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자 극작가 유미리의 신작,

다른 서평들을 두어 개 읽고 나서 이 책을 손에 잡았다. 왜냐하면 책소개를 읽고 슬픔에 잠길까봐, 코로나 블루라도 깊어질까 겁이 나서였다.

'노숙자이면서 노인의 이야기' 는 솔직히 요즘에 읽고 싶던 주제는 아니었기에 책을 받아들고 한참을 몇번을 망설였었다.


하지만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쟂빛 표지 디자인은 내 취향 저격이었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자, 만 이틀만에 읽어내려갈 정도로 사려깊은 문장들이었다.


소리, 화자인 모리 노인에게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 누구인지 정체성과 동일시되는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 그가 죽는 순간의 묘사는 생각과 소리가 분간이 안되는 지점에 있다.


그 소리 나는 듣고 있다. ..또다시 그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만이 피가 통하며 살아 있는 것처럼ㅡ, 선명한 빛깔로 물든 물줄기 같은 소리ㅡ, 그 때는 그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소리는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리는 도쿄 우에노 역에서 왜 자살을 하는가? 아니 무엇이 그가 세상을 등지게 하는가? 그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의 고향은 여기가 아니다. 후쿠시마현 소마군 야사와마을이란 곳에서, 철이 들었을 무렵 전쟁이 터지지고 종전 후에 12살에 동생 일곱명과 부모의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아야 했다. 어촌에서 조개를 잡거나 다시마를 수확하는 일을 할때는 가족과 있었지만, 허리를 다쳐 농사를 짓기 못하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학업을 이어야 하는 동생들을 위해 그는 도쿄로 왔다. 숙식을 해결하며 1964 도쿄올림픽 준비로 각종 체육시설의 토목공사장을 옮겨다니며 중장비를 만져본 적이 없는 그와 같은 시골출신 노동자들은 곡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고 손수레로 나르는 일만을 할 수 있었다.

과거 젊은 시절 열렸던 도쿄올림픽은 그가 70대가 된 2020년이 되어 한번 더 열릴 예정이었고,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모리는 우에노온시 공원의 노숙자가 되어 비닐로 된 지붕과 골판지로 된 천막집에 살며 '특별 청소'라 불리는 강제 퇴거 날이 되면 천막을 해체하고 짐을 싸서 시에서 지시하는 대로 짐표를 붙이고 하루종일 공원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는가? 노숙의 삶은 누구도 일부러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한몸 따스하게 누일 곳에서의 삶을 누가 원하겠는가?

50년이 흐르는 사이 부모 형제가 죽고, 돌아갈 집이 없어진 이 공원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노숙자들

모리는 얼마전에 죽은 동년배의 노숙자 시게를 안 적이 있다. 그는 아마도 머리 쓰는 일을 했던 것 같이 박식한 사람이었고, 누가 시게 천막집에 새끼 고양이를 던져 넣었고 그는 빈 캔을 판돈으로 동물병원에서 중성화 시키고, 애지중지 키우는 '에밀'이라는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반려동물이라는 게 내가 살고, 살만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스스로의 양식 대신 고양이 사료를 먼저 사고 남은 돈으로 먹을 것을 살만큼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었으며 모리는 그 사람의 초대를 받아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었고.

작가는 시게의 입을 빌어, 전쟁 도쿄 대공습의 참혹한 과거를 상기시켰고 모리의 지난 생을 반추하는 것으로 플래시백을 한다.

시게의 비밀이야기를 들을 뻔했지만 모리 자신의 비밀(노숙자가 된 과정)마저 털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자리를 파하고 나왔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시게가 죽었으며 고양이는 생사를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모리 자신이 어쩔 수 없었던 무력감을 투영하는, '노숙자'라는 정체성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사람(인간성)이었지만, 외부인들에게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지붕없는 인간(인간성의 소멸).



자신의 비밀, 아들 고이치가 21세에 자취방에서 홀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주가 되어, 긴 여행(?)에서 잠깐 마을로 돌아온다. 아들딸이 장성할 동안 아내 세쓰코에게 연로한 부모님을 맡겨두고 자식들과 7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했던 아내는 다 키운 아들을 보내며 무너지고, 소마의 토착민들과는 다른 불교 정토진종을 믿는 이주민(가가엣추)이었던 부모님과 함께, 아들의 장례를 불단에서 치르게 된다. 일하러 나가서 가족을 돌보지 못한 20년 동안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고 그런 그에게 아들의 죽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p63

얼굴을 씌운 흰 천을 두손으로 걷는다.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건 갓난아기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봄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노력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느꼈다. 나는 고이치의 죽음을 듣고 나서 노력하고 있다. ..죽고 싶다기보다도 노력하는 데 지쳤다.


우에노 공원에서 그리고 역 주변에서 현재의 모리가 다니는 곳들 곳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의 단편들이 들려오고, 그 소리들은 모리에게 어떤 의미였을 것 같지는 않지만,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 속의 작은 이야기 그러나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집이 있는 사람들과 자신처럼 집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리라. 작가 유미리는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상경 노동자에 대한 인터뷰 외에도 후쿠시마 원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 정토진종 이민 역사 그리고 주지스님과의 인터뷰를 거치며 이 하나의 이야기에 녹여내었다.

그가 60세가 지나 돌아온 그의 고향집, 노쇄한 부모님의 죽음 이후 헌신적인 아내는 7년을 함께 더 보냈지만, 매일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고 곁을 지키던 아내마저 죽음으로써 독자는 가족의 이 두 번째 죽음이 완전히 그를 무너뜨렸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 도쿄올림픽이 열리면서, 벼랑끝에 몰린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라는 정체성은 더이상 고향에 있지 않았고, '집'이란 곳에서 '노력'이라는 것을 놓기에 이른다.

걷고 있었다. 추위와 두통이 몸을 죄어오고 내가 나 자신에게서 밀려나버릴 것 같았으나 다리만큼은 앞으로, 앞으로 내밀었다.

마지막 있던 자리마저, 천황일가의 행차에 막혀 '이동금지' 된다.

수없이 많은 길이 지나갔고 눈앞에 단 하나의 길만 남았다. 그는 승강장으로 내려가며 머릿속으로 갖가지 환영들을 본다. 들리는 소리는 전철의 다가오는 소리였을 뿐이지만, 쓰나미 경보도 들리고 마지막 집에서 함께 살던 손녀와 그녀가 키우던 개를 바다가 집어삼키는 것을.


나는 내가 차별당하고 배제당하는 측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온 세계에 존재하는, 차별당하고 배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사실 작가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오는 몇 안되는 인생작으로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재일교포2세 작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번도 제대로(?)한국인인 적이 없는 그들을 대변하는 유미리. 그녀의 신작이 2020 도쿄 올림픽이 코로나19로 한 해 미루어지고 극적으로 올해에 열리므로써, 재조명 받으며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저자 소개에서 그녀는 논란의 중심, 전미도서상을 탄 이 책을 통해서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이 리뷰는 소미미디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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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immm 2021-10-17 0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이 탁월 합니다.감사 감사
 


소설가 백민석, 그는 인문교양 매거진 《월간 유레카》에 연재되었던 〈백민석의 물음표 미학〉 원고를 모은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을 이번에 출간하셨고 소설가인 그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로 목차를 구성하였다___________




01 자네는 집을 지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02 아빠, 내 이름은 알아?

03 언니, 집 없어요?

04 우리는 왜 매끄러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05 우린 그냥 벌레야, 모르겠니?

06 당신들, 정체가 뭐야?

07 도저히 사람 살 데가 아니더군, 이해하겠나?

08 왜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은 끝났다고 장담하는 거죠?

09 당신은 계속 당신인 거야?

10 선생님은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으세요?

11 많은 재즈 거장들이 요절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12 우리 삶을 충분히 표현하다 보면 나오지 않겠어요?

13 백 년 후엔 이걸 볼 사람도 없을 텐데 왜 모아?

14 함께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15 활동 증명을 통해 예술인으로 인정, 등록되었는가?

16 한국인들이 이 전쟁을 원했단 말인가?

17 어째서 흐르는 피는 남들에게 충격을 줄까?

18 한심한 외다리 꼴로 춤을 왜 추냐고?

19 생각 근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의 말

사실, 질문들을 보면 어느 정도 책에 대한 감(?)이 오는데 전혀 감이 안 온다 ㅠㅠ 즉시 내용으로 다이빙...

...시작부터 단순하지 않은 작품과 심상치 않은 작품의 제목. 인도네시아 작가 F.X. 하르소노의 작품<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은 총 모양으로 만든 핑크색 크래커를 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적당한 거리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놓은 설치미술이다. 관람객이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득고, 노트에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고 그 결과를 적기를 주문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총을 들고 밖으로 나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내버려둘 것인가. 총을 들겠다는 결정을 하자마자 우리는 또 '총이라면'이라는 가정을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게 된다고 한다. 밀가루 음식이라는 총의 물성 때문이다. 관람객들은 머릿속의 사물 개념과 실제하는 사물의 재료에서 괴리를 느낄 것이고 '소비'하면서 그 의미를 '사유'하게 되고 사유의 과정을 통해 '윤리적 판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사유하게 한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까지 예술의 일부이다.

p. 018

저자가 이 책의 전반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이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악몽의 형식으로 형상화해 온 화가 안창홍을 소개하는 저자는 <이름도 없는...>연작을 소개하며 우리가 둥그런 윤곽에 점 두 개와 선 하나가 그려져 있는 것만 보아도 기계적으로 인간의 얼굴이라고 판단하고 이 얼굴들은 정치적 폭력의 희생자들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작품에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기에 우리 현대인들은 다양하게 이를 해석할 수 있는데 고단한 일상을 사는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도 죽은 것 같은 얼굴이 몇쯤 들어 있을 거라고, 종종 이름조차 잃어버린 실존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해석한다. 화가의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저자는 영화<미성년>(2018년, 김윤석 감독) 과 책 <인간증발>(레나 모제, 스테판 르멜,2017년)을 예로 들어, 사회적 관계를 끊고 아프고 괴롭고 수치스러운 이름을 스르로 지워버리는 사회적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들이 흔하게 받게 되는 풍선아트의 롱런아이템을 발견해서 반갑게 한~ <풍선 개>(제프쿤스,www.jeffkoons.com)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주요 작품중의 하나이나, 이 '매끄러움'은 아직 상품과 대중문화의 영역이지 주류는 아니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제독학자 한병철은, 매끄러움은 상품의 미학일 뿐, 긍정적인 즐거운 뿐인 긍정성의 영역이라고 했으며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는 '부정성이 예술의 본질적이라고 보았다고 인용'하고 있다. 제프쿤스의 풍선 개는 사실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져 있고 작품을 만져볼 수 없는 관객들의 눈속임을 통해 흠 하나 없는 표면 아래 매끄러움의 미학에 의해 쫓겨난 육중함, 투박함, 딱딱하고 거침, 비가역성 등의 성질들이 억압되어 잠재되어 있도록 의도한 것. 어쨌거나 '흔한'(대중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했다는 것 자체가 예술로 소통가능한 영역임을 증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생'을 증명할 수 없음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

영화 <가버나움>에서 삶이 파괴되는 인물들은 모두 난민이며 살기 위해 레바논을 선택했지만 주인공 자인의 가족, 라힐의 가족은 레바논에 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그들에게 서류 없는 삶을 인정하고 살든지, 창밖으로 뛰어내리든지 둘 중 하나밖에 없는 현실은 가혹하게 그려진다.


우린 그냥 벌레야, 모르겠니?


매력적인 영상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의 시선에 의해 이 영화는 난민들이 벌레같은 삶을 실제로 산다는 사실을 잊지만 출생 자체가 차별의 대상이고 불법이 되는 가차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윌리엄 포크너의 <윌리엄포크너의 단편소설 中 그날의 저녁놀>에서 흑인은 개인이 아니며 백인에게 개인이라는 독립적 주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부재하며 인종차별을 합리화하는 더욱 비정한 백인의 노예적 위치의 그들을 인용한다.

난 지옥에서 태어났단다. ...나는 곧 사라져버릴 거야

<윌리엄포크너의 단편소설 中 그날의 저녁놀>

또한 차별을 발생시킨 근원에는 동일자와 타자와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고 두 지위는 인종이나 세습 신분처럼 타고난 것도 계급처럼 후천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작위적으로 그어진 경계에 의해 그때그때, 역사적으로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일시적인 지위들이고 인공적인 경계이므로 우리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긍정적인 관계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종말의 상상은 예술의 영원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세계에서 죽는 건 개인이 아닌 인류이다. 2009년 태어난 청년이 살해 당하고 인류가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 뉴스를 지켜보며 비통해하는 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인류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었다면, 이후의 예술과 부는 무슨 소용일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까...주인공 테오는 세계의 걸작 다비드상이 왼쪽 무릎이 사라졌지만 철골로 지탱해 가지고 있으며 바티칸의 피에타 상을 갖고 싶으나 파괴되어 슬퍼하는 그의 형에게 묻는다. 백년 후에 이걸 볼 사람도 없을 텐데 왜 모아? 그러자 형은 난 미래를 생각 안해. 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저자는 인류의 오래된 관념을 끌어낸다. 식물은 사치품이라 제배했으며 인류가 무역을 시작한 것도 흔히 보는 소비재가 아닌 희귀한 장신구를 위한 것이었으며 취향과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들이 예술의 발명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경제적인 부 즉 재산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미적인 물건'이라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에서 시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의 불멸성은 인류가 사라진 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한가? 저자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영화의 결말이 인류의 종말을 멈추게한 의지의 승리였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기후 붕괴와 그에 따른 기근, 올지도 모르는 대공황으로 불안함은 영화와 현실과의 괴리를 깨닫게만 해 줄 뿐이라는 결론없는 질문만이 남게 한다.


저자는 활동 증명을 통해 15장 예술인으로 인정, 등록되는가? 라는 소제목의 본문에서, 예술은 직업이며 일한 만큼 돈을 받길 바라는 것은 공정한 계약과 정당한 작품료를 요구해야 하는 당당한 일로 여겨져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워크플로우>(2020년) 에서 임가영은 예술가-노동자로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플로우 차트로 정리한 작품을 전시했다.

예술가는 작품을 창작, 생산하는 과정을 통해 이미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

나도 증명을 했고 예술인으로 등록됐다.

p197


영화 <핀란드 메탈밴드>는 작품의 완성에 이르는 지난한 우여곡절을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드러머를 무덤에서 파내고 전쟁을 낼 뻔한 또라이 핀란드 메탈밴드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들은, 시골마을에서 흔한 청년들이 모여 지하연습실에서 한 곡만을 지루하게 연습하다 드디어, 노르웨이의 록 페스티벌로 간다. 주인공 뚜로는 무대 울렁증을 이기지 못해 구토를 하는데 이조차 멋진 쇼맨십으로 열광적 환영을 받는다.

이들이 무대 위에서 부르는 노래는 놀랍게도 숭고하고 고귀하고 원초적인 느낌이 들게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른는 과정은 우연투성이에 세속적이고 거칠며 실망스러울 뿐이다. 저자는 이것이 예술가 대부분이 작품을 완성해 세상에 내놓기까지 거치는 실제 과정일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오로지 하나의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행복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창조했을 때 얻어진다.

<더 레슬러> 의 주인공의 마음처럼 흐르는 배경음악의 한 구절이 메세지를 축약해준다.

한심한 외다리 꼴로 춤을 추는 것일지라도, 자유로운 외다리 춤이 내 인생...

완성에 이르는 과정으로서의 삶, 그리고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하는 삶의 행복. 행복의 극치에 도달한 이 영화들의 주인공은 운명을 걸고 '극단적인 한계'에 이르는 창작 과정인 삶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작품 <도열하는 기둥>이승조는 1960년대 우리나라 기하추상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준 작가이다. 파이프들은 실제 이미지가 아닌 망막 속을 스쳐 지나갈 뿐인, 눈을 뜨면 사라지는 이미지를 나타낸 것이고 추상회화는 그의 메모처럼 '아무것도 없는'이미지이며 우리는 읽어낼 수 없지만, 작품을 보며 그 작품으로 떠오르는 생각, 즉 사유를 하게 되고 사유의 깊이는 사실상 관람자마다 다르다. 자신과 상대방의 사유의 깊이를 논쟁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일임에도 사유란 쉽지가 않은데, 작품을 찾아다니며 즐겁게만 여긴다면 좋겠지만.

저자는 사유라는 말은 원래 고뇌, 고통을 의미했다. 고통을 받고 있다는 뜻의 이탈리아 어도 있음을 인용했다. 사유는 언어를 통해서 가능한데, 언어도 이미지도 없는 추상회화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즐길 수 있는가? 예술의 이해되지 않는 아름다움은 때때로 충분한 '즐길 만한 고통, 무해한 고통'이라고 결론짓는다.‘미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장 비평’ 으로 전작 <리플릿>에서 미술을 주로 이야기했다면 이번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세계 곳곳의 사회 · 문화적 현상과 연관된 철학 이론, 미술 작품, 도서, 영화 등을 자유롭게 다룬만큼, 영역의 확대와 동시에 주제들이 집약적으로 담겨있는 책이다.


 

이 리뷰는 알에이치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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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소사이어티
내털리 제너 지음, 김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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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캐나다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오랜 기간 다른 직업을 살다가 이 소설로 데뷔한 작가 나탈리 제너의 2020년 작이다. 총 30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장마다 영국 '햄프셔주 초턴' 연,월 순으로 소제목을 달고 있다.

영국 햄프셔주 초턴이라는 마을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인구 400여명이 안되는 작은 마을이 왜 이렇게 주요 무대가 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었던 예전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가물가물하여 검색해 본 인물 사전 :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년 12월 16일 - 1817년 7월 18일)은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였다. 섬세한 시선과 재치있는 문체로 18세기 영국 중·상류층 여성들의 삶을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생전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작품 중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등이 여러 번 영화화되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이성과 감성 Sense and Sensibility》 (1811년)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1813년) : 초회판 제목은 첫 인상 First Impressions (1797년)

《맨스필드 파크 Mansfield Park》 (1814년)

《엠마 Emma》 (1816년)

《노생거 사원 Northanger Abbey》 (1817년)

《설득 Persuasion》 (1817년)


영화화 된 오만과 편견이나 비커밍 제인을 떠올려보았지만 제인 오스틴 소사이어티라는 제목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이야기는 1932년 전쟁 이전, 초턴에서 어느 남녀의 만남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 젊고 아름다운 미국 여성은 마을의 이방인이었고 제인 오스틴의 발자취를 찾아 아주 멀리 찾아온 사람이었고 관심없던 애덤에겐 관광객과 방문객들은 아랑곳없이 소박한 삶을 사는 젊은이이다. 친절함을 지닌 그는 그녀를 안내해주었고, 그녀로 인해 애덤은 제인 오스틴이 살던 마을에서 처음으로 '여성'소설이라 관심밖이었던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을 읽게 된다.

그리고 또다른 남녀, 상처를 하고 슬픔에 빠져 있지만 이 작은 마을을 돌보는 닥터 그레이와 어린시절부터 지켜봐온 애덜린. 애덜린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그레이는 소설 내내 지루하리만치 그녀의 감정을 모르고 있지만, 그레이 박사를 좋아했지만 끊임없이 밝은 에너지로 자신에 구애했던 새뮤얼과 결혼했던 애덜린은 전쟁이 일어나고 결혼한지 일년도 안되어 징집된 남편이 전사하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애덜린을 항상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애덤과 우연히 마주쳤던 초턴의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누구인가? 미국 헐리우드에서 점차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미미 해리엇(메리 앤) 그리고, 그녀의 피앙세 잭 레너드가 있다. 잭 레너드는 메리 앤을 누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영화 제작자로서 그녀의 가능성을 찾았고 사랑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의 흔적을 찾아 영국에 날아간 미미를 위해 나이트 가문의 별채(추후 오스틴 박물관이 된)를 구매하기 위해 소더비 경매사의 야들리 싱클레어에게, 프랜시스 나이트 양에게 강력하게 어필해, 그녀와 함께 초턴에 직접 오게 된다.


1945년 미국은 전쟁에 총력을, 잭 레너드는 타고난 사업수완으로 철강과 무기 사업으로, 영화 제작사는 이에 힘입어 호황을 이루었고, 미미 해리슨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영광의 귀환으로 그녀를 스타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이 때 소더비 경매장에서 잭과 미미는 야들리 싱클레어를 처음 만났고, 애덤과 그레이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애덤 버윅은 전쟁에서 두 형을 잃었고, 그에 이어 아버지까지 잃음으로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며 나이트 가문의 일 그리고 농장일을 하는 농부가 되었다. 대학을 가고 싶었던 그의 작은 소망이 좌절된 후에. 미미의 방문(1932년) 이후에 일을 쉬는 겨울이 되면 그는 자신만의 장소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읽으며 위로 받았고, 화려한 배우가 된 그녀를 영화에서 발견하고 열렬한 팬이 되었다.


이 리뷰는 대원씨아이(주) 하빌리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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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호텔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2
마리 르도네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림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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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소설은 요즘 읽는 두꺼운 책들 사이에서 내 휴식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총 백여 페이지 정도의 긴 장편은 아니었고, 넘길 수록 단순한 문장 구조에서 느껴지는 어떤 비장함과 섬뜩함이 있었다. 바로 그 나로 동일시되는 낡은 호텔과 가족이지만 남보다 못한 자매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주로 남자들)의 편의를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내용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들과 같이 산 적이 없는데 이제 그들이 내 삶과 함께하다니.

어머니가 죽기 얼마 전에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 하지만 나는 언니들을 돌보느니 장엄호텔 손님을 돌보는 게 좋다.

p23


 

아델과 아다, 두 언니는 주인공인 나에게 장엄호텔보다 중요하지 않은 게으른 존재들이다. 그녀들은 본인들 몸으로 일하는 법이 없었고, 호텔에 대해 불평만을 늘어놓았으며, 호텔만을 걱정하는 나에게 비난하거나 나를 안중에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 할머니가 남긴 유산, 장엄호텔은 늪지대에 지어졌고 목재를 썼으므로, 이 습도에 견디지 못할 정도로 썪어간다. 그러나 이 지역에 들어온 방문객들은 여기 유일한 호텔인 이곳 외에 머물 곳이 없어 그럭저럭 손님이 든다.

한때는 철도가 놓여지기 위해 공사장 인부들이, 철도 공사가 중단되자, 손님이 끊겼지만 늪지대 탐사팀이 그 자리를 메꾸어 다시 만원이 된다. 철도청에서 파견된 탐사팀은 '늪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자연의 보고'라는 나의 생각을 지지한다는 증거를 말해준다.

이 오래된 호텔은 날마다 늙어간다. 배관이 낡고 녹슬었으며 지붕 또한 수리에 수리를 계속하면서 할머니가 남긴 빚과 함께 나의 빚은 점점 더 늘어간다. 손님 방은 아직이나, 아델의 방은 비가 줄줄 새고 양동이들을 받쳐 놓고 잔뜩 받아서 버려야 하며 막힌 변기 때문에 손님방으로 가서 비워야 할 지경이다.

나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마치 하녀 다루듯이' 늪에 다녀온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가 그들의 방을 치우고 점점 더 지저분해지는 그들 속옷을 빠느라 하루해가 다 가도록 일을 한다.

그들은 전혀 주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점점 늦게 돌아온다. 나는 그들이 돌아온 후에야 자리에 든다.

p62

언니들이 내 고생의 근원이다. 정신차려야 한다...방들 중 하나에서 전에 없이 물이 샌다. 물이 솟구쳐 나온다. ...

파이프를 간다고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호텔 전체를 다시 손봐야 한다. ...나에겐 할머니 같은 배짱도 없고 할머니처럼 상속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p63


 

손님들은 다시 철도에 관해 말하고, 늪이 침입하는 할머니의 무덤 묘지에 물이 꽉 들어찼다. 늪이 침입하고부터 묘지도 늪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장엄호텔이 되살아난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두 좋았고 호텔 전면에는 목재의 썩은 부분을 가려주는 꽃들이 천지다. 목재가 또 다른 병에 걸렸는지 점점 심하게 썩어든다. 목재의 질이 나빴고 이런 늪지대엔 적합하지 않았다.

가끔 있는 손님들은 벼룩 때문에 불평을 한다. 소독약을 뿌렸지만 장마철만 되면 벼룩이 찾아온다. 나는 류마티즘에 걸린 탓에 조금은 될 대로 돼라 했고 다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문턱을 넘기 전에 잠시 주춤거린다. 다른 곳에 잘 만한 곳이 있는 게 확실했다면 떠나버렸을 것이다.

...늪지대에서 별을 보고 자는 것보다는 장엄호텔에서 자는 게 그래도 나으니까 마지못해 있는 거다.

p78


 

공사장 인부들이 떠나고 중단된 공사장은 탐사원들. 이제 그들이 불평하며 떠나고, 다시금 철도청은 포기하지 않고 늪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놓기 위해 지질학자들을 파견해 장엄호텔은 또 그들을 맞이한다. 그들은 진지했고 내게 질문을 해댔고 철도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외부사람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작업(?)으로 늪은 장엄호텔을 위시해 개발 계획이 추진되지만, 번번이... 늪은 짙은 안개를 불러오거나, 둑이 물에 잠기거나, 그 위에 철도가 놓이기에 수평이 무너지는 일로 무산된다.


 

사람들 사이 전염병이 돌고, 부주의한 아델과 아다 자매는 안그대로 늙고 병들어가는 몸이 더욱더 쇠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나는 언니들로부터 자유가 되지만 언니들의 핍박과 호텔일에 대한 무지함에도 시체는 유일하게 좋은 시트에 싸서 빚을 지고 좋은 관을 짠 후 둑으로 가서 묻어주었고.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물에 잠기지 않도록 자리를 잘 골랐다. 늪은 산성이라 닿는 곳마다 공격했으며 언니들의 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홍수는 어떤 방수제로도 무사하지 못할 장엄...추한 모습으로 변했어도 그런대로 버티고는 있다. 장엄은 버려진 집처럼 보이고 네온사인도 자꾸 꺼지며 철도청이 포기한 후 아무도 관심없어 한다.

호텔은 기우뚱해도 쓰러지진 않는다.


 

장엄에서 시작된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이야기의 말미에 언니들의 죽음, 다른 연작들에도 나타나는 수몰된 계곡에서 죽는 사람들... 그녀의 소설에 '물' 특히 범람하는 물은 어떤 의미인가? 비인간 지대에서 머물다가 흔적 없이 세상을 뜬다.

자질구레한 불행의 지루한 반복, 옮긴이의 해석을 보노라니 이야기에 나온 나는 언젠간 흔적없이 사라질 생명이라도 특히, 장엄호텔처럼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에 직면하지만 '다시'살아남으로써 버팀 자체가 사라져간 이들 뒤에 남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아 애잔했다.


 

이 리뷰는 열림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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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최시현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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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은어떻게여성의일이되었나 #창비 #최시현지음 #투기화된삶 #한국의중산층여성


자가소유는 발전주의 국가에서 가족과 계급 그리고 젠더를 구성하는 물질적 기반이며 상징이다. 저자는 주택정책과 도시핵가족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를 하기위해 도시 중산층으로 여겨질 만한 25명의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를 시작하지만, 결국 젠더로서 여성이 집에 갖는 감정, 투기적 성격으로서의 주택 특히 자가소유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와 가족의 상징으로 '주택의 실천' 을 해왔는가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부동산 매매가 투자와 투기라는 용어 속에 담긴 사회적 인식은 주로 여성이 져야 하는 윤리적 부담같은 정서를 담고 있지 못하기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좋은 엄마' '버젓한 중산층' '모범가족' 이라는 한국 도시 중산증의 가족주의 도덕이 어떻게 여성들의 의식과 무의식에 작용이 되어 왔는가? 나의 어머니(70대 여성)의 삶과 나(40대) 의 삶도 저자가 만나본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주택실천과 태도와 경험들에 유사하고 공통지점들이 많아 한편으로는 흥미롭고 한편으로 또 불편했다. 결혼을 하면서 여성은 가족들의 안위를 물리적 '집'상태와 직접 연결하여 동일시하게 되는 한국 주택시장이 존재하고, '집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가계를 돌보는'의미가 아닌 사회구조가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바로 그 위치에 있는 나(아파트 거주) 와 나를 둘러싼 비슷한 동지들의 상황을 돌아보게 했다는 것이 책과 저자의 프롤로그에서 단숨에 몰입되는 이유였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1장 투기는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에서 따왔는데, 집안의 경사 모두의 열망 아파트 청약 당첨은 축하받을 일이고 가족 내 안목과 지목을 가지고 결단을 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 나도 어머니가 결혼 전 만들어주신 주택청약통장을 가지고 있었고 정작 제 쓸모대로 이용하지 못했지만, 다른 금융상품보다는 매력있다는 이유로 유지하고 있다. 범정부적으로 오랫동안 개인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내 집 마련'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수도권 아파트의 높은 청약경쟁률과 로또당첨에 비유되는 일로 항상 뉴스에 빠지지 않는 현상이며 너도 나도 열망을.

우리나라 뿐 아니라 국가들은 부동산 시장 집을 매개로 경기 부양이나 억제하는 정책을 이용해 시장을 조정하는데 주택을 소유하는 것이 개별 가구의 복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를 소유자 선호 체계를 만들어 내고 소유자 사회 규범은 주택장에서 계약의 형태로, 국가, 기업, 개인 행위자들 각자가 가진 자본과 질에 의해 '게임의 참여 기회'를 다르게 갖는다. 지배자와 신참자는 대결구도가 되어 서로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그에 어울리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를 위해서 '어떤 것도 불사하지 않는' 경우를 본다. 어떻게 보면 주택을 사고파는 부동산 중개인들의 도움을 받고 친해지고자 하면서도 어떤 시점에서는 믿지 못할 게임의 참여자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일,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자신이 소유한 자산이 타인보다 낫다, 가치가 높다고 공격적으로 혹은 공개적인 부동산 커뮤니티에서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1960년대 근대화 과정 이후 국가 주도의 과잉남성적 발전주의 과정에서 아버지, 국가, 장남과 재벌 기업으로 대표되는 이들과 여성들은 심각한 착취나 침묵을 강요받았다고 보고 여성의 집안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체계도 없었기에 가계부 운동, 부녀지도사업(저축...) 등으로 의무와 정서만을 강조 근검, 근면과 검소 여성의 경제를 통제하려는 금욕적 경제실천을 전범화했다고 인용했다.1970년 경제 규모가 성장하면서 1990년 여성 잡지나 광고들은 투기를 상품화해 남성 임노동자와 여성무급돌봄노동자라는 근대 가족의 성별규범을 모범 시민과 가정에 대한 헤게모니를 보여준다. 가정경제의 규모도 함께 커진 동안 복부인이라는 적극적인 캐릭터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는 어쩌면 당연해보인다.

가부장적 가족 모델은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가 확대된 2000년대에 맞벌이가 늘어나 가장원 권위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투기적인 계급욕망은 여성들에게 다른 역할을 주었는데 주택금융화 이후 이들은 가계금융관리자로서 주택을 '사고파는' 소임을 맡게 된 것이다.

여성에게 결혼이라는 생애 사건에 원가족의 경제 여건, 개인 소득, 문화적 취향 등도 생애 첫 내 집 마련의 실제로 영향을 주는 것들인데, 결혼 적령기를 넘어선 여성은 사회적으로 성인이지만 성인으로 인정 받지 못하거나 미성숙하다는 위치적 평가를 받는다.

여성이 남성의 집에서 어떤 역할로 존재하는지가 그 여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특정 남성의 집에 속해 있지 않은 여성은 불완전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여겨졌다. 아버지의 집에서 남편 집으로 이동하는 소속 변경을 하는 것.

이 대목에서 아차 싶었다. 내 집의 명의는 내가 아니라 남편이지만, 모든 건 내가 기획한 일인데. 이 책의 다른 구술자들처럼, 중산층에 자리잡기 위해 아이들 교육을 위해 '동네'를 기획하고 '갈아타고' 실천하는 일들 말이다. 그리고 그 엄마 정체성. 저자가 만난 노년기의 여성들은 적극적 주거 이동과 부동산투자로. 자신과 가족의 지위가 바뀌는 핵심 메커니즘을 체득했기에 자녀 세대에게 집값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움직인다.' 이미 독립한 자녀들에게 나눠줄 자산을 만들기 위해 강남의 자신의 집을 전세로 내어주고 나오거나 자녀의 교육을 위해 수도권에서 시세차익을 얻어 강남으로 진입하려는 젊은 엄마들도 모두 위기의식을 체화하고 이동하지 않으면 손실, 투기화된 삶을 사는 중산층을 살고 있다.

부동산가격 폭등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주택을 소비할 때 편익을 얻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로 손해를 보지않았어도 큰 손해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던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추로 강화된다.


그때 그 집(땅)을 샀더라면...그 집을 팔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주변의 고가의 부동산을 소유하거나 누군가 불특정한 소유자를 상상하며 하는 흔한 후회의 말들을 들어왔고 가까이 살았던 시부모님으로부터 지금 집에 대한 말이 길어질 때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후회없는 선택을 했던 나는(가족구성원이 늘어난 상황에서 나는 더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지만) 지금도 이 책이 나에게 알려준 중산층 모범가족이 되기 위한 정주하지 않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그러나 마인드만큼 현실이 녹록치 않고 '편법쓰는 여성, 보수화되는 여성, 팔자 탓하는 여성' 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다. 주택장에서의 위치가 그러하듯이, 집이 자산의 대부분이라는 노후의 불안을 갖고 있기에 언제든(준비되었을때) 적극적 주택실천을 해야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경계해야 할 위험한 줄타기가 존재한다...

예를들면, 다주택자가 되기 위해 가족을 등기에 올리는 명의 위장, 위장전입은 주택실천에서 일상화된 위법 행위로 공직 후보자 인사청문회 단골 메뉴이다. 부동산 실명제 이후 징역이나 벌금 등 분명히 처벌이 내려지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히 명의 신탁정도로 치부된다. 법을 피해 세금을 내지않는 일도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지워지며 똑똑한 일이 되는 것, 청와대 인사가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흠집을 내며 '부인이 한 일이며 나는 몰랐다'고 해명한 일 등은 내면화된 투기에서 책임을 여성에게 가정주부에게 전가한 일이다.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평소 말해온 남편의 의견도 한번 물어봐야겠지만 가족주의가 투기를 여성에게 범범 행위까지 정당하게 여기게 할 정도인가는 심각한 일이 아닌가? 현 정부의 입시비리를 소환한 전 장관부부도 엄마가 교수이긴 하지만, 영향력이 있다는 아버지의 딸을 위한 위법행위가 아닌 엄마의 잘못된 모성으로 낙인찍고 바라보는 시선이 참 불편했었다. Dirty work. 세금회피 여기서는 부동산에 국한되어 있지만 말이다.


이 리뷰는 도서출판 창비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이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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