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틀로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9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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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외로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사실 내가 플라토노프의 '코틀로반(구덩이)'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학교 도서관 맨 위에 꽂혀있던 세계문학 전집 속에서 찾아낸 것인데, 몇 페이지 읽자마자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이 '구덩이'인 만큼 대충 인부들(?)이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어린 여자애를 발견하고 인간성을 되찾는, 그런 부류의 소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성인이 되고 다시 읽어보니 어렸을 때와 전혀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여기서 말하는 감동은 감정에 북받쳐서 눈물이 나오는 그런 감동이 아니라 내가 드디어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구나 하는 데서 나온 감동이었다. 물론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예전에 비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앞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코틀로반'은 우리나라 말로 '구덩이'라는 뜻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즈음, 러시아(여기선 소련이겠지)이다.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분이라면 1930년대 러시아에서 무슨 정책을 펼쳤는지 아마 아실 거다. 바로 스탈린의 경제개발 정책과 농촌의 집단화 정책이다. 때에 따라서는 스탈린 이전에도 조금씩 실시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래도 스탈린 때가 가장 활발했으니 그렇다고 치겠다. 


아무튼,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작품의 주인공인 '보셰프'가 맨 처음 등장한다. 그는 노동하는 중간중간에 생각(사색)했다는 이유로 일하던 곳에서 쫓겨나 여기저기를 전전한다. 그러다 우연히 '코틀로반'을 파는 인민들 무리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자기가 줄곧 생각했던 '진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코틀로반'을 파는 일에 집중한다. 

그곳에는 보셰프 말고도 오직 사회주의적 미래를 위해 제 한 몸 사리지 않은 '치클린'과 코틀로반을 설계한 '프루솁스키'라는 기사, 상이군인 '자체프', 그나마 가장 지위가 있어 보이는 '파시킨' 등등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내일'을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들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내일을 사는 젊은이들을 위한 완전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나스타'라는 어린 여자애가 코틀로반 작업반에 합류하면서 더욱더 격화되어 간다. 

또한 단순히 코틀로반 작업뿐만이 아니라 후반부에는 농촌 집단화 과정을 보여준다. 혁명의 구호처럼 부농은 멀리 쫓겨나고 오로지 프롤레타리아와 가난한 민중들만이 남는데, 이론상으론 정당해 보이는 이 정책도 훗날 나스타가 죽으면서 코틀로반의 희망도 스러져가는 것처럼 잔혹하고 허무하기만 하다. 


작가 플라토노프의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회의적인 관점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민중에 대한 사랑도 함께 말한다. 비록 코틀로반을 만드는 과정은 과도한 이성에 의한, 개인의 감정을 말살시킬 정도로 잔혹한 작업이지만 적어도 이를 위해 힘쓰는 사람들에겐 죄가 없다는 게 저자의 의도 같았다. 


이렇게 저자와 작품의 배경, 줄거리를 통해 본 작품을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 외에 다른 관점으로 이 작품을 보았다. 

작중에선 1930년대 러시아의 상황을 조소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는 이것이 단순히 그때 그 시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21세기에서도 오직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는 일이 많지 않던가. 하루하루가 지옥 같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서 작중 노동자들처럼 스스로를 사람들 사이에서 잊은 채 매일 '코틀로반'을 파는 현상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래도, 잠깐 숨을 돌리고 지금 현재를 느끼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집을 올리는 사람 자신은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어. 그럼 누가 그 집에 살지?'

'이제 일을 끝냅시다. 안 그랬다간 당신들 다 지쳐서 죽을 것 같소. 그러면 누가 인간으로 남겠소?'라고 보셰프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잊힌 온갖 불행한 물건들을 그곳에 넣어두고 소중히 간직했다. ‘네겐 삶의 의미란 게 없었어‘. 보셰프는 부족한 동정심을 끌어내어 생각했다. ‘거기 좀 있어봐. 네가 무엇을 위해 살다 죽었는지 내가 알아볼 테니. 네가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그저 헛되이 세상을 굴러다니고 있는 거라면 내가 너를 지키고 기억해줄게.‘ - P13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참고 살아가지 - P13

보셰프는 근처에서 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만족을 느끼는 사람의 말없는 행복감이 그 얼굴 위에 나타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잠든 사람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그의 눈은 슬픈 듯 깊이 감춰져 있었다.
그들에겐 생의 잉여라곤 티끌만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을 잘 때는 심장만이 살아 그들 각자의 목숨을 지탱해줄 뿐이었다. - P21

‘뭐가 느껴지나요?‘
‘모두 다요. 다만 나 자신만 느껴지지 않는군요‘ - P178

사실 한때 그의 몸은 마치 온 세계의 진리와 삶의 모든 의미가 그 어느 곳도 아닌 자기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듯이 흉포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몸으로부터 지금 보셰프에게 전해진 것은 지혜의 고통과 존재의 격렬한 흐름 속에 빠진 무의식 그리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분자의 순종뿐이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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