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야기 - 신들과 전쟁, 기사들의 시대
안인희 지음 / 지식서재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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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까지는 곧잘하던 역사를 고등학생이 되면서 포기한 안타까운 기억이 나에게는 있다. 고등학교 참고서에 나오는 보조자료를 모두 다 외우고야 말겠다는 치기어린 도전정신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모든 연도를 외워서 연대기처럼 줄줄 꿰고야 말겠다는 지적 능력에 대한 오만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너무 많은 연도를 외우다 역사책에서 나는 길을 잃고 말았던 거다. 수없이 많은 사건들 앞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고 그 후론 역사서를 별로 뒤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 역사서를 재미있게 봤던 두 번의 경험이 있었다. 하나는 대학 때, 세계사 시간에 들었던 로마사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정조에 대해 공부하면서였다. 두 공부의 특징은, 그냥 읽기였다. 연도를 버리고 그냥 읽어서 지나가 버리는 것. 자꾸 읽으면서 잊을 만하면 연도가 채워지고 전체 사건의 맥이 서는 그런 역사서 읽기였다.

그런데 이번에 '중세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좀더 명료하게 알게 됐다. 그 두 번의 공부가 재미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역사서를 읽으면서는 연도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꿰는 이야기의 틀을 세우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역사 공부의 핵심이 그런 뼈대 세우기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 뼈대를 내가 세우는 것과 저자가 세워주는 것은 달랐다. 내가 그 뼈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공력이 들었는데, 이 책에서는 저자가 그 뼈대를 발라 내 수저에 얹어주고 있었던 거다.

안인희 님의 중세 이야기 첫머리에는 유럽의 고대와 중세를 꿰뚫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틀을 세우는 것이 본인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연유임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로만 하는 주장이 아니라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기술 방법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여러 권의 중세 관련 책을 읽으면서 복잡했던 머릿 속이 환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유튜브를 보고 여러 권의 책을 읽어도 잡히지 않던 중세의 복잡한 종족들이 쉽게 파악되자, 동고트, 서고트, 프랑크, 훈족, 반달족... 그게 그거 같던 종족들이 실은 '게르만=오랑캐'라는 등식으로 정리되면서 이 책을 좀더 꼭꼭 씹어 읽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이 중세에 관심을 막 갖게 된 독자에게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정말 그런 점에서 참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중세 관련 책을 읽은 사람에게도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전체를 일목 요연하게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지점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수록된 지도나 그림도 참 적절했다. 왕왕 역사서들에서는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개략적인 지도나 그림이 실려 있는데, 그것이 지면의 내용과는 유리된 것들이 제시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책에는 본문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도판이 촘촘이 실려 있다. 편집진이 꽤나 신경써서 책을 다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그림과 역사를 맞추어 읽다 보니, 역사적 자료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나 건축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꽤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표지는 얇게 비닐 코팅이 돼 있다. 굳이 책 싸는 비닐을 구매해서 포장해 들고 다니며 책을 읽는 나에게는 이런 코팅이 꽤나 고맙고 매력적이었다. 표지 도안도 중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멋진 것이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컬러 도판이 많이 담겨 있는 것도 꽤나 좋았고 종이질도 고급스러웠다. 형광펜으로 그어도 뒷면으로 잉크가 배어나와 보이지 않고 연필로 행간에 글씨를 적어 넣어도 될 만큼의 충분한 여백이 있었다. 글자의 폰트가 조금 작은 것은 그런 배려에서 비롯된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웬만하면 별점 다섯을 팍팍 주지 않는 나의 자린고비 평점을 팍팍 다섯 개 다 준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오랜만에 책을 읽는 묘미를 느낄 수 있었던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남경필 선생의 작품에서 느꼈던 것과 또 다른 씹는 맛이 있는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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