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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평점 :
얼마 전에 새로 출간된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 중 하나인 '이선 프롬'.
해당 출판사의 블로그에서 이 작품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치 첫눈에 반한 것처럼 표지와 제목을 보자마자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그래서 책이 시중에 나오자마자 가까운 서점에 들러 바로 구입했다. 그렇게 읽게 된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 다 읽고 나서 '역시 내 느낌은 아직 죽지 않았어!'라는 확신에 찬 생각과 함께 오랜만에 인생작을 만났다는 기쁨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선 프롬'은 액자식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중의 주인공인 '나'는 미국 가상의 지역인 '스탁필드'에 일하러 온 엔지니어이다. 그는 그곳에서 죄수처럼 비참하고 쓸쓸해 보이는 '이선 프롬'이라는 농부를 발견하고 곧 이선이라는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느 날 스탁필드에 엄청난 폭설이 내리고, '나'는 평소에 일터에까지 데려다주는 이선과 함께 눈보라 속에 갇힌다. 가까스로 마을 근처에 도착하지만 눈보라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나'는 이선의 집에서 하룻 밤 머물기로 한다.
그때 '나'는 평소 주민들에게 들었던, 이선을 둘러싼 각종 소문을 가지고 환상에 빠지게 되고, 이렇게 '이선 프롬'의 과거가 펼쳐진다.
이 작품은 이선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관습과 주변 환경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옭아매는지를 짐작하게끔 하는 책이다. (70년대에 페미니즘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선 프롬'도 갑자기 급부상했다는 책 소개를 보고 뭔가 여성의 자유나 성의 자유를 표현하는 책인 것으로 보이지만 전혀 아니다)
이선은 원래 시내 대학에서 공부하던 공대생이었다. 나름 과학적인 현상에 관심이 있어 했고 연구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병에 걸려 돌아가시자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에 내려와 농장 일을 전부 떠맡아 살아간다.
정 없는 지나와 결혼, 주변 친척들의 눈치, 굶어 죽을 것 같은 생활고와 침묵이 가득한 고향의 생활은 21세기의 내가 보기에도 정말 지옥 같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참하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이곳에 더 있고 싶을까. 읽는 내내 이선이 안쓰러워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 때 등장한, 비록 일은 못 하지만 활기와 생명력,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지나의 사촌 매티와의 불륜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불륜을 미화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다. 나 또한 다 읽고 나서 이들의 사랑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주위 환경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떠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을 때가 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생활여건과 사회적 관습이 다소 느슨해진 오늘날에는 여건만 된다면 여행 같은 것을 통해 마음껏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이선 프롬'을 읽다 보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읽어내려갈수록 사회로부터, 여러 가지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순간을 즐길 여유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도 뭔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선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모르게 환경과 억압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침 세계문학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 여성 작가들을 좋아하시는 분들, 서정적인 작품을 좋아하시거나(놀랍게도 주제는 비관적이기 짝이 없는데 묘사나 비유는 매우 서정적이다!)가혹한 현실에 치여 사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책이다.
그(이선)는 말없는 우울한 풍경의 한 부분인 것만 같았고, 그 안의 온기와 마음은 표면 아래에 꽁꽁 묶인, 말하자면 얼어붙은 슬픔의 화신과도 같았습니다. (중략) 나는 단지 쉽게 다가가기에는 그가 너무나 깊은 정신적 고립 속에 살고 있다고 느꼈을 뿐이에요. - P18
지난 몇 해 동안 이 말없는 선조들은 그의 조바심, 변화의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욕망을 빈정대 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결코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겠느냐?‘ 라는 구절이 묘석마다 쓰여 있는 듯 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다가 마침내 저들에게로 가겠지‘하며 몸서리치곤 했다. - P50
이선은 목소리를 낮춰 "내가 할 수만 있으면 너(매티)‘를 위해 못할 일이 없다는 걸 너도 알지!"하고 말했다. "네, 알아요" "하지만 난 못해....."
(중략)
"맷, 난 손발이 꽁꽁 묶였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선 아저씨, 가끔 제게 편지해 주세요" "아,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손을 뻗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또 너를 보살피고 싶단 말이야. 네가 아플 때, 네가 외로울 때 같이 있고 싶어"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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