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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독일 소설가이자 문학가인 '토마스 만(Thomas Mann , 1875년 6월 6일 ~ 1955년 8월 12일)'은 어렸을 때 내게 깊은 감명을 준 몇 안 되는 작가이다. 과거 학창 시절에 학교 도서관에서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문 사람들>과 <토니오 크뢰거>를 무척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 읽은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니스에서의 죽음>도 토마스 만의 대표 단편집들을 모은 책이다. 그중에서 <토니오 크뢰거>와 <행복에의 의지>, <키 작은 프리데만 씨>를 중점적으로 읽어봤는데, 역시나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토니오 크뢰거>가 그랬다.
이 작품은 예술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삶을 사무치게 부러워하는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그리고 있다. 이성적이고 엄숙하며, 시민적 기질이 강했던 아버지와, 반대로 자유분방하고 감성적이었던 남미 출신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크뢰거는 천성적으로 문학가적, 예술가적 기질이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기질보다는 현실적이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시민적 인간)을 부러워한다. 이야기는 크뢰거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는데, 학창 시절 크뢰거는 같은 반에 있는 금발의 미소년 '한스 한젠'을 동경하는 것으로 운을 띄운다. 한젠은 크뢰거와 달리 예술보다는 운동과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데 재능이 있었다. 보통 예술가적 사람이라면 이런 한젠의 모습을 '속물적'이라며 비웃었겠지만, 크뢰거는 그렇지 않는다.
크뢰거는 오히려 자신의 예술가적 재능을 저주라 느끼며, 자신과 달리 단순하고 손쉽게 삶을 즐길 줄 아는 한젠을 부러워한다. 문학과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섬세한 성격의 사람의 소유자라면 이런 크뢰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다. 한젠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에 여념이 없건만, 어째서 자신은 이런 간단한 삶의 과정 중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가, 혹은 어려워하는가에 대한 답답함을 느낀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뭔가 삶의 길의 한 부분이 꽉 막힌 느낌이랄까. <토니오 크뢰거>는 이런 복잡 우울한 감정을 주인공 크뢰거를 통해 아주 섬세하게 묘사한다. 이후에 크뢰거는 장성해 예술가가 되는데, 그러면서도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적 삶과 시민적 삶 가운데서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크뢰거는 예술가와 시민 사이에 놓인 존재로서 현실적인 삶을 사랑하는 것이 곧 삶을 사랑하는 태도라 결론짓는다. 이는 여러모로 큰 울림을 주는데, 현실과 동떨어지기 쉬운 예술을 하면서도 그 현실을 향한 창을 계속 열어 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감성, 문학은 분명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만, 한편으론 너무 지나치게 추구하면 흔히 '데카당스'라는 퇴폐적 인간이 되기 쉽다.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유유자적하게만 살아가는 태도는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없다. 토마스 만이 이 작품을 썼을 당시 세상은 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데카당스라는 세기말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러면서 예술가들은 몽상가가 되어 점차 타락하게 되었고,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분명 저자인 토마스 만 본인도 이런 시류에 자연스레 홀렸을 거다. 그러나 토니오 크뢰거처럼 반쯤은 예술적인 어머니의 기질과 또 반은 시민적인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은 토마스 만은 여기서 벗어나 예술가들도 현실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예술적 삶과 현실적 삶 사이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크뢰거는 현실을 동경하고 또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은 마지막까지 현실을 향한다.
<토니오 크뢰거>에 이어서 읽은 <행복에의 의지>는 다소 기괴한 이야기다. 화가면서 유약하고 병든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성과 맺어지는 단 하나의 행복을 위해 자기도 모르게 목숨을 이어가다가, 그 여자와 결혼한 다음 날 죽었다는 짧은 단편 소설이다. 몸과 마음은 약하더라도 행복이라는 의지 하나만은 이루고 가겠다는, 다른 의미로 무시무시한 작품 같았다. 그 외에도 <키 작은 프리데만 씨>도 인상 깊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모의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 곱사등이처럼 돼버린 프리데만 씨가 줄곧 현실의 행복을 무시하다가(이건 불구자인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음), 새로 부임한 관구 사령관 '폰 링린엔'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면서(짝사랑) 그제야 뒤늦게 찾아온 행복을 느끼고 후회로 괴로워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이 줄곧 영혼과 성격으로 사회 부적응자, 결핍자를 묘사했던 것과 달리 <키 작은 프리데만 씨>에서는 오히려 외적인 결핍을 통해 이를 표현했다는 게 인상 깊었다.
나머지 <어릿광대>라든지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도 읽고 싶었지만, 이건 개인적으로 너무 읽기 힘들어서 나중에 정신적으로 좀 더 성숙해지면 도전해 볼 생각이다. 아시다시피 토마스 만의 소설은 굉장히 촘촘하고 정적이다. 당대 평론가들로부터 '세공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라고 하니 할 말 다 했다. 예술적이고도 정신적인 문장의 극치라 계속 읽다가는 정병이 올 것 같아 포기했다 ㅠㅜ 그래도 지금까지 말한 <토니오 크뢰거>와 <행복에의 의지>,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쉽게 읽을 수 있으니 꼭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크뢰거처럼 예술인이지만 동시에 현실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에게 더더욱 추천하는 바이다.
유희적이고도 우울한 경이로운 창조력이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그와 동시에,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들은 그 창조력이 닿지 않는 대안에서 그런 것 따윈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명랑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닫혀진 덧창 앞에 외로이, 국외자의 신세가 되어 희망도 없이 서서는 상심한 나머지 마치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때 그의 심장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 P32
문학이란 것은 소명이 아니라, 당신에게 분명히 말해 두고 싶습니다만, 일종의 저주입니다. 언제부터 이것이, 이 저주가 느껴지기 시작하지요? 일찍부터, 엄청나게 일찍부터지요. 아직도 의당 하느님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화해 속에서 살아야 할 그런 시기에 벌써 이 저주가 찾아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낙인 같은 것이 찍혀 있는 것 같이 느끼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 평범하고도 정상적인 사람들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갈등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당신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반어, 불신, 반항, 인식, 그리고 감정의 심연이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해서, 당신은 고독해지고 그때부터는 더 이상 서로 간의 이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 P47
인식해야 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 - P99
내 너희들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하고 그는 물었다. 아니, 결코 없었다! 너 한스도 잊은 적이 없고, 너 금발의 잉에도 결코 잊은 적이 없어! 정말이지 내가 작품을 써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너희들이었어. 그리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을 때, 난 남몰래 내 주위를 살펴보곤 했지. 그중에 너희들이 참석해 있나 하고. 한스 한젠, 네 집 정원 문 앞에서 약속한 대로 너 이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읽지 마라! 난 너한테 더 이상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한테 무슨 상관이겠니? 넌 우울한 시 나부랭이를 보다가 네 밝은 눈을 흐리게 하거나 어리석은 꿈에 잠기게 해서는 안 된다. - P98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야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중략) 리자베타, 이 사랑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량하고 생산적인 사랑이랍니다. 동경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한 질투와 아주 조금의 경멸과 완전하고도 순결한 천상적 행복감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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