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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평점 :
최근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다.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에워 싸는 상황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말과 백성들이 모두 자멸해 간다. 결국 왕이 청나라 칸황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데 결정적인 요인은 대포공격으로 인한 남한산성 붕괴였지만, 더 처참했던 것은 바로 추위와 굶주림이었다.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 _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래서 일까?
이 책이 당연하고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군대 보급대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에, 군복무시절 식사메뉴가 무엇이냐에 따라 내무반 분위기가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한 기억 때문에, 이 책에 더 쉽게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시점이 취사병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을 무대로 현대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미스터리 소설이다. 그것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베를린진격까지를 주 배경으로 긴박한 순간들을 그려내고 있으며, 약간의 미스터리 추리가 가미된 형식이다.
전쟁터, 군대라는 공간에서 군인이기 때문에 마주치게 되는 사건들 속에서 전쟁은 계속된다. 동료였던 이들이 하나 둘 죽어가고, 의무병을 찾지만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서 미처 다 손을 쓰지 못하고, 마침내 그 동료들이 죽어간다. 그리고 그 슬픔과 복수심에 부상당한 독일군 병사를 찾아내 죽이는 주인공 모습까지 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전쟁의 처참함이 담겨 있지만, 그 속의 주인공 콜 키드는 공수부대로 입대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고 할머니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전쟁터에서 전투와 요리사로서 임무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콜 키드와 동료들은 전선에서 죽음과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겨내가며 서서히 전쟁이라는 상황에 적응하게 된다. 일상적인 전쟁에서 여러가지 미스테리한 일들이 펼쳐지는데, 쓰고 난 낙하산을 모으는 병사,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600상자 분량의 분말 달걀의 행방, 네덜란드 시가지전에서 만난 이상한 죽음, 추위에서 떠도는 유령의 정체등 여러가지 기이한 상황을 에드와 키드는 해결해 나간다. 일종의 셜록과 왓슨의 콤비 같은 느낌도 가질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쟁 후였다. 영화 <덩케르크>가 떠올랐다. 노르망디 전투 이후 복귀할 때 패잔병이라고, 도망쳐왔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살아왔다는 죄의식에 빠져 긴장하다가 피곤한 잠을 못 이루던 주인공들 그리고 고향역에 도착했을 때의 풍경에서 오는 충격받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광경은 이 책에도 나타나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풍경이 가짜일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어났더니 또 여느 때와 같은 전쟁터더라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광장의 분수, 벤치에 누워 무방비하게 자는 노인, 인도 곳곳에 떨어진 담배꽁초. 꽁초가 이렇게나 많으면 분명 아이들이 떼로 몰려들어 주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아이도 달려오지 않았다. 울면서 부모를 찾지도 않고, 우리가 준 초콜릿이며 비스킷을 게걸스레 먹지도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거대한 분홍색 아이스크림 모양 간판이 광고탑 위에 붙어 있었다. 깨끗한 쇼윈도, 네온사인,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 청결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러고 보니 좋은 냄새가 나는 여자도 오랜만이었다.
평화롭다. 이게 바로 평화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싸웠다.
그렇건만 이 허무함은 뭔가? --- p.500
그리고 시간이 훌쩍 뛰어 넘어 에필로그가 나온다. 머리가 하얗게 새고 만나게 되는 전우들. 그리고 조금씩 잊고 잊혀져 가면서 저마다의 길을 걷게 된다. 미지근한 커피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온기를 유지하면서.
동료들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그렇게 위험에 가득 찬 시간을 함께 보내고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게 된 사람, 크리스마스 카드만 주고받게 된 사람,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비록 극히 소수이기는 해도 몇 년에 한 번은 추억을 나누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 p.511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한번 한 행동은 영원히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어렸을 때 흑인들을 조롱하는 낙서를 했을 때처럼 나는 디에고에게 상처를 주고 끝내 용서받지 못했다. 그리고 에드의 죽음을 회피하지도 못했다. 적병도 수없이 죽였다. 한번은 상대가 항복했는데도 총을 쐈다. 빼앗은 목숨, 구한 목숨, 모욕을 주고 만 목숨. 세고 들자면 끝이 없지만 그렇다고 아픔이 마비되는 일은 없었다. - p. 522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다. 시간이 지나면 명백한 과오조차 정당화한다. 누군가가 이기면 누군가는 지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를 다른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가 쳐부순다. 그렇게 해서 증오는 연쇄된다. 세상은 백도 흑도 아니다. 회색의 세계다. 이 흐린 하늘처럼 명암이 변덕스레 바뀌는, 잔인하고 아름다우며 향수를 자극하는 회색이 한없이, 한없이 뒤덮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 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