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토요일 밤의 세계문학 3
보리스 빅또로비치 싸빈꼬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뿔(웅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하는 책들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다음으로 보리스 사빈코프의 작품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창백한 말‘의 주요한 축은 ‘테러리스트의 수기‘이다. 주인공인 ‘조지‘는 테러리스트다. 그는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동료들과 테러리스트를 조직하였고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총독을 폭탄으로 암살한다. 그러나 조지는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아니 그 전부터 세상 모든 것에 기뻐하기는 커녕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소설의 진가가 나타난다.
이 책은 단순한 테러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조지가 테러를 진행하면서 느끼는 고뇌를 적어내고 있다.

(여기서 ‘창백한 말‘은 성경에서 나온 말로, ‘창백한 말‘은 죽음을 뜻한다)

보통 주인공이 어떤 부정한 것에 맞서싸울때 그가 가지는 사상은 적과 다른 사상, 또는 정의다. 가령 적이 ‘제국주의‘라면 이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은 ‘자유주의‘나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 싸우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백한 말의 조지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그는 총독을 죽임으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겠다는 마음도 없고, 그렇다고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없다. 그저 ‘노예가 되기 싫어서‘라고만 말한다. 그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허무감을 느낀다.
하지만 테러에 계속 무관심하냐. 그것도 아니다. 조지는 인생 모토가 ‘투쟁‘이었기에 고뇌를 반복한다. 결국 이 고뇌는 자살할 때까지도 이어진다.

누구는 혁명을 위해서 테러를 감행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 더러운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뜨거운 사랑을 위해 테러를 감행한다고 한다. 하지만 조지는 이것들 모두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이 헛수고라는 그의 생각은 이데올로기와 수많은 사상이 넘쳐나던 당시 상황에서 보자면 매우 순수하다 볼 수 있다. 조지는 어느 사상에 물들이지 않은 셈이다.

‘창백한 말‘은 사빈코프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사빈코프 또한 혁명이 발발하던 시기에 테러리스트로서 많은 활약을 했다. 앞의 조지가 총독을 살해했듯이 사빈코프도 황실 사람인 이고르 총독을 암살했다고 한다. 아마 이 소설은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일 것이다.
하지만 사빈코프가 나중에 볼셰비키들이 독재하기 시작하자 등을 돌리고 백군에 합류한다. 그러니 이 책은 혁명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과 테러가 과연 정당한 일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추가로 이 작품의 외전격인 ‘검은 말‘도 추천한다!

나는 지상의 낙원도 믿지 않고, 하늘의 낙원도 믿지 않는다.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자유로운 노예조차 되고 싶지 않다. 나의 온 생애는 투쟁이다. 나는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으로 투쟁하는가? 모른다. 나는 투쟁만을 원할 뿐이다. 순수한 포도주를 마신다.

어렸을 때 나는 태양을 보았다. 그것은 나를 눈멀게 했고, 찬란한 광휘로 태웠다. 어렸을 때 나는 사랑을, 어머니의 손길을 알았다. 나는 무구하게 사람들을 사랑했고, 기쁨에 차서 삶을 사랑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한순간 세상은 저주스럽고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거짓이고 모두 헛수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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