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의 가장자리 - 부서진 유년의 파편에서 출현한 신경과학자 이야기
데이비드 수실로 지음, 이충호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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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 과정 동안 내가 마주한 세계는 직경 수 센티미터의 투명한 플라스틱 웰 플레이트 속에 있었다. 태아 생쥐의 뇌에서 분리한 신경세포들을 체외 환경에서 배양하고, 그것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 그리고 그 유약한 신경망에 약물을 투여했을 때의 변화를 정량화하는 것이 내 석사학위 논문의 전부였다. 당시 나를 괴롭혔던 것은 생명체의 '불확실성'이었다. 세포들은 매번 동일한 조건에서도 어떤 날은 역동적이었고 어떤 날은 사멸했다. 통제 불가능한 이 무질서는 내게 스트레스의 근원이었다.

세계적인 계산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수실로의 회고록 <카오스의 가장자리>를 읽으며 나는 강렬한 데자뷔를 느꼈다. 부모의 약물 중독과 방임, 보육원을 전전한 저자의 유년기는 독성 약물에 파괴되던 나의 세포들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창발', 하위의 단순한 개별 요소들이 결합하여 상위의 완전히 새로운 고차원적 지능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통해 삶의 절망을 과학적 경외감으로 승화시킨다. ‘어떻게 그 악조건을 뚫고 성공했는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뇌 속 뉴런들이 얽혀 '생각'을 창발하듯, 유년의 상처와 우연, 호기심이 교차하며 '나라는 자아'를 창발해냈다고 답한다. 낡은 컴퓨터라는 질서 속에서 코딩을 배우며 구글과 메타의 수석과학자로 스스로를 진화시킨 것이다.

현재 바이오 스타트업의 품질관리(QC) 팀장으로 일하며 나는 매일 '질서와 통제'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의약품 안전성을 위해 모든 공정을 규격화하는 것이 내 일이다. 하지만 저자의 메시지를 마주하며 품질관리 이면의 본질을 깨닫는다. 인공 신경망이든 우리의 삶이든, 완전히 고정된 질서도 무너진 무질서도 아닌 그 경계면인 '카오스의 가장자리'에 있을 때 가장 풍부한 지능을 창발한다. 너무 많은 통제 속에서는 아무것도 창발하지 않으며, 통제가 없으면 무너진다. 생명과 인간의 영혼은 오직 이 위태로운 경계면 위에서만 역동적으로 성장한다.

비슷한 상처를 공유했으나 비선형적인 삶의 경로 속에서 비극적인 궤적을 살다간 저자의 누나 이야기를 보며 생명을 대하던 숙연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자는 우리의 상처가 성취로 지워지지는 않지만, 그 상처마저 나를 구성하는 복잡계의 일부로 껴안을 때 진정한 자아가 창발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복잡계 과학의 언어로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스스로 삶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뜨거운 고백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과거의 불행이라는 초기 조건이 삶을 완전히 결정짓지 않으며, 인간은 혼돈 속에서도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복잡계 존재라는 점을 배웠다. 그리고 품질관리 업무와 일상의 변동성 앞에서도 완벽한 통제 대신 '카오스의 가장자리'가 가진 역동성을 포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성취와 성장이 창발된다는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리뷰는 리앤프리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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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진원 옮김 / 까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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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든 깊은 밤, 붉은 응급실 불빛 아래서 숨을 헐떡이는 반려견과 반려묘들의 눈을 바라보며 사투를 벌인다. 주말 야간당직 수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가장 치열한 생명의 전선을 지키는 일이다. 긴박한 응급 처치가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새벽녘, 동물의 생로병사를 돌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생물학의 뿌리라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궁금하지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외웠던자연선택이나핀치새 부리같은 파편적인 기억으로만 남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 책을 읽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이다.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종의 기원>에 대한 명쾌한 답으로 최고였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쓴 진짜 목적은 생물학의 모든 복잡한 수수께끼를 단 하나의 단순한 이론으로 설명하는 통일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윈이 책의 전반부에서 사육 동물과 품종 개량 이야기를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인간이 목적을 갖고 형질을 솎아내는인위선택을 징검다리 삼아, 대자연 역시 환경에 적응한 개체만을 남기는 단 하나의 원리인자연선택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주말 야간당직을 서며 조우하는 수많은 품종견들의 유전적 다양성과 특이 질환들이 다윈의 품종 개량 논리와 겹쳐 보이며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과연 <종의 기원>은 종교를 부정하는 차가운과학인가, 아니면 새로운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신학인가? 저자가 요약해 준 다윈의 진짜 속내는 흥미롭게도 그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 다윈은 신이 지구상의 수백만 종을 일일이 빚어냈다는 문자 그대로의 신학을 반박했지만, 신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능한 창조주라면 생명체 하나하나를 번거롭게 직접 만들기보다, ‘자연선택이라는 단 하나의 위대한 법칙을 세워 생물이 환경에 맞춰 스스로 변형되도록 설계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 다윈에게 진화론은 신의 설계를 정교한 과학의 언어로 번역해 낸 일종의새로운 신학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이 거대한 과학적, 신학적 가설을 현대 멘델 유전학과 게놈(DNA) 데이터로 완벽하게 보완하며, 고전이 어떻게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숨 쉬는 지성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행성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도는 동안, 생명은 그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형태로 끝없이 진화해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종의 기원>의 이 최고의 한 문장이 주는 전율은 대단했다. 인간보다 수만 배 뛰어난 개나 고양이의 감각은 누군가 급조해 낸 열등하거나 우월한 피조물이 아니다.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 출발해, 대자연이 허락한 법칙 안에서 스스로 아름답게 적응해 낸 경이로운 진화의 증거들이다

<종의 기원>이라는 고전 읽기에 도전할 용기와 시간을 내지 못했던 바쁜 현대인들과 생명의 가치를 깊이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단시간에 진화론의 핵심 논리를 완벽히 마스터하는 지적 교양을 얻을 수 있고, 현대 과학으로 살아 숨 쉬는 고전의 가치와 생명을 향한 깊은 경외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윈이 꿈꾸었던 위대한 법칙 속에서 내 손을 거쳐 가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향한 깊은 겸손함을 다시금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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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숨 섬 - 마음을 찾는 사람들
김한수 지음 / 생각정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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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만 보고 달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50대 중반, 성실한 직장인으로 버티며 가장으로서 가족의 울타리를 단단히 지키는 것이 내 삶의 전부이다. 매일 밀려오는 피로는 꾹 참았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 사치라 여겼다. 돌볼 겨를 없이, 아니 실은 내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렇게 나를 지우며 살았다.

이유 없는 무력감과 번아웃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자부했는데, 정작 집 안에서 나는 점점 더 외로워졌고 사소한 일에 날카로워졌다. ‘내가 왜 이러지?’ 하는 혼란 속에서 방황한다. <쉼 숨 섬>을 읽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내 영혼을 향한 다정한 노크이자 마음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을 향한 치유의 손길이다.

삶이 흔들릴 때,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열심히 사는 법'이 아니라 다시 '나를 만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남들의 속도에 맞춰 뛰느라 내 숨이 어떤지도 잊고 살아가던 나에게, 책은 거창한 해답 대신 우선 잠시 멈추고 쉬어보라는 평범하면서도 강력한 말을 건낸다.

가장 먼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문장은에 관한 통찰이었다.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더는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동안 내가 생각한 쉼은 주말에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일시적인 기능 정지에 불과했다. 휴일에도 머릿속은 업무 계획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걷기 위한 거룩한 도약이며, 내 몸과 마음에 진정한 정지 버튼을 눌러야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는 문장을 새긴다.

그 다음 메시지는이었다. 책 속의 마음 전문가들은 생각은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지만, 숨은 언제나 현재에 머문다고 말한다. 가만히 손을 가슴에 얹고 느껴본 내 숨은 늘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거창한 수련이 아니라 한 호흡으로 현재에 돌아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알아차림만으로도 평정심을 찾을 수 있다는 조언에 따라 깊은 숨을 내뱉자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마지막 단어인에 이르렀을 때 공감의 눈물이 흐른다. 섬을 주변의 소음에서 벗어나 마침내 내 삶의 중심에 홀로 서는 독립적인 마음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내게는 나만의 섬이 없었다. 회사와 집에서 늘 누군가의 기대를 채워주기 바쁜관계의 중심에만 서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오롯이라는 존재 자체로 머무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독립적인 공간이 내게는 절실했던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 마음을 잘 돌보라고 나직이 속삭인다. 내가 먼저 행복해야 내 가정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희생하고 참아야 가정이 평안 해진다고 믿었다. 메마른 마음으로 주는 사랑은 단단할지 언정 따뜻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이 황폐해져 가는데 어떻게 가족들에게 울창한 그늘을 내어줄 수 있었겠는가.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온전하게 사랑하기 위한 가장 먼저의 준비 의식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매일 조금씩 나만의쉼 숨 섬을 찾는다. 아침에 일어나 내 호흡에 집중하는 숨을 쉬고, 퇴근길에는 나만의 섬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모든 삶의 의문과 괴로움을 넘어서는 힘은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이정표 삼아, 이제라도 내 마음을 돌볼 것이다. 비로소 나의 일터도, 그리고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나의 소중한 가정도 진정한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 차오를 것이라 확신한다.

번아웃을 겪으면서도 차마 멈추지 못하는 이 시대의 모든 직장인과 가장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27명의 현자들이 건네는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타인의 속도에 흽쓸리지 않고 스스로 숨을 고르며 마침내 내면의 평정과 진정한 일상의 안식처를 되찾는 마음 돌봄의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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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 인류세 - 인간과 생태계를 잇는, 인류학의 새로운 자연사
애나 로웬하웁트 칭 외 지음, 김희정 옮김 / 해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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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로 살아온 지 어느덧 서른 해가 다 되어간다. 젊은 시절엔 그저 내 눈앞의 아픈 동물 한 마리를 살리는 것이 내 소명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경륜이 쌓일수록 동물의 질병이 결코 그 개체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동물병원의 진료실은 거대한 생태계의 모순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곳이다. 그런 나에게 <패치 인류세》> 큰 충격이자 깊은 공감을 주는 책이었다. 특히패치(Patchy)’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꽂혔다.

책이 던지는 첫 번째 핵심은인류세의 재난은 전 지구에 균일하게 오지 않으며, 인간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쪼개어 만든 조각보(패치) 위에서 저마다 다른 비극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최근 발생한 네팔 대홍수 참사는 이 불균형한 현실을 증명하는 참혹한 증거다. 탄소 배출량의 0.1%도 책임지지 않는 최빈국 네팔이, 선진국들이 데워 놓은 지구 온난화의 직격탄을 맞아 히말라야 빙하 붕괴와 초대형 돌발 홍수라는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의 생태 위기를 인간만의 역사로 보지 않고, 인간과 동물, 식물, 미생물, 그리고 환경이 촘촘하게 얽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다종(Multispecies)의 연쇄 반응'으로 진단한다. 인간이 파괴한 기후 환경은 히말라야 고산 지대의 식생을 뒤흔들고 빙하를 녹였으며, 그 홍수는 인간의 인프라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터전을 잡고 살던 야생동물과 미생물의 생태계까지 단숨에 집어삼켰다. 인간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패치의 틈새에서, 바이러스와 해충 같은 비인간 존재들이 인간의 설계를 이탈해 자율적인 역공을 시작하는 메커니즘도 바로 이러한 사슬에서 비롯된다. 콘크리트 벽과 첨단 기술로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이 얼마나 무력한 계산이었는지를 지구는 다종의 붕괴라는 재난의 형태로 경고하고 있다.

수의사인 나의 관점에서 이것은 지구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보내는 격렬한 면역 반응이다. 인간이 고기를 값싸고 빠르게 얻기 위해 설계한 밀집형 공장식 축사라는패치는 인간의 탐욕, 동물의 고통, 그리고 치명적인 미생물의 변이가 결합하여 공포스러운 전염병의 발원지가 되었고, 도시화로 자연을 지운 아파트 단지라는패치속 동물들은 계절을 잃고 면역 질환에 시달린다. 자본이 이식된 조각보의 틈새마다 생태적 환부가 고름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50대 중반, 책을 읽으며 깊은 부끄러움과 사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책은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인간 너머의 존재들을 동등한 행위자로 인정하며, 이 오염된 세계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시급히 배워야 한다는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현대 수의학이 지향하는원 헬스(One Health)’, 즉 인간과 동물, 환경의 건강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념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우리가 이익을 위해 이어 붙인 이 조각보 같은 세상이 완전히 파열되기 전에, 이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을 동등한 삶의 주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구상에 사는 모든 성인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인간 중심주의라는 오랜 오만을 깨부수고,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비인간 존재들과 대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생태적 해법과 연대의 실마리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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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난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가 - 교육이 답이라는 거짓말
롭 헨더슨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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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50대 중반, 우리는 이른바개천에서 용 난다는 신화의 꼬리를 잡고 태어난 세대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들어가 밤낮없이 일하면 삶이 한 단계씩 위로 격상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숨 가쁘게 달려온 지금 우리 사회를 마주하면 서글픈 현기증이 인다. 자산의 격차는 이미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성벽이 되었고,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보이지 않는 벽은 날이 갈수록 두꺼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롭 헨더슨의 회고록 <산산조각 난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가>는 내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강렬하게 각성시켰다. 한 개천용의 성공담을 넘어, 세습 자본주의의 민 낯을 마주한 우리에게 가슴 시린 이야기를 건넨다. 내 시선이 오래 머문 곳은 아무리 높은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도 유년기에 겪은 관계의 트라우마는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저자의 고백이었다. 자녀에게 더 좋은 학원과 스펙만을 쥐어주려 했던 나의 얕은 시야를 흔들듯, 저자는 안정적인 보살핌과 평온한 가정환경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교육 시스템이 온전히 작동하기 어렵다는 냉혹한 진실을 일깨워준다. 빈곤의 진짜 모습은 물질적 결핍을 넘어 정서적 관계의 상실이라는 성찰이 내 안의 안일한 생각을 따끔하게 꾸짖는다.

경종을 울린 것은 상류층의 기만을 폭로하는 한 문장이었다. 저자는 과거의 상류층이 물질로 부를 과시했다면,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하류층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유행시키며 지위를 과시한다며 이를사치 신념이라 명명한다. 정작 부유층들은 철저하게 안정된 전통적 가정을 꾸리고 자녀에게 엄격한 교육과 훈육을 제공해 부와 학력을 대물림한다는 모순 앞에서는 분노마저 일었다.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이들의 삶을 사지로 내모는 엘리트들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위선 그 자체다.

나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50대의 아비로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부모의 부와 정보력이 자녀의 인생을 결정짓는 룰 속에서,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대에서 간신히 중산층의 턱걸이에 도달하는 것이 전부일지 모른다는 무력감이 밀려온다. 내 아이들은 저 높은 상류층의 반열에 올라 당당하고 여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이 견고한 시스템 앞에서 부모가 부릴 수 있는 가장 간절하고도 애달픈 욕심 섞인 희망일 것이다.

저자의 날카로운 말들은 내가 나아가야 할 길 위에 빛을 밝혀준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상류층의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단순히 더 많은 자산을 쥐고, 기만적인 신념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엘리트가 되는 것이 종착지일까. 나는 여전히 내 아이들이 상류층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을 밟고 올라선 오만한 군림이 아니기를 바란다.

부조리한 벽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묵히 땀 흘려 중산층의 기반을 다진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들은 무너진 이들을 돌아볼 줄 아는 따뜻한 시선과 책임감을 지닌진정한 엘리트로 자라나길 소망한다. 부모의 노력은 단순히 계층의 사다리를 오르는 도구가 아니라,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정서적 안전망이어야 함을 가슴에 새긴다. 자녀의 성공적인 계층 이동을 위해 치열하게 달리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부모와 교육자들에게 마땅히 읽고 가슴에 새겨야 할 지침서다. 우리는 물질적 성취보다 단단한 가정환경이라는 정서적 안전망이 왜 더 중요한지, 그리고 진정한 사회적 리더가 가져야 할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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