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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평점 :
정미경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 /창비
삶과 작품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정미경 작고 소설가의 소설집을 읽는다.
밖은 꽁꽁 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세먼지는 살아 있다는 겨울 한 복판에서 이 세상에 없는 여류 소설가, 작고 1주기를 기념해 나온 소설집을 읽는다.
문장들이 정교하고 깔끔해서 빈틈이 없어 보이는 건조체다. 조금은 인간적이기도 하지만 규격이 정확한 격자창같은 문체다.
'못', '엄마, 나는 바보예요', '새벽까지 희미하게', '목 놓아 우네', '장마'.
4개의 단편이다. 추모산문은 정지아 정이현 작가와 남편이자 문학 동기인 김병종 화가가 썼다. 남편의 애끓는 심정이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제목 그대로가 읽혀진다. 서서 쓰는 책상이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치열한 작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방배동 지하 작업실의 풍경이 떠오른다.
작가는 작품 속 누구를 닮았을까? 혼자서 유추해보다가 복합적 인물에 들어있다는 결론을 짓는다. 말미엔 백지연 평론가의 해설이 함께 엮어졌다. 예전에 무심하게 읽었던 작가의 작품들을 다시 읽고 싶어져서 목록을 체크해 두었다.
휘리릭 읽고나면 희미한 선이 그려진다. 꼼꼼히 읽어야만 행간의 숨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편집이다. 4편의 단편 중에서 '송이'의 캐릭터가 마음을 사로잡은 표제작 '새벽까지 희미하게'가 오래 남았다. 제16회 황순원 문학상 최종후보작이기도 했다는데 인간의 쓸쓸함을 간결하게 내보이는 듯하다. 고통의 결을 동심의 축을 흔들며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에 오래 남을 송이의 행동, 전능한 시각으로 감싸는 유석의 다정함이 스며든다.
작품을 쓰기 전 자료 조사를 백과사전급으로 한다는 작가의 전문적인 지식이 엿보이는 '새벽까지 희미하게' 속 화자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소기업 젊은 사원들이다. 콘텐츠를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과정에서 자본의 갑질을 당하고 젊음을 저당잡히기도 한다.
언젠가는 그곳 얘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보고 싶긴 해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을 테니까. 캐릭터는 다 만들어놨는데, 별명도 있어요. 알고보면소심생이, 입냄새대박, 수전노, 어차피대머리, 아, 그분들이 이 기사 보면 안되는데.(웃음) p117
아동문학으로 변주되는 구절에서 눈길이 멈췄다. 그림책에는 안 어울릴법한 별명들이 웃음을 준다.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별명이면서 아이들이 놀릴 때 비속어로 지원되는 독특한 이름들을 지어낸 작가의 반전이 새롭게 읽힌 구절이다.
하나 있는 남동생이 장애가 있다는 얘기, 지금 엄마와는 같이 살지 않는다는 얘기, 아버지도 동생도 가끔은 저도 모르게 송이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얘기, 동생은 안 보이니 그런다지만 아버지가 눈 번히 뜨고 그럴 땐 참 무어라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얘기. 뭐 그런 것들. 송이가 아줌마도 미혼모도 아니라는 얘길 사무실 여우들에게 해주진 않았다. 유석이 보기엔 그게 그거였다. 그나마 송이의 아버지는 구치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는데 유석의 아버지는 다시 병원에 들어갔고 엄마는 치킨집 주방보조마저 내려놓고 간병을 하러 따라갔다. 뭐 그런 얘기도.
p119
숨이 턱 막힌다. 송이가 짊어져야 하는 이 무거운 십자가를 어찌 지고 가라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생을 통과하는 창의성 넘치는 송이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송이 편이 되어주는 유석 사장님이 고맙다.
밤의 놀이터에서 밤보다 짙은 썬글라스를 쓰고 울퉁불퉁한 모과나무를 껴안고 있는 송이, 운영자로서 한계를 통감하며 찬 미끄럼틀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유석, 옷소매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속마음을 털어놓지만 바닥을 치지는 못하는 두 사람의 배경이 처절해서 눈물이 났다. 청소년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캐릭터처럼 두서없는 주인공들의 살아있는 행동들이 맘에 들었다.
자본주의 본질을 직통으로 들어간 작가라는 평처럼 어떤 수식도 거부하는 단 한순간의 삶도 단 한 줄의 문장도 대충 쓰지 못했다는 정미경 작가에 대한 생각의 끈을 길게 잡고 있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명징한 제목은 아니지만 마지막 구절을 빌려보자면,
'새벽까지 희미하게 떠 있던 달만큼이나.' 시적허용으로 치부하자는 송이의 귓속말이 들리는 듯하다. 세상속의 수많은 송이와 머리를 싸매고 있을 유석에게 따뜻한 모과차 한 잔 전하고 싶은 계절이다.
일년 하고도 삼개월 아버지 없는 시간을 헤아리며 새삼 슬픈 저녁이다.
엄마의 밥상을 잃은 두 아들, 아내의 밥상을 잃은 남편과 소설밥상을 잃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 깊은 슬픔을 나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따스한 밥상 앞에 두고 평화롭기를!
시간 엄청 걸리긴 해요. 조금만 타협하면 진도도 빠르고 편해 지는 것 아는데 그냥 다 만들어요. 제 손이 이래요. 찍히고 데고 피가 나고 하고 있을 땐 몰라요. 제가 현실에서도 많이 무뎌요. 원래 무뎠나? 그렇기도 했겠지만 둔감해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굴곡이 좀 있었으니까.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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