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모리는 도쿄 우에노 역에서 왜 자살을 하는가? 아니 무엇이 그가 세상을 등지게 하는가? 그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의 고향은 여기가 아니다. 후쿠시마현 소마군 야사와마을이란 곳에서, 철이 들었을 무렵 전쟁이 터지지고 종전 후에 12살에 동생 일곱명과 부모의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아야 했다. 어촌에서 조개를 잡거나 다시마를 수확하는 일을 할때는 가족과 있었지만, 허리를 다쳐 농사를 짓기 못하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학업을 이어야 하는 동생들을 위해 그는 도쿄로 왔다. 숙식을 해결하며 1964 도쿄올림픽 준비로 각종 체육시설의 토목공사장을 옮겨다니며 중장비를 만져본 적이 없는 그와 같은 시골출신 노동자들은 곡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고 손수레로 나르는 일만을 할 수 있었다.
과거 젊은 시절 열렸던 도쿄올림픽은 그가 70대가 된 2020년이 되어 한번 더 열릴 예정이었고,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모리는 우에노온시 공원의 노숙자가 되어 비닐로 된 지붕과 골판지로 된 천막집에 살며 '특별 청소'라 불리는 강제 퇴거 날이 되면 천막을 해체하고 짐을 싸서 시에서 지시하는 대로 짐표를 붙이고 하루종일 공원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는가? 노숙의 삶은 누구도 일부러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한몸 따스하게 누일 곳에서의 삶을 누가 원하겠는가?
50년이 흐르는 사이 부모 형제가 죽고, 돌아갈 집이 없어진 이 공원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노숙자들
모리는 얼마전에 죽은 동년배의 노숙자 시게를 안 적이 있다. 그는 아마도 머리 쓰는 일을 했던 것 같이 박식한 사람이었고, 누가 시게 천막집에 새끼 고양이를 던져 넣었고 그는 빈 캔을 판돈으로 동물병원에서 중성화 시키고, 애지중지 키우는 '에밀'이라는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반려동물이라는 게 내가 살고, 살만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스스로의 양식 대신 고양이 사료를 먼저 사고 남은 돈으로 먹을 것을 살만큼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었으며 모리는 그 사람의 초대를 받아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었고.
작가는 시게의 입을 빌어, 전쟁 도쿄 대공습의 참혹한 과거를 상기시켰고 모리의 지난 생을 반추하는 것으로 플래시백을 한다.
시게의 비밀이야기를 들을 뻔했지만 모리 자신의 비밀(노숙자가 된 과정)마저 털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자리를 파하고 나왔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시게가 죽었으며 고양이는 생사를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모리 자신이 어쩔 수 없었던 무력감을 투영하는, '노숙자'라는 정체성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사람(인간성)이었지만, 외부인들에게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지붕없는 인간(인간성의 소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