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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먼 섬으로 나비가 팔랑팔랑 도토리숲 동시조 모음 10
전병호 지음, 김혜원 그림 / 도토리숲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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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그리운 계절에 읽는 <수평선 먼 섬으로 나비가 팔랑팔랑>은 전병호 선생님의

동시조가 선생님의 마음을 비춰주는 시원한 책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속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자연의 서정과

바다가 끌어올리는 일출, 불타는 커다란 쇠공 같은 저녁해, 흰 눈 속에 빠알간 눈으로 

표현한 '겨울 망개'는 선명한 이미지와 상상을 불러옵니다,


비 오는 날 '나무 우산'에 깃든 작은 새처럼, 

비 오는 날 나무 아래 서면 나무 우산을 올려다 볼 것 같습니다.

그림도 잔잔하고 편안합니다.


동시조의 유연한 품격이 느껴지는 <수평선 먼 섬으로 나비가 팔랑팔랑>을 읽으면서

마음이 풍요로운 시절을 간직합니다.

봄. 돌장승//돌장승 발등에/ 내려앉은 벚꽃잎/ 바람이 불 때마다/살금살금 간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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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짝폴짝 신발 여행 - 순 우리말 민화 동시집 즐거운 동시 여행 시리즈 32
김이삭 지음, 신소담 그림 / 가문비(어린이가문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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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떤 신발을 신고 어디로 가고 싶은가?

김이삭 시인의 <<폴짝폴짝 신발 여행>> 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화두였다.


새 신발은 밖에 두지 않고 방안에 모셔두어도 좋았다.

새 신발을 만나는 날의 설렘을 잊을 수 없다.

새 구두를 누군가 신고 가 버린 당혹감도 떠오른다.

입학 날에는 엄마가 새 신발을 사 주셨던 기억이 난다.


- 털신-



-


할머니가 이웃 할머니 집에 놀러 가시면 저녁 드시라고 찾아갈 때가 있었다.

함박눈 내린 댓돌 위에 <털신>여러 켤레가 있던 정겨운 풍경이 떠올라서 좋다.

우리말 고운 바람들 이름도 알고, 동시도 읽고, 옛이야기처럼 포근한 민화도 감상할 수 있다.

구름으로 걷고

- 짚신-

외할아버지는 짚신을 예술적으로 만드신 분이었다는데,

엄마의 꽃 짚신을 그려본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등짐에 대롱대롱 매달려가는 짚신이 그려진

새털구름처럼 가벼우면 좋으련만 짚신마저 묵직하게 느껴진다.

지도 위로 걷는 신발

–꽃신-

꽃신은 꿈을 품고 있어.//사뿐사뿐 걸으면/길들이/활짝 열리고//그 꿈이 형형색색으로/

빛날 때/마침내/꽃신은 꽃가마에서 내려/갓밝이 같은 꽃이 되지.


잔칫날 신어본 적이 있어서 꽃신은 그 의미가 그대로 다가온다.


실용성과 세련미가 돋보이는 메리제인 미국 신발을 요일별로 신고

뽐내고 싶다. 시도 발랄하고 경쾌하다.


글로벌 시대에 사는 지금은 세계 나라 신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때다.


멋쟁이 신발이 아닌, 편하고 내 발에 어울리는 세계 속의 신발을 신어보고 싶다.

푸른 동시 놀이터 출신인 신소담 그림 작가의 민화도 매력 있게 다가온다.

시집 뒤에는 여러 종류의 바람과 구름, 다른 나라 신발 등에 대한 정보도 해설로 덧붙여 있다.

신발이 의미하는 여러 가지 뜻을 찾아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김이삭 시인의 <<폴짝폴짝 신발 여행>>이 바람과 구름을 따라

세계 여러 나라 여행길에 오르기를 바란다.


꽃신은 꿈을 품고 있어.//사뿐사뿐 걸으면/길들이/활짝 열리고//그 꿈이 형형색색으로/

빛날 때/마침내/꽃신은 꽃가마에서 내려/갓밝이 같은 꽃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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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혼자인 적 없어 열린어린이 동시집 16
이근정 지음, 우민혜 그림 / 열린어린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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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집을 읽으면서 웃고, 놀라고, 기특하고 다양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발랄하고 재치에 깊은 서정까지 책장을 덮고 나니 참 좋았다.

  찬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다시 동시집을 읽고 싶어졌다.

 

나는 햇살 고양이- 마치 낭만 고양이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첫 작품이다.

따끈한 햇살 아래/기지개를 쭉 폈어/유난히 잠이 오더라니/내가 고양이가 되었지 뭐야/나는 빙글 돌아/높은 책상 따위/ 가볍게 뛰어내리지/나른한 휘파람/리듬을 아는 꼬릿짓/지루한 울타리쯤/콧방귀 ‘흥!’ 한 방에 넘는/햇살 고양이에겐/매일이 기분 좋은 날이야

수업 시간에 졸다가 햇살 고양이가 되어 리듬을 타며 자유롭게 넘나드는 순간이 포착되는 기분 좋은 동시다.

아이들에게 해방감을 주는 환한 동시이며, 희망차다.

매일 기분이 좋아진다는 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따라오는 긍정적인 동시다.

 

 

'하울링'- 아들 키우는 엄마의 현장 특파원 같은 문체라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팽이 집안의 반대' - 팽이버섯에 얽힌 한 편의 전래동화 같은 동시가 있고,

'난 혼자인 적 없어'- 혼자 있고 싶어 나간 공원에서 뜻밖에 발견하는 이웃들의 훼방에 안심되는 덜 외로움이 있다.

발랄 *재치를 넘어선 당돌하기까지 한

'잔머리'-를 읽는데 멘탈 강한 학생들이 떠올랐다.

뭐든 자신 있는 아이들, 고민쯤이야 뭐 어때? 고민하지 않는 아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월의 햇살처럼 밝고 화사한 아이들, 명랑운동회 주인공 같은 아이들 -

‘어떠냐 오늘도 멋진 내 더듬이가’

잔머리의 새로운 진화다. 좀 소심하고 우울한 성정의 아이들에게 기분 업 시키는 활기찬 동시다.

'졸음'은 풍선껌처럼 부풀어 오르다 앞에 앉은 연우 뒤통수에 찰싹 붙기도 하고,

'우산 없는 날' 비한테 지르는 와아악도 시원하다.

'층간 소음'의 해법이 되어버린 토끼 슬리퍼- 푹신한 토끼를 신고 깡충깡충 뛰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

'조각구름'이 들어 올린 한 장의 휴지가 땅이 하늘에게 전하는 편지라는 따스한 은유,

걱정인형처럼 '걱정 순무' 심어 놓고 희망을 키우는 다독임,

잘 몰랐던 시인을 알아가는 한 문장들이 겹겹이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시가 잊고 있었던 오감을 이끌어가는

읽었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신선한

이근정 시인의 <난 혼자인 적 없어>

펜데믹이 끝나면, 여럿이 어울려 낭송하고 싶은 동시집이다.

첫사랑이기도 한 <난 혼자인 적 없어>가 세상의 어린이, 어른 독자들 곁으로 햇살 고양이가 되어

찾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잔머리
잔머리 굴리지 말라길래
일부러 더 더
말끔하게 묶은 머리 위로
뿅~~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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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 밥상 내 얼굴 푸른사상 동시선 44
박해경 지음 / 푸른사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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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레 밥상 내 얼굴/ 박해경 / 푸른사상

 

저녁을 준비하면서두레 밥상 내 얼굴을 다시 읽는다. 밥이 뜸 들이는 동안 달걀찜이 익는 고소한 냄새에 배가 고파진다. 이제 곧, 우리 집 밥상에도 얼굴들이 모일 것이다.

동시를 읽는데 시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회탈처럼 늘 웃는 눈이 먼저 나타나고 높고 낮음이 분명한 울산 사투리가 매력적인 모습이 웃게 한다. 그런 시인이 차려 놓은 밥상은 대가족용이다. 고모, 작은 아버지, 큰 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아계신다. 외갓집 식구들도 빼놓지 않았고 또 다른 이웃들도 초대했다.

소재가 다양하고 경상도 사투리의 투박하면서도 밝은 톤이 읽는 즐거움을 준다.

 

가족들이 모여 앉은 식탁이 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때로는 엄마 아빠가 연속극 돈꽃으로도 싸운다. 서로 의견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함께 보았다는 것이 화목한 가족임을 일깨워준다. 연속극을 보면서 티격태격하는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다툼이 웃음 짓게 한다.


엄마 아빠 꽃을 보며 싸운다//적당히 있으면 /좋겠다는 아빠//무슨 바보 같은 소리/많아서 처치 곤란했으면/좋겠다는 엄마 //김칫국부터 마시며/엄마 아빠의 /신경전은 팽팽/끊어질 듯하다.//향기도 없이/ 혼자 떠들고 있는/ 텔레비전 연속극 돈꽃.//

- <돈꽃> 전문-

 

동시집 주인공들은 부유하고 편안하고 세련된 구성원들이 아니다. 뒤처지고 못난 친척들도 있고 외롭게 지내다 병이 든 돌보아 할 가족의 걱정거리들이 들어있다.


혼자 지내던 /외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중략>외할아버지가 깨어나자/엄마는 까만 눈물을 흘렸다./힘들어도 견디다/마음이 타 버린/엄마가 흘리는 눈물은/까맣다는 걸 알았다//

- <엄마 눈물은 까맣다> 중에서 -

어떤 이유로 혼자 사시는 걸까? 혼자의 삶이 결국은 병을 몰고 온 것은 아닐까? 아픈 외할아버지를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읽는 것만으로 마음이 슬퍼진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엄마의 눈물이 까맣다는 표현은 그대로 다가온다.

 

늦가을 호박 보며/시집 못 간 고모라고/놀리는 우리 할아버지// 혼자 남을/할아버지 생각에//호박처럼//퉁퉁 붓도록 우는 고모//

- <호박> 전문 -

할아버지는 고모가 시집가는 걸 바라고, 고모는 혼자 남겨질 할아버지 걱정에 울고, 문제해결이 간단할 것 같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은 현실이다.

고모가 할아버지를 덜 걱정하고 할아버지는 고모가 좋은 사람 만나 화목한 가정의 일원이 되기를 상상해 본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행복한 미래가 펼쳐지기를 바란다.

 

취업한 고모/할아버지께 전화한다//“아버지 저 드디어 취업했어요/ 오랫동안 걱정 많이 하셨죠?/첫 월급 받으면 빨간 내복 사 드릴게요.”//“고맙다, 정말 잘했구나.”//손전화기를 타고 들리는/울먹이는 할아버지 목소리//

- <정말 잘했구나!> 전문 -

취업에 성공한 고모의 전화를 받고 울먹이는 할아버지는 빨간 내복을 받으면 펑펑 눈물 흘릴지도 모르겠다. 취업한 고모가 가족이란 울타리 속에서 힘든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응원한다. 기쁜 일들을 나누면서 할아버지의 행복지수가 올라가기를 바란다.

 

2018년은 제주 43항쟁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푸른 아동청소년 문학회 세미나에서 제주 43항쟁 공부를 하고 후기를 쓰느라 가슴이 먹먹했던 시간을 보냈다.

-제주 43항쟁 추모시- 부제가 있는 가족이야기들 중 가장 확산된 범위의 아픈 역사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웃들의 이야기 시에 시선이 머문다. 시간이 흘러도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가족들에게 작은 토닥거림이 전해져온다.

너와 나의 가족들이 더불어 행복해야 밝은 세상이 될 것이다.


멀리 바닷가에서 들리는/총소리에/흙 가득 묻은/흰 고무신 그대로 신고/어디론가 뛰어나가던 하르방/돌아서서 손 흔들며/“강생아 집 잘 지키고 있어라/일찍 돌아와 밥 줄게.”/약속해 놓고/돌아오지 않아요//강생이는/붉게 지는 노을 바라보며/바람에 실려 오는/비릿한 냄새에/하얗게 피어나던/감귤꽃은 돌아오지 않을/하르방 손길/그리워하다 시들었어요.//

-<감귤꽃> 전문 -

 

조금씩 닮은 모습의 식구들이 모여서 엄마 밥상으로 집 밥을 먹는 장면처럼 따스한 동시를 읽는 동안 오늘을 열심히 살아낸 가족들이 모였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새로 지은 밥 위에 생선살을 올려주고 달걀찜을 듬뿍 떠서 내미는 밥상위의 힘으로 거친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닮아 있어 정겹고 비슷한 성격이라 짜증나기도 한 가족의 얼굴과 행동들도 한 번쯤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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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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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 /창비

 

 

삶과 작품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정미경 작고 소설가의 소설집을 읽는다.
밖은 꽁꽁 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세먼지는 살아 있다는 겨울 한 복판에서 이 세상에 없는 여류 소설가, 작고 1주기를 기념해 나온 소설집을 읽는다.
문장들이 정교하고 깔끔해서 빈틈이 없어 보이는 건조체다. 조금은 인간적이기도 하지만 규격이 정확한 격자창같은 문체다.


'못', '엄마, 나는 바보예요', '새벽까지 희미하게', '목 놓아 우네', '장마'.
 4개의 단편이다. 추모산문은 정지아 정이현 작가와 남편이자 문학 동기인 김병종 화가가 썼다. 남편의 애끓는 심정이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제목 그대로가 읽혀진다. 서서 쓰는 책상이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치열한 작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방배동 지하 작업실의 풍경이 떠오른다.


작가는 작품 속 누구를 닮았을까? 혼자서 유추해보다가 복합적 인물에 들어있다는 결론을 짓는다. 말미엔 백지연 평론가의 해설이 함께 엮어졌다. 예전에 무심하게 읽었던 작가의 작품들을 다시 읽고 싶어져서 목록을 체크해 두었다.


휘리릭 읽고나면 희미한 선이 그려진다. 꼼꼼히 읽어야만 행간의 숨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편집이다. 4편의 단편 중에서 '송이'의 캐릭터가 마음을 사로잡은 표제작 '새벽까지 희미하게'가 오래 남았다. 제16회 황순원 문학상 최종후보작이기도 했다는데 인간의 쓸쓸함을 간결하게 내보이는 듯하다. 고통의 결을 동심의 축을 흔들며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에 오래 남을 송이의 행동, 전능한 시각으로 감싸는 유석의 다정함이 스며든다.


작품을 쓰기 전 자료 조사를 백과사전급으로 한다는 작가의 전문적인 지식이 엿보이는 '새벽까지 희미하게' 속 화자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소기업 젊은 사원들이다. 콘텐츠를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과정에서 자본의 갑질을 당하고 젊음을 저당잡히기도 한다.


언젠가는 그곳 얘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보고 싶긴 해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을 테니까. 캐릭터는 다 만들어놨는데, 별명도 있어요. 알고보면소심생이, 입냄새대박, 수전노, 어차피대머리, 아, 그분들이 이 기사 보면 안되는데.(웃음) p117


아동문학으로 변주되는 구절에서 눈길이 멈췄다. 그림책에는 안 어울릴법한 별명들이 웃음을 준다.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별명이면서 아이들이 놀릴 때 비속어로 지원되는 독특한 이름들을 지어낸 작가의 반전이 새롭게 읽힌 구절이다.


하나 있는 남동생이 장애가 있다는 얘기, 지금 엄마와는 같이 살지 않는다는 얘기, 아버지도 동생도 가끔은 저도 모르게 송이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얘기, 동생은 안 보이니 그런다지만 아버지가 눈 번히 뜨고 그럴 땐 참 무어라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얘기. 뭐 그런 것들. 송이가 아줌마도 미혼모도 아니라는 얘길 사무실 여우들에게 해주진 않았다. 유석이 보기엔 그게 그거였다. 그나마 송이의 아버지는 구치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는데 유석의 아버지는 다시 병원에 들어갔고 엄마는 치킨집 주방보조마저 내려놓고 간병을 하러 따라갔다. 뭐 그런 얘기도.

p119


숨이 턱 막힌다. 송이가 짊어져야 하는 이 무거운 십자가를 어찌 지고 가라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생을 통과하는 창의성 넘치는 송이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송이 편이 되어주는 유석 사장님이 고맙다.


밤의 놀이터에서 밤보다 짙은 썬글라스를 쓰고 울퉁불퉁한 모과나무를 껴안고 있는 송이, 운영자로서 한계를 통감하며 찬 미끄럼틀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유석, 옷소매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속마음을 털어놓지만 바닥을 치지는 못하는 두 사람의 배경이 처절해서 눈물이 났다. 청소년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캐릭터처럼 두서없는 주인공들의 살아있는 행동들이 맘에 들었다.

 
자본주의 본질을 직통으로 들어간 작가라는 평처럼 어떤 수식도 거부하는 단 한순간의 삶도 단 한 줄의 문장도 대충 쓰지 못했다는 정미경 작가에 대한 생각의 끈을 길게 잡고 있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명징한 제목은 아니지만 마지막 구절을 빌려보자면,
'새벽까지 희미하게 떠 있던 달만큼이나.' 시적허용으로 치부하자는 송이의 귓속말이 들리는 듯하다. 세상속의 수많은 송이와 머리를 싸매고 있을 유석에게 따뜻한 모과차 한 잔 전하고 싶은 계절이다.


일년 하고도 삼개월 아버지 없는 시간을 헤아리며 새삼 슬픈 저녁이다.
엄마의 밥상을 잃은 두 아들, 아내의 밥상을 잃은 남편과 소설밥상을 잃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 깊은 슬픔을 나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따스한 밥상 앞에 두고 평화롭기를!

시간 엄청 걸리긴 해요. 조금만 타협하면 진도도 빠르고 편해 지는 것 아는데 그냥 다 만들어요. 제 손이 이래요. 찍히고 데고 피가 나고 하고 있을 땐 몰라요. 제가 현실에서도 많이 무뎌요. 원래 무뎠나? 그렇기도 했겠지만 둔감해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굴곡이 좀 있었으니까.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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