 본능에 이끌리듯 층계를 휘청이며 내려갔다. 부엌 입구에 무심히 걸려 있던 그 전화기는 이제 한 생명을 붙드는 구원의 징표처럼 빛났다.


그녀는 수화기를 움켜쥐며, 태일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만요. 작품 전시와 관련된 중요한 전화일지도 몰라요.


귓가에 수화기를 가져다 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전화, 이 목소리가 부디 저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들려온 다정한 이름, 살가운 목소리. 제이였다. 그 음성이 그녀 안에서 말라붙었던 무언가를 되살렸다. 눈물이 불쑥 솟구쳤다.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건져 올린, 마음 깊숙한 곳의 온기 한 조각이었다.


-태일 씨가 또 전화했어. 너랑 통화 안 된다고 난리 치더라.

-청소하다가 전화선이 빠졌나 봐.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지. 얼른 전화해 봐. 걱정하던데.

-태일 씨, 지금 여기 와 있어.


제이의 전화로 가까스로 숨을 돌렸지만, 태일은 여전히 층계 위에서 그녀를 향해 갈증과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서 여기로 돌아와. 우리 비즈니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말은 없었지만, 그의 표정은 위협의 언어로 가득했다.


그녀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의 잔가지를 뻗어나갔다.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고, 그 방법은 이런저런 수다뿐이었다. 손문기 선생의 초대전을 화제로 꺼내자, 제이도 반가운 듯 대화에 힘을 실었다.


-나도 한번 가 보고 싶어. 너의 스승님이잖아.

-전시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내가 있을 때 와.

-다음 주 어때? 인사동 그동안 많이 변했지?

-응. 요즘은 전통 등불 콘셉트로 가로등 공사하더라.

-골목길에 맛집도 많이 늘었겠지?

-그럼, 많이 늘었지. 너 부추 넣은 보리 비빔밥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고모네 삼합 어때?

-좋지. ‘가을 나그네’도 가자. 내가 딸기빙수 살게.

-와, 신난다. 히히.


그 순간, 위층에서 난간을 두드리는 쿵쿵 소리가 터져나왔다. 태일이었다. 서윤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렸다.


태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층계를 내려왔다. 쓰레기봉투를 집어 드는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문짝에 화풀이라도 하듯 쾅 닫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쓰레기를 처리하고 돌아왔을 때, 서윤의 눈가는 이미 눈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급히 화장실로 몸을 피하고는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짐 다 꾸렸어? 더 챙길 거 있으면 말해. 차에 실어 줄게.

-거기 문 옆에 있는 배낭이 다예요. 어서 차로 가서 기다려 주세요.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 그녀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찬물로 얼굴을 식히며 그녀는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슬렀다.


별장을 떠나기 전, 실내를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도착 당시의 설렘과 충만하던 감각은 자취를 감추고, 짙은 불안과 뒤엉킨 감정의 잔향만이 허공을 떠돌았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 거울 속 얼굴은 분명 그대로였지만, 그 눈빛에는 낯선 계절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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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 니코 그리고 지금 🌿
#Arong #Nico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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