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발을 담근 채 독고독락
이새벽 지음, 김승아 그림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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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여고생 '이연'은 과거 친구들에게 심한 따돌림과 배신을 당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세상에 '진짜'는 없으며 모든 관계와 감정은 '가짜'일 뿐이라고 믿으며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지낸다. 그러던 중 이연은 학교 도예부에서 '성빈'이라는 남학생을 만나게 된다. 흙을 어루만지는 성빈의 섬세하고 다정한 모습, 그리고 묵묵히 곁을 내어주는 태도에 이연은 점차 마음을 열게 되고 결국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성빈은 이연의 고백에 충격적인 진실을 털어놓는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라는 것이다. 성빈은 그 증거로 자기 손을 물에 푹 담근 채 보여준다. 오랜 시간 물에 발이나 손을 담그면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는 인간과 달리, 성빈의 손은 아무런 변화 없이 매끈하고 늘씬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연이 성빈의 정체에 충격을 받을 틈도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누군가가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연은 성빈의 정체가 학교 전체에 소문나 그가 배척당할까 봐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소설은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한 안드로이드 성빈과 그를 지키고자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비겁함과 마주하게 되는 이연의 내면을 통해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겉보기엔 안드로이드 소년과 인간 소녀의 풋풋한 성장 로맨스 같지만, 그 이면에는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서늘한 경고가 숨어 있다. 특히 안드로이드가 겉보기에 인간과 완벽하게 흡사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혼란과 문제점들을 상상해본다.

 

가장 먼저 대두되는 문제는 인간관계와 감정에 대한 근본적인 혼란과 신뢰의 붕괴다. 이연이 성빈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외형과 행동 양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계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깊은 감정을 내어주었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이 느끼는 배신감과 자괴감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이는 타인에 대한 의심으로 번져 향후 인간 사회 전체의 관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위험을 경고한다.

 

또한, 완벽한 안드로이드의 존재는 인간의 심각한 열등감을 유발하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다. 작품 속 성빈은 예술적 감수성이 필요한 도예를 훌륭히 해낼 만큼 섬세하며 육체적으로도 흠결 없는 존재다. 반면 이연을 포함한 인간들은 남을 따돌리고, 거짓말을 하며, 겁을 먹고 비겁해지는 등 수많은 결함을 드러낸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공감 능력과 감수성마저 훌륭히 모방하면서 물리적으로 완벽하기까지 하다면, 불완전한 인간은 비인간 앞에서 고유한 쓸모와 존재 이유를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가 일상에 섞여 들면 인간의 내재적 폭력성과 배타성이 비인간을 향해 집중되는 혐오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연이 누군가 엿들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성빈이 '나와 다른 존재'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에게 쏟아질 인간들의 무자비한 차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과 지나치게 흡사한 기계가 오히려 인간 사회의 비합리적인 차별과 폭력성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완벽한 안드로이드 '성빈'을 하나의 거울로 삼아 이연의 지질하고 비겁한 진짜 인간성을 낱낱이 비춘다. 사람과 지나치게 흡사한 안드로이드가 초래할 가장 큰 비극은 그들이 너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완벽함 옆에 섰을 때 인간의 이기심과 비겁함 같은 결함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 아닐까. 다행히도 인공지능이 날로 발전하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우려하는 목소리 역시 높아지고 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 이면에는 가장 인간다워지고자 하는 본성의 외침 또한 존재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모순된 지점을 파고들어, 포기하고 실수하면서도 끝내 서로의 손을 맞잡으려는 인간만의 연대에서 희망을 찾는다. 기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넘어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인간다운 존재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의 무게를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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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연구 - 비밀에 부쳐진 말들, 삭제된 존재의 배회, 트라우마의 체현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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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찾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문화 선진국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방탄소년단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과 세련된 드라마와 영화는 전쟁과 빈곤을 딛고 일어선 우리나라의 성공 신화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가 눈부실수록 그 무대 뒤에 드리운 그림자는 더 어둡기 마련이다. 저자 그레이스 조의 기록은 우리가 일부러 모른 척해 온 그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의 문을 용기 있게 열어젖힌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평생 인자한 미소 뒤에 말 못 할 사연을 숨겨온 우리 할머니가 떠오른다. "사실 나에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픈 젊은 날이 있었다"라며 깊은 밤 비밀 이야기를 건네받은 듯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실 이 책은 사회와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는 어렵고 딱딱한 전문 용어들이 글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침대 머리맡에서 편하게 읽을 만큼 대중적인 부류는 아니다. 때때로 낯설고 학술적인 단어들 앞에서는 숨을 고르고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록'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하나뿐인 무기라는 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저자는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의 비극을 흔한 에세이나 감상적인 소설의 언어가 아닌, 차갑고 예리한 학문의 언어로 쓰고자 했을까. 그것은 아마 '속상하다', '가슴 아프다' 같은 일상적인 말들로는 강대국과 국가가 개인에게 남긴 상처의 깊이를 다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한 개인의 기구한 팔자''신세 한탄'으로 묻힐 뻔한 기지촌 성노동자 여성들의 고통은, '고향을 떠난 이들의 삶', '사회가 가한 폭력' 같은 정교한 개념을 통해 비로소 '외면해선 안 될 역사적 진실'로 세상에 드러난다. 차가운 학술 용어가 값싼 동정 대신 상처를 준 거대한 사회 구조를 명확히 짚어내는 수술칼이 되어준 셈이다. 덕분에 잊혔던 존재들은 가장 당당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찾는다.

 

책의 중심을 관통하는 철저한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국가적 성공이라는 거창한 이야기 뒤에 얼마나 끔찍하게 사람을 소외시키는 과정이 숨어 있는지 보게 된다. 6·25 동란 직후 한국이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국가 안보를 최우선시하던 시절, 가장 힘없고 취약한 여성들은 달러를 벌어오고 동맹을 유지하는 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했다. 그러나 이후 국가가 좋은 옷을 차려입고 국제사회에 번듯하게 서게 되자, 이들의 존재는 근대화된 조국의 '부끄러움'이자 '오점'으로 취급되어 역사의 공식 기록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으로 건너간 10만 성노동자 여성들의 삶 역시 숨기기의 연속이었다. 이민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성공'을 위해 과거의 모든 상처는 없었던 일이어야 했고, 결국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끔찍한 시대의 폭력을 묻어두는 완벽한 밀실이 되었다. 저자는 이를 분석하며 '유령'이라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가져온다. 여기서 유령은 무서운 이야기 속 귀신이 아니다. 정상적인 역사에서 쫓겨나 눈에 보이는 형태는 잃어버렸지만,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주변을 맴돌며 자신을 증명하려는 억눌린 에너지 그 자체다.

 

더욱 소름 돋고도 놀라운 통찰은 이 유령 같은 상처가 세대를 뛰어넘어 자식에게 대물림된다는 뼈아픈 분석에 있다. 부모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삼켜야 했던 침묵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자녀 세대의 몸과 마음속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때때로 할머니나 어머니가 보이던 헛것이나 환청, 앞뒤가 맞지 않는 혼잣말들을 우리는 그저 개인의 '노망'이나 '정신병'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저자의 눈을 빌리면 그것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은 역사가 마침내 입을 열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외치는 방식'으로 새롭게 풀이된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저자의 학문적 개념이 의외로 더 깊은 차원의 공감과 치유를 끌어내는 기현상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저자는 상처받은 이들에게 "조리 있게 네 아픔을 증명해봐"라며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태도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조각난 기억을 억지로 짜 맞추는 대신, 부서진 고백과 이야기들을 그대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진실을 흐리려는 게 아니라, 산산이 조각난 마음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려는 치열한 노력이다.

 

슬프게도 이 책이 고발하는 비극은 완전히 끝난 과거의 일이 아니다. 수백 년 전 낯선 땅으로 끌려갔다 돌아와 가문의 수치로 몰렸던 여인들(환향녀), 일제강점기의 끔찍한 전쟁터로 희생된 소녀들(위안부), 미군 부대 주변에서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양공주)로 이어지는 착취의 역사는, 오늘날 화려한 대한민국의 뒷골목에서 거칠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다른 나라 이주 여성 노동자들의 삶 위로 고스란히 겹쳐진다. 철저한 연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 거대하고 잔인한 폭력의 반복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란 화려한 포장지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선 땅 밑의 감춰진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뼈아픈 반성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령 연구는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적 빚을 기억나게 하는 학문적인 청구서다. 비록 읽어내는 과정은 마음이 편치 않고 고통스럽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크기가 한 뼘 더 자라있음을 느낀다. 평생을 '수치스러움'이나 소외된 존재라는 낙인 속에 숨죽여 살아야 했던 내 할머니의 굽은 등을 이성적이고 지적인 언어로 뜨겁게 안아주는 이 다정하고 놀라운 경험을 모두가 느껴보면 좋겠다.


#한달한권할만한데 #온라인독서모임 #6월의책 #유령연구 #양공주 #성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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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회사
이상교.허지연 지음 / 스토리두잉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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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송 수단이 발달한 덕분에 일부러 하루 만 보 걷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만약 회사 동료들과 엿새 동안 매일 20km씩 말없이 걷는 순례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흔쾌히 응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단함이나 훈련소에서의 지옥 같은 밤샘 행군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가장 마지막으로 장시간 걸어보았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희미할 지경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온전히 내 두 발에 의지해 느리게 걷는 그 시간이야말로 끝없는 속도 경쟁에 지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멈춤'의 순간일지 모른다.

 

현대 사회는 바야흐로 초고속의 시대이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성과를 내고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우리는 어제를 돌아볼 틈도 없이 오늘을 버텨내고 있다. 회사라는 조직은 더더욱 그렇다. 냉정히 말해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 가치는 인정받지 못하며 남들보다 한 걸음이라도 앞서 나가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공간 아닌가. 매일 숨 가쁘게 질주하며 우리는 종종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잊어버리곤 한다. ‘무엇 때문에 달리고 있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그저 타성에 젖어 어지러운 삶을 방황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상교·허지연 저자의 걷는 회사는 이처럼 앞만 보고 달리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우리에게 매우 이례적이고도 묵직한 충격을 전해준다. 치과용 영상기기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 '바텍 네트웍스'는 어느 날 직원들의 손에서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채 낯선 일본 시코쿠의 순례길 위에 세웠다. 출장이나 워크숍도 아니고 성과를 논의할 회의나 발표 계획도 없다. 그저 단출한 흰옷을 입고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하루 20km56일 동안 말없이 걷는 게 일정의 전부이다.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처럼 지독한 비효율과 무모한 낭비가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생각 없이 걷는 하루에서부터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시작된다.

 

길을 떠나기 전, 참가자들에게 업무 도구인 노트북을 내려놓으라는 주문은 커다란 심리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히 업무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갈거라는 오만이거나 '나는 어딘가에 꼭 필요한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불안의 방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 대신, ‘나는 무엇을 책임지고 있는가라는 사회적 역할로 자신을 정의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누군가의 부모 또는 자녀, 회사의 임직원이라는 관계의 이름들이 나의 본질을 대체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도 없고 대화도 허용되지 않는 침묵의 순례길에서, 단단하게 굳어져 있던 자존심과 완벽주의의 껍데기는 서서히 균열을 일으킨다. 발바닥에 터져버린 물집의 통증을 느끼며 흙길을 걸을 때 비로소 온전히 자기 내면과 독대하게 된다. 어떤 참가자는 자신이 그동안 가정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아내와 어머니를 내 방식대로 통제하고 지배하려 했던 이기주의자였음을 깨닫는다. 또 다른 참가자는 내가 옳다는 확신에 가득 차 동료들을 질책했던 날 선 잣대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참회한다. 나아가 과연 내가 괜찮은 남편이자 아들인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였는지를 걸음 수만큼이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저녁 휴식 시간에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 질문들의 답은 어김없이 탄식과 눈물 폭탄으로 터져 나온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화려한 기업의 성공담이나 세련된 조직 혁신의 지침서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쉼 없이 달려온 구성원들을 잠시 멈춰 세우고 "정말로 당신이 없으면 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는, 다정하지만 처절한 자아 해체의 기록이다. 길 위에서 겪어낸 지독한 고통, 부끄러움과 통찰을 통하여 방황하던 이들은 비로소 타인을 완벽하게 분리된 독립적인 우주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내 태도를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실천임을 자각하게 된다.

 

우리는 늘 조금이라도 늦으면 인생의 낙오자, 패배자가 될 것처럼 자기를 채찍질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순례자들의 고백을 읽다 보면 대중가요 <한 걸음 더>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라는 노랫말처럼,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는 시간은 결코 뒤처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경쟁력은 사람을 소모품처럼 쥐어짜는 데서 나오지 않으며, 구성원의 온전한 성장이 곧 조직의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이 걷는 회사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동자승 인형과 친필 엽서는 일상에서 다시 예전의 속도로 빨라지려 할 때마다 "지금 무엇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느냐"고 묻는 멈춤의 표식이다. 속도를 늦추고 부드러운 눈맞춤을 시작했을 때 사무실의 공기를 봄눈 녹듯 따뜻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는 천천히 걷는 걸음이 가진 위대한 힘을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은 성과와 효율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둘러싼 이들을 떠올리며 지금을 보다 잘 살아가기 위해 천천히 걷는 걸음은 우리의 삶을 겉보기보다 훨씬 더 깊고 단단하게 변화시킨다. 여기서 생업과 관련하여 문득 한 가지 따뜻한 상상을 해본다. 우리 사회에 구성원의 삶을 귀하게 여기며 함께 걸어주는 '걷는 회사'가 존재하듯,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이 자라나는 교육의 현장에도 '걷는 학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윤 창출을 위해 효율과 성과를 최우선으로 따질 수밖에 없는 회사와는 달리, 학교는 온전한 사람을 길러내고 만드는 공간이기에 더더욱 바른 성품을 심어주는 인성 교육이 중요하다. 그 망가진 기능의 원상 복구를 원하는 듯, 오죽하면 참교육이라는 드라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까. 입시라는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질주하고 등수와 숫자로 서로를 평가하며 스마트폰의 차가운 액정 속에서 타인과 단절되기 쉬운 우리 학생들에게도 이러한 느림과 성찰의 시간이 간절하다. 실제로 내가 재직 중인 학교에서도 예전에는 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발을 맞추며 정을 나누던, 인간미 물씬 풍기는 '사제동행' 걷기 프로그램을 운영했었다. 길 위에서 교사와 학생이라는 인위적인 관계의 벽을 허물고 온전한 한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며 마음의 물집을 터뜨리던 그 따뜻한 시간이 지금은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사라져버려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

 

하지만 이 아쉬움은 오히려 우리가 지금 당장 이 책을 펼쳐 들어야 할 이유가 된다. 걷는 회사가 증명해 낸 무모한 비효율의 기적은 속도와 성과라는 괴물에 잠식당한 우리 사회를 깨우는 통렬한 일침이다. 진정한 성장의 길은 숫자가 아닌 사람을 향할 때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이 담담한 순례 기록은 기업과 교육의 방향을 고민하는 이들을 넘어 매일의 무한 경쟁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멈추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이제 숨 가쁜 일상의 질주를 잠시 멈추고 온전히 자신을 마주해보자. 삶의 새로운 이정표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스토리두잉 #걷는회사 #이상교 #허지연 #책추천 #성장 #순례 #걷기 #길위의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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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동물들 - 동물과 함께 살기 위해 시작해야 할 이야기들
최태규 지음, 이지양 사진 / 사계절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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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콘크리트와 쉼 없이 달리는 자동차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시는 오롯이 인간만을 위해 설계된 탐욕의 집약체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빌딩 숲과 격자무늬로 촘촘하게 짜인 아스팔트 도로 아래에서, 우리는 자연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배제했다는 오만한 착각 속에 살아간다. <도시의 동물들>은 이러한 인간 중심적인 이기주의와 무감각함의 부끄러운 민낯을 여실히 들추어내며, 우리가 도시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콘크리트 정글이 사실은 수많은 생명의 숨통을 조여 만든 찬탈의 현장임을 고발한다. 본래 그곳은 숲이었고, 강이었으며, 수많은 야생동물이 대를 이어 생을 영위하던 그들만의 온전한 안식처였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의 편의와 풍요라는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동물들의 터전을 무자비하게 파헤치고, 콘크리트로 대지를 질식시키며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이 책은 인간의 무분별한 팽창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생명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회색빛 틈새에서 하루하루를 처절하게 버텨내는 그들의 고단한 발자취를 생생하게 추적한다.

 


인간들은 도시 안에서 마주치는 생명체들을 지극히 이기적인 기준과 잣대로 분류하며 또 한 번 잔인함을 드러낸다. 매일 아침 음식물 쓰레기통 주변을 기웃거리는 너구리나 고양이를 향해 배설물이 더럽다며 손가락질하고, 밤마다 도심 공원에 나타나는 고라니를 보며 유해 야생동물이라는 낙인을 찍어 혐오의 시선을 보낸다. 길냥이, 닭둘기, 들개, 자라니 등으로 멸칭하며 인간으로 인해 비루해진 그들의 처지를 조롱한다. 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황조롱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둥지를 틀면 신기한 볼거리나 시혜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중성을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동물들에게 도시는 결코 스스로 선택한 서식지가 아님을 지적한다. 동물의 처지에서는 자신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보금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의 중장비에 의해 부서지고 그 위에 매끄러운 시멘트가 덮여버린 재앙의 현장일 뿐이다. 그들이 내는 날갯짓과 울음소리, 인간의 눈을 피해 쓰레기통을 뒤지는 행동은 도시를 어지럽히려는 침범이 아니라, 자신들의 원래 집을 빼앗은 침입자 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생존 투쟁이다.

 

오늘날 도심에서 벌어지는 생태적 비극들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속도의 경제를 위해 산을 깎아 만든 도로 위에서 매일 밤 수없이 죽어가는 동물들의 로드킬(Roadkill) 잔혹사, 그리고 더 탁 트인 시야와 미관을 위해 아파트와 빌딩에 설치한 통유리창에 부딪혀 날개가 꺾인 채 추락하는 새들의 비극은 인간이 자연에 저지른 소리 없는 만행이다. 길고양이 급식소를 둘러싼 이웃 간의 이기적인 갈등이나, 생태계의 연결고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생색 내기로 만들어 놓은 단절된 생태통로는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얕고 기만적인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단순히 도시 생물들의 생태적 특징을 나열하는데 머무르지 않으며, 인간이 저지른 이 거대한 약탈의 현장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 것인지 무겁고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결국 <도시의 동물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누리는 도시의 안락함은 동물들의 생존권을 찬탈한 대가로 얻어진 시한부 풍요이며, 이제는 인간 중심적인 오만을 버리고 그들을 배척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생태계의 일원'이자 '먼저 살고 있던 이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아스팔트 아래에서도 여전히 묵묵히 숨 쉬며 삶을 이어가려는 생명들의 경이로움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부끄러운 과오를 돌아보게 된다. 건축물에 작은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를 붙이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고, 난개발의 속도를 늦추며, 동물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일은 그들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으로 무너뜨린 지구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당연한 의무이다. 삭막한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상생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에게 이 책은 우리가 자연에 가한 폭력을 참회하고 진정한 공존의 길을 모색하라고 촉구하는 경고장이다.

 

#사계절출판사 #사뿐사뿐북클럽 ##도시의동물들 #야생과의공존 #인간은지구의주인이아니다 #동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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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때문에 불안하다는 착각 - 경제적 불안을 권하는 사회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법
다우치 마나부 지음, 김정환 옮김 / 부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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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 매일 아침, 숫자에 안부를 묻는 우리들의 피로감

출근길 붐비는 지하철 안, 사람들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붉고 푸른 숫자들이 쉴 새 없이 명멸한다. 누군가는 간밤에 요동친 미국 주식 창을 살피고, 누군가는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3년 안에 10억 모으는 법같은 유튜브 영상을 본다. 바야흐로 자산의 크기가 곧 삶의 정답이자 능력이 된 시대다. 재테크를 모르면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 취급을 받고, 월급만 차곡차곡 모아서는 평생 벼락거지를 면치 못한다는 서늘한 경고가 매일 아침 뉴스와 소셜 미디어를 도배한다.

 

이 거대한 숫자들의 경주 속에서 우리는 늘 어딘가 헛헛하고 불안하다. 투자를 열심히 하는 이는 혹여나 자산을 잃을까 봐 밤잠을 설치고, 나처럼 투자가 뭔지 모르는 이는 자본주의의 잔치에서 소외되어 영영 뒤처지는 것 같아 초조해한다. 나름대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얄팍한 통장 잔고와 남들의 화려한 수익 인증 글을 번갈아 볼 때면 내 삶의 무게마저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가 만들어낸 이 보편적 피로감은 오늘날 우리가 지병처럼 앓고 있는 시대의 우울증일지도 모른다.

 

2. 전직 금융 전문가가 던지는 역설적 진실

골드만삭스 출신의 금융 전문가 다우치 마나부가 쓴 돈 때문에 불안하다는 착각은 바로 이 지독한 피로감과 공포에 시달리는 독자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평생 수조 원의 돈을 굴리며 이자율과 수익률의 세계에 살았던 저자는, 놀랍게도 우리가 느끼는 돈에 대한 불안의 대부분은 진짜가 아니라 사회가 교묘하게 만들어낸 환영이라고 단언한다.

 

돈을 가장 잘 안다는 전문가의 이 역설적인 고백은, 매일 돈이라는 숙제에 짓눌려 있던 내게 뜻밖의 위로이자 깊은 사색의 문을 열어주었다. 저자는 금융 시스템과 미디어가 어떻게 개인의 불안을 부추겨 소비를 유도하고 불안정한 투자판으로 내모는지를 날카롭게 해부하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무능이 아니라 돈의 본질을 오해하게 만든 사회적 구조라고 위로한다.

 

3. 가격표에 가려진 내 일상의 진짜 가치

가장 오랜 시간 시선이 머문 곳은 가격가치를 명확히 구분하라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가격이 비싼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돈 그 자체에는 세상을 움직일 아무런 힘이 없고 먹을 수조차 없다. 사막 한가운데서 천만 원짜리 지폐 뭉치는 목마름을 달래주지 못한다.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은 누군가가 물을 정화하고, 병에 담아, 그곳까지 운반해 준 사람의 노동이다. 엄밀히 말해 돈은 그저 그 가치를 교환하기 위한 실행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을 숫자로 된 가격으로만 환산하려는 습관 때문이다. 시장의 변덕이나 투기 심리에 의해 매일 오르내리는 아파트값과 주식의 가격에 내 삶의 의미를 의탁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랬다. 직장에서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어 문제를 해결하며, 퇴근 후에는 가족의 따뜻한 저녁 일상을 보살피는 나의 귀중한 시간을 오직 월급의 액수로만 재단하며 자신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삶의 진정한 가치는 통장에 찍힌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주변을 지탱하는 매일의 성실한 노동과 관계 속에 있었다.

 

4. 노후를 지켜주는 것은 10억 원 잔고가 아니다

모든 현대인의 아킬레스건인 노후 불안을 다루는 저자의 시선은 무척 새롭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언론과 금융회사는 은퇴 후 인간답게살려면 최소 10, 20억 원의 현금이 필요하다며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펼친다. 하지만 저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래에 아무도 밭을 일구지 않고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금고에 쌓아둔 10억 원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병든 나의 미래를 구원하는 것은 지금 은행에 쌓아둔 지폐 뭉치가 아니라, 미래의 사회가 나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 건강한 공동체그 자체다. 나이 든 나를 칠흑 같은 밤에 응급실로 태워다 줄 구급대원, 전기를 생산해 줄 노동자, 사회를 굴러가게 할 다음 세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돈은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이 깨달음은 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뭉클한 연대감을 준다.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고 돈을 움켜쥐려는 각자도생의 길에서 벗어나, 지금 내 옆에서 땀 흘리는 이웃과 동료들이 곧 나의 가장 든든한 노후 자산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의 노동을 존중하고 가치를 순환시키는 것만이 진정한 노후 대비라는 통찰은 막연한 불안감에 쫓기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5.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만의 중심 잡기

물론 이 책이 자본주의의 현실을 외면한 채 투자를 전면 부정하거나 "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식의 공허한 정신 승리를 강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돈은 당연히 중요하며 합리적인 경제적 대비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저자가 진정으로 꼬집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교묘하게 주입한 학습된 불안에 우리의 영혼과 일상의 기쁨까지 내어주지는 말자는 점이다. 돈 공부가 남들보다 조금(사실은 많이) 부족하대서, 코인이나 부동산의 막차에 올라타지 못했다 해서 내 삶 전체가 실패작은 아니라는 뼈 있는 위로는 무한 경쟁과 비교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시원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우리가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남들보다 조금 얇은 지갑이 아니라, 돈을 잣대로 타인의 삶을 쉽게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땀방울을 불신하게 되는 차가운 마음일 것이다.

 

6. 다시, 내 삶의 운전대를 단단히 쥐며

누군가 내게 "그래, 이 책을 읽고 나니 당장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답할 것 같다. "아니요, 통장 잔고는 어제와 똑같고 저는 내일도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형편은 단 1원도 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적어도 오늘부터는 남의 화려한 수익 인증 글에 마음을 다치거나, 평범한 내 삶이 초라하다고 자책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결국, 이 책은 자본주의가 우리 목에 채워둔 투명한 족쇄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열쇠 같은 느낌이다. 남들의 화려한 숫자에 곁눈질하느라 잊고 있었던 내 일상의 단단함, 묵묵히 밥벌이를 해내며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자신에 대한 대견함을 되찾고 싶은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해드린다. 돈이라는 거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비로소 내 삶의 운전대를 다시 꽉 쥐게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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